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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52> 화폐 이야기 (31) 한국의 돈 100원 주화 ㉔ / 정유재란의 병력 비교, 정유재란 초기 육전 화왕산성전투와 고령전투의 승리
이전 글 옹달샘 <51>에 이어, ‘정유재란의 병력 비교, 정유재란 초기 육전 화왕산성전투와 고령전투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된 후, 1597년 1월 12일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이 서생포(西生浦 : 지금의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상륙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 그에 앞서 웅천(熊川 :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었다. ‘고시니 유키나가의 밀서’, 다시 말하면 ‘요시라의 반간계’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먼저 상륙한 것으로 돼 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의 일본 병력과 그 침공 경로, 그리고 그에 대처한 조선과 명의 병력을 살펴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6) 때의 일본 병력과 그 침공 경로는 ‘옹달샘 <32>’ 참조할 것.]
일본의 재침, 즉 정유재란 발발 당시 일본군의 병력과 각 부대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① 제1군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 : 임진왜란 제1군 대장} 14,700명
② 제2군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 : 임진왜란 제2군 대장} 10,000명
③ 제3군 :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 1568-1623 : 임진왜란 제3군 대장} 10,000명
④ 제4군 :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과도직무), 1536-1618}‧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과도승무), 1538-1618 :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동생} 12,000명
⑤ 제5군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도진의홍), 1535-1617 : 임진왜란 제4군 대장} 10,000명
⑥ 제6군 :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장종아부원친), 1539-1599} 13,300명
⑦ 제7군 :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봉수하가정), 1559-1638} 11,100명
⑧ 제8군 :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 : 임진왜란 제7군 대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1553-1625}의 양자]‧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 : 임진왜란 제8군 대장} 40,000명
일본 수군(水軍) 장수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등당고호), 1556-1630} 외에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등가명), 1563-1631},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협판안치), 1554-1626},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구귀가륭), 1542-1600} 등이었다. 일본 수군 병력은 별도로 명기돼 있지 않다. 정유재란 첫 해전인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1597년 7월 14-16일)에서 왜군은 육군과 수군의 구분 없이 수륙합동작전을 했다. 이것은 정유재란이 임진왜란과 다른 점이었다.
정유재란 발발 당시 일본군의 총 병력은 141,400여 명(조선 잔류 병력 20,300명 포함)으로서 임진왜란(160,000여 명)의 총 병력과 거의 같은 숫자였다.
이에 맞선 조선과 명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양국의 총 병력은 69,400명(조선 25,100명+64,300명)이었다.
(1) 조선군 : 총 25,100명
① 동로군(東路軍) : 경상좌병사 김응서(金應瑞, 1564-1624) 5,500명
② 중로군(中路軍) :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 1562-1622) 2,300명
③ 서로군(西路軍) :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 1557-1608) 10,000명
④ 수로군(水路軍)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7,300명
(2) 명군 : 총 64,300명
① 동로군(東路軍) : 제독(提督) 마귀(麻貴, ?-?) 24,000명
② 중로군(中路軍) : 제독(提督) 동일원(董一元, ?-?) 13,500명
③ 서로군(西路軍) : 제독(提督) 유정(劉挺, 1558-1619) 13,600명
④ 수로군(水路軍) : 도독(都督) 진린(陳璘, 1543-1607) 13,200명
이제 정유재란의 왜군 침공 경로를 알아본다. 정유재란 전체의 왜군 침공과 퇴각 등 전황도는 이전 글(옹달샘 <47> 또는 옹달샘 <51>)에 게재한 지도를 참조하기 바란다. 아래 지도는 정유재란 초기의 왜군 침공 상황도이다.
▲정유재란(1597-1598) 초기(1597년 8월 13일) 왜군 침공 상황도
정유재란(1597-1598)에서 왜군의 침공로는 3로, 즉 ① 육군 우군(제2군), ② 육군 좌군(제1군), ③ 수군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육군과 수군이 융통성 있게 육전과 해전에 수륙합동작전을 펴는 일이 많았다.
① 육군 우군(右軍 : 제2군이 선봉군) : 서생포(울산) → 밀양 → 창녕 → 합천 → 거창 → 황석산성.
② 육군 좌군(左軍 : 제1군이 선봉군) : 웅천 → 진주 → 사천 → 하동 → 구례 → 남원.
③ 수군 : 부산 → 거제도(칠천량해전) → 사천 → 하동(육군 좌군과 합류) → 구례 → 남원(남원성전투 이후 바다로 돌아갔음).
임진왜란(1592-1596) 전황도와 정유재란(1597-1598) 전황도(옹달샘 <47> 참조)를 보면 둘의 전략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는 제6군의 호남 곡창 확보에 실패했는데도, 일본의 주력군(제1군, 제2군, 제3군)은 한성(漢城, 서울) 점령에 집중하여 북상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는 수군을 포함한 일본의 전 병력이 호남 곡창 확보에 집중한 후 북상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순신이 1597년 2월 26일 체포되어 한성(漢城, 서울)으로 압송되어 갔는데도, 1597년 1월 12일 서생포(西生浦, 울산)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의 제2군 등 조선을 재침한 왜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은 조선 수군 때문이었다. 조선 수군을 놔두고 호남 곡창을 확보해봐야 운송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1597년 7월 14-16일)의 조선 수군 패전으로 조선 수군이 거의 궤멸되자 왜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칠천량해전의 조선 수군 패전으로 무방비 상태로 변한 조선의 바다는 일본 수군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조선의 내륙 역시 조선군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명군이 강화협상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평양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바람에 무인지경(無人之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왜군은 가는 곳마다 거의 무혈입성(無血入城)이었다.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1597년 7월 14-16일) 이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가 주도한 일본 육군 제2군, 즉 우군(右軍)은 서생포(西生浦 : 지금의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를 출발하여, 조선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밀양, 창녕, 합천, 거창을 거쳐 1597년 8월 10일경에 황석산성(黃石山城 :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위치한 해발 1,193m로서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 중 하나)에 도착했다. 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가 주도한 일본 육군 제1군, 즉 좌군(左軍)도 웅천(熊川 :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을 출발하여, 진주, 사천, 하동, 구례를 거쳐서 같은 시기에 남원성(南原城 : 지금의 전북 남원시)에 도착했다. 일본 수군은 사천(泗川 : 지금의 경남 사천시)에 상륙하여 하동에서 좌군(左軍)과 합류하여 남원성에 도착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주도한 제2군, 즉 우군(右軍)에 속한 부대로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과도직무), 1536-1618}‧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과도승무), 1538-1618 :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동생}가 지휘한 제4군의 12,000 병력은 도중에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어 성주(星州 : 지금의 경북 남부)로 향했는데, 같은 시기에 고령(高靈 : 지금의 경북 남부)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정유재란 초기의 세 육전이 고령전투, 남원전투, 황석산성전투였다.
이 세 육전(陸戰)을 이야기하기 전에 언급해야 할 것이 ‘화왕산성전투(火旺山城戰鬪, 1597년 7월)’이다.
화왕산성(火旺山城,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위치한 해발 757m의 화왕산에 있는 산성)은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34-576, 재위 540-576) 22년(562년)에 축조(築造)되었고, 여기에 진흥왕척경비(眞興王拓境碑)가 세워졌다. 그 후 조선 제3대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 10년(1410년) 화왕산성을 비롯한 경상도‧전라도의 여러 주요 산성을 수축(修築)했으며, 조선 제9대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70-1494) 이래 폐성(廢城)되었던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기간 중에 축성술(築城術)의 재능을 지녔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에 의해 크게 증축(增築)되었다.
▲정유재란(1597-1598) 첫 육전 화왕산성전투(1597년 7월)가 있었던 창녕 화왕산성
▲창녕 화왕산성 성벽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1597년 7월 14-16일)의 조선 수군의 완패 이후 왜군의 전면적인 내륙 침공이 본격화하자, 석문산성(石門山城 :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석문산 위치)을 신축하던 경상도방어사(慶尙道防禦使) 곽재우는 창녕으로 와서 청야전술(淸野戰術), 즉 초토화작전(焦土化作戰)으로 마을을 비우고, 1597년 7월 21일 고을 사람들을 데리고 화왕산성으로 들어갔다.
그 후 있었던 전투가 ‘화왕산성전투(火旺山城戰鬪, 1597년 7월)’이다. 그런데 화왕산성전투의 날짜와 내용은 찾기가 힘들다. 화왕산성전투에 대한 주장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투가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빛나는 전투였다는 것이다.
전자는 호남 점령이 주된 목표였던 일본 우군(右軍)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가 화왕산성의 견고함을 보고, 그리고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싸움을 걸지 않고, 지나쳤다는 것이다. 후자는 전투를 하여 곽재우의 900 의병이 대승했다는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후자의 주장이 18세기(영조 시대)의 정치적인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곽재우는 당쟁을 싫어했다. 하지만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외손자사위이자 그의 제자였던 곽재우는 자연히 동인{東人 :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열} 중 북인 계열(남명 조식 계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동안에 남인의 지지와 보호를 받으면서 남인 계열(퇴계 이황 계열)에 가까웠다. 서인(西人)은 노론{老論 : 율곡(栗谷) 이이(李珥) 계열}과 소론{少論 : 우계(牛溪) 성혼(成渾) 계열}으로 분열되었다. 영조 시대에는 노론(老論)과 남인(南人)이 대립관계였다. 노론이 노론 계열이었던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을 칭송하자, 남인은 남인 계열인 의병장 곽재우를 신화화(神話化)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곽재우의 ‘화왕산성전투(火旺山城戰鬪, 1597년 7월)’는 사실(史實)의 기록이 없는 점 때문에 아직은 ‘빛나는 전투’로 보기가 무리인 것 같다.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1597년 7월 14-16일)이 있은 지 한 달,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지 열흘 후인 1597년 8월 중순에 3개의 본격적인 육전(陸戰)이 벌어졌다. ①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 ②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 ③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가 그것이다.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를 ‘남원전투(南原戰鬪)’라고도 한다.
왜군의 전략은 전 병력을 크게 두 부대(우군‧좌군)로 나누어 각각 경상도 남부 지방의 두 공격로를 통해 서진(西進)하여 전주(全州)에서 회동(會同)해서 호남 곡창을 점령한 후, 한성(漢城, 서울)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제4군의 북진(北進)은 교란전술(攪亂戰術)이었던 셈이다. 그것이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였다.
고령전투의 전황도(戰況圖, 전투상황도)나 전투 내용이 잘 정리된 것이 없다.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수행한 전투들의 공통점이다. 정유재란(1597-1598) 전황도(아래 지도)를 보면 일본 제4군이 우군(右軍)에서 분리되어 성주 쪽으로 북상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정도이다.
▲정유재란(1597-1598) 전황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의 제2군, 즉 우군(右軍) 중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과도직무), 1536-1618}‧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과도승무), 1538-1618 :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동생}가 지휘한 제4군의 12,000 병력이 성주(星州)쪽으로 북상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의 우의정 겸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1537-1599),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모국기(茅國器, ?-?),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상주목사(尙州牧使)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성주목사(星州牧使) 이수일{李守一, 1554-1632 : 그는 1592년 의병을 일으켰으나, 예천‧용궁에서 패전했음. 그러나 그의 공이 인정되어 1593년 밀양부사가 되었고, 이어서 임진왜란 초기 싸우지 않고 도망친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박홍(朴泓, 1534-1593)의 후임으로 경상좌수사가 되어 왜군을 격퇴한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음. 그 후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이어, 1597년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음.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요청으로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명령을 어겨서 장형(杖刑)을 받고서야 참전했음. 임진왜란 후에도 그는 북방 오랑캐를 소탕하는 등 전공을 쌓았고, ‘이괄(李适)의 난’(1624) 평정에도 참여했음. 그의 아들 이완(李浣, 1602-1674)은 제17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의 북벌정책(北伐政策)을 주도한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유명했음}이 성주(星州)에서 긴급군사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 정기룡이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었다.
그 회의에서 정기룡이 토왜대장에 임명되자, 성주목사 이수일이 성주 성문을 잠그고 정기룡의 출전을 막았다. 고령(高靈)이 아니라, 성주(星州)를 방어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수일 :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 고을에 입성하여 성주 사람들이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 기뻐했는데, 이제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면 우리 성주 고을과 사람들은 어찌하란 말이오?”
정기룡 : “소장(小將)은 도체찰사와 도원수의 명을 받들어 의령, 합천으로 내려가 남적(南賊 : 왜적)을 치러 내려가야 합니다.”
이수일 : “아니 될 말씀이오. 장군이 성주 고을에 입성한 이상, 성주목사인 본관의 지휘를 받아야 하오. 예로부터 군중(軍中)에는 ‘장수가 전장에 나가면 천자(天子)의 명도 무시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으니, 비록 장군이 도체찰사의 명을 받았다고 하나, 본관은 성문을 열어드릴 수 없소이다.”
이 소식을 들은 도체찰사 이원익이 성주 성문으로 달려왔다.
이원익 : “성주목사 이수일은 듣거라. 그대가 성주목사이니 성주를 위하는 것은 좋으나, 성주 이외에도 즐비하게 벌여 있는 여러 고을들 또한 나라의 땅이니라. 나라의 땅이 모두 적에게 짓밟힌 뒤에 어찌 성주만 무사할 수 있겠는가? 또 장수가 전장에서 천자의 명을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은 함부로 쓰는 말이 아니니라. 그러니 성주목사는 성문을 열어 선봉대장이 출격할 수 있게 하라.”
그리하여 토왜대장(討倭大將) 정기룡 장군이 3,000명(의병 포함)의 병력을 이끌고 성주를 떠나 고령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가 시작되었다.
1597년 8월 15일 정기룡은 척후장(斥候將) 이희춘(李希春, ?-?)과 황치원(黃致遠, ?-?)에게 기병 400을 주어 왜군을 정찰하게 했다. 정기룡의 정예기병 400여기를 ‘감사군(敢死軍)’이라고 불렀다. ‘죽음을 무릅쓴 군대’라는 뜻이다. 이 400여기의 감사군은 의병(義兵)의 성격을 띤 돌격대로서 정기룡 장군이 일찍부터 조련한 부대였다. 이 기병 400이 정찰 중에 왜군의 척후대를 만나 격렬한 전투를 벌여 수급 100여 급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다음날인 1597년 8월 16일 정기룡의 3,000 병력과 일본군 12,000 병력이 고령의 용담천(龍潭川)에서 대치했다. 정기룡은 제2차 진주성전투(1593.6.19.-29.)에서 왜군에 의해 아내를 잃었었다. 정기룡은 왜군에게 살육(殺戮)당한 가족들과 왜군의 만행(蠻行)을 토로(吐露)하여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었다. 계속된 신경전 끝에 먼저 움직인 쪽은 조선군이었다. 조선군의 태반이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왜군은 전군이 조선군을 추격했다.
조선군이 고령 이동현에 이르러 갑자기 멈춰 돌아서서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정기룡의 신호와 동시에 3면에서 복병(伏兵)이 일어나 왜군을 에워쌌다. 왜군은 포위된 형국이었다. 조선군의 퇴각은 왜군을 유인하기 위한 정기룡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동현은 12,000명의 왜군이 3,000명이 되게 하는 그런 지형이었다.
임진왜란의 전투 양상은 육전이든 해전이든 간에 왜군은 근접전(近接戰)을 선호했고, 조선군은 그 반대였다. 그것은 조총 대(對) 대포와 활이라는 전쟁무기의 차이와 병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조선군은 근접전에서 많은 피해와 패배를 당했었다.
그러나 고령전투에서 조선군은 근접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 근접전에서 조선군은 먼저 질려포통(蒺藜砲筒)을 집어던져 적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일종의 원시적 수류탄인 질려포통(蒺藜砲筒)의 외양(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유물박물관)
‘질려포통(蒺藜砲筒)’은 오늘날의 수류탄(手榴彈)의 원리가 적용된 투척식 포탄으로서 일종의 원시적 수류탄이었다.
고려 말기의 최무선{崔茂宣, 1325(고려 충숙왕 12년)-1395(조선 태조 3년)}은 우리나라의 ‘화약의 아버지’, ‘포탄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중국보다 더 우수한 화약(火藥)을 연구, 개발하여 다양한 화약무기들을 발명했다. 로켓포(rocket gun)의 원조(元祖)인, 추진장치(推進裝置)가 달린 ‘대전(大箭)’, 대전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다연장로켓포(multiple rocket launcher)의 원조인 ‘신기전(神機箭)’, 조선의 위력적인 전쟁무기였던 ‘총통(銃筒, 천자총통 등)’, 대포를 운반하는 ‘화차(火車)’ 등을 발명했다. ‘질려포통(蒺藜砲筒)’ 역시 최무선이 발명한 것이었다[옹달샘 <39> 참조].
‘질려(蒺藜)’는 연못, 저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엽식물(浮葉植物)인 ‘마름’의 한자 표기이다.
▲부엽식물(浮葉植物) 마름
▲부엽식물(浮葉植物) 마름 꽃
▲부엽식물(浮葉植物) 마름 열매
‘질려포통(蒺藜砲筒)’이라는 이름은 이 마름 열매로부터 연유했다. 마름 열매의 외양은 꼭 쇠와 같이 단단하다. 뾰족한 끝은 무기가 되고도 남는다. 최무선은 마름 열매를 닮은 철질려(鐵蒺藜)를 만들어 질려포통 속에 넣었다. ‘질려포통(蒺藜砲筒)’은 조선 중기, 즉 임진왜란 무렵부터 ‘질려포(蒺藜砲)’로 불리기도 했다.
▲질려포통(蒺藜砲筒)의 내부 구조(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유물박물관)
질려포통의 구조는 아주 간단했다. ① 외통, ② 발화통, ③ 철질려로 구성되었다. 옹기 단지나 바둑돌통을 닮은 질려포통의 통(筒)은 나무나 종이로 만들었고, 대, 중, 소의 크기가 있었다. 질려포통을 던졌을 때 생긴 충격으로 발화통(發火筒) 속의 화약이 터지면서 불이 나고, 또 그 압력에 의해 파편(破片) 역할을 하는 여러 개의 철질려(鐵蒺藜, 마름쇠)가 여러 방향으로 튀어나가 사람을 살상하고, 공포감을 주었다. 또 질려포통 속에는 철질려(마름쇠) 외에 마른 쑥을 넣어 고약한 냄새가 나게 했고, 연기와 화염을 내는 물질을 넣기도 했다.
이순신의 5전 5승인 ‘당포해전(唐浦海戰, 1592년 6월 2일)’ 기록에는 질려포통을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질려포통은 육전에서보다 병사의 행동반경이 좁은 해전에서 더 효과적이었다. 전선의 갑판에 질려포통이 터지면 병사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최무선의 질려포통에서 진일보(進一步)하여 더 큰 위력을 나타낸 것이 선조 때의 과학자이자 화포장(火砲長)인 이장손(李長孫, ?-?)에 의해 발명되고, 제2차 경주전투(慶州戰鬪, 1592년 9월 8일)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였다[옹달샘 <39> 참조].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사용했던 이장손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용한 질려포통에 의해 혼란에 빠진 왜군들은 당황하여 조총을 겨냥할 겨를이 없었다. 화승식(火繩式) 점화법(點火法)을 이용한 조총은 요즘 총과는 달리, 심지에 불을 붙여서 총알을 발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요했기 때문이다.
또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에서 조선군이 처음으로 사용한 무기는 명군(明軍)에 의해 보급된 편곤(鞭棍)과 당파{일명 ‘삼지창(三枝槍)’}, 장창(長槍)이었다.
‘편곤(鞭棍)’은 길이 6척(약 1m80cm)의 봉에 혹들이 붙은 쇠망치가 달려 있는 무기로서 타작 도구인 도리깨로부터 연유된 무기였다. 편곤과 비슷한 것으로서 규격이 작은 것이 ‘쌍절곤(雙節棍)’이다.
▲근접전에서 유리한 비장의 무기 편곤(鞭棍)
▲마상전투에서 사용된 편곤(鞭棍)
이날 이동현 벌판에는 왜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쌓였다. 마지막에 후방으로 퇴각하던 왜군들은 기마궁사들의 표적이 되었다.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에서 왜군 12,000명이 전멸했다. 달아난 왜군은 겨우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생포된 왜군의 한 장수는 조선 조정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아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정기룡 장군을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부른다.
1597년 8월 16일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에서 조선군과 왜군의 백병전(白兵戰)이 벌어졌던 고령 이동현 전장(戰場)은 조선군보다 4배가 더 많았던 왜군의 병력 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지형의 이점을 살려서 싸운 조선군 3,000명은 12,000명의 왜군이 아니라, 3,000명의 왜군과 싸운 것이기 때문이다. 왜군이 아무리 밀려 들어와도 조선군은 1대1로 싸운 셈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조선군 1명이 왜군 4명씩을 이겨낸 것이었다.
병력에 있어서 1대4의 불리한 조건이었는데도, 조선군이 대승을 거둔 것은 ① 유인전술에 의해 유리한 지형을 선택한 것, ② 질려포통, 편곤, 당파, 장창을 사용하여 왜군을 혼란에 빠뜨려서 그들의 조총과 칼을 무력화시킨 것, ③ 조선군이 겁을 내지 않고, 용맹하게 싸운 것, ④ 정기룡 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이 전투에서 명군(明軍)의 지원은 없었다. 그래서 왜군은 물론, 명군의 장수들도 정기룡 장군과 그의 부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 2014.7.17.(목). 조귀채]
첫댓글 화황산 은 몇년전 봄에 쩔쭉이 굴랄을 이루어 너무도 아름답게 피었을때 한번 가보았습니다.
작가님 덕분에 정기룡 장군의 뛰어난 전술력과 지도력을 알게 되었네요.....감사합니다....ㅎ
감사합니다. 정기룡도 준비된 장수였기에 승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