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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 수 일 : 2015-12-04 13: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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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수성현은 어디인가?(세 번째 질문)
국사편찬위원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본인은 한민족 상고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재야사학자 김봉렬입니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한 후 고조선의 중심부에 낙랑군을 설치하였습니다. 낙랑군에는 수성현遂城縣이 있었는데, <태강지리지>‧<진서>‘지리지’ 등 중국의 여러 사서들은 ‘낙랑군 수성현에서 진나라 장성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은 이들 사서들의 기록을 토대로 진나라 만리장성을 한반도 평양까지 그리고 있으며,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첨부한 “<진서>‘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낙랑군 수성현은 한반도 평양 일대가 아니라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 일대라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진서>‘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는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안보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본인은 귀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질의하오니 구체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질문 1.
<진서>‘지리지’는 평주의 위치에 대하여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통설에서는 진나라 평주가 위치하였던 ‘우공의 기주지역’과 ‘주나라의 유주’ 및 ‘한나라 우북평군’을 오늘날 어느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습니까?
질문 2.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제작한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더라도 ‘한나라 우북평군’은 현 중국 하북성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진서>‘지리지’에 기록된 평주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평주에 소속된 낙랑군 수성현도 당연히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는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에서 편찬된 사서인 <무경총요>에는 이곳 수성현이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으며, 장성유지도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서>‘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고 보는데 이에 대한 귀 위원회의 견해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첨부1. 진서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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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일 : 2015-12-11 09:35:00
처리결과(답변내용)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우리 역사에 대한 사랑과 각고의 연구에 경의를 표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진나라 평주가 위치하였던 ‘우공의 기주지역’과 ‘주나라의 유주’ 및 ‘한나라 우북평군’을 오늘날 어느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을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로 보는 견해를 피력하시고, 본 위원회의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위치 비정는 그렇게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고조선의 강역과 관련하여 논쟁이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미 여러 차례 밝혔듯이 한계의 논쟁점에 대해 저희 국사편찬위원회가 어떤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또한 한 개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하여 논평을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학계의 연구 경향을 제시함으로써 질의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지적대로 진나라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진서> 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 또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데 대하여 이론은 없습니다. <진서> 지리지의 낙랑군이 어느 때의 낙랑군을 지칭하느냐의 문제가 관건일 것입니다.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에 25개의 현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같은 속현의 수는 한의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을 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편입시킨 이후의 것으로 이해됩니다. 더욱이 소제 원봉元鳳 6년에는 현도군이 관할 토착민들의 반발에 의해 그 치소를 옮기고 있습니다. 낙랑군을 설치할 당시의 속현(屬縣)은 조선(朝鮮)·염한·패수(浿水)·점제(黏蟬)·수성(遂成)·증지(增地)·사망(駟望)·둔유(屯有)·누방(鏤方)·혼미(渾彌)·탄열(呑列) 등 11현이었습니다.
낙랑군은 한나라 소제(昭帝) 때인 BC 82년에 진번군을 병합하여 그 일부에는 새로 낙랑군 남부도위(南部都尉)를 분치(分置)하고, 그 관하에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의 7현을 두고 그 가운데 소명현(昭明縣:信川)을 남부도위의 치소로 삼았습니다. 또, BC 75년에는 앞서 BC 82년 현도군에 폐합되었던 임둔군의 고지(故地)도 병합하여 그 관할구역이 너무 광대하고 멀어서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印)의 옛 땅에는 낙랑군 동부도위를 분치하고, 그 관하에 동이(東暆)·불이(不而)·잠대(蠶臺)·화려(華麗)·사두매(邪頭昧)·전막(前莫)·부조(夫租) 등 이른바 영동(嶺東) 7현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들 지역이 위만 조선의 고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현재 학계에서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한반도설과 요동설, 이동설이 제기되어 있습니다.
(1) 먼저 한반도설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를 중심으로 大洞江 유역에서 찾는 견해로서, 크게 중국측 학자들의 견해와 우리 나라 전통 학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측 학자 북위인北魏人 역도원酈道元(469-527)은 『수경주水經注』를 통해 平壤=樂浪郡 朝鮮縣=(王險城)을 주장하였고, 또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인용된 신찬薛瓚은 왕험성王險城과 낙랑군樂浪郡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이후 당대唐代에 편찬된 『괄지지括地志』 등에서 이와 같은 이해를 피력하였고,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 정설로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문헌에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대한 기록에서 대부분의 지명을 평양平壤을 중심한 지역과 연결시켰습니다. 또한 조선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고조선古朝鮮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으로 비정하였습니다. 이들 견해에 바탕하여 1930년대 집중적으로 발굴된 평양지역의 중국계 유물, 유적을 근거로 하여 고조선 대동강 중심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북한학계에서는 도유호를 중심으로 일련의 고고학 관련 학자들이 60년대 초반 평양지역의 유적 유물에 입각하여 평양중심ㅅ설平壤中心說을 주장하였으나 요동설로 공식적 입장이 정리된 이후 이같은 견해가 제기되지 못하다가 최근 단군릉檀君陵 발견이 공식적으로 공표되면서 새로운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대체로 위만조선의 고지를 중심으로 평남의 대부분과 황해도의 일부에 걸쳐 있었는데, 설치 당시의 속현(屬縣)은 조선(朝鮮)·염한·패수(浿水)·점제(黏蟬)·수성(遂成)·증지(增地)·사망(駟望)·둔유(屯有)·누방(鏤方)·혼미(渾彌)·탄열(呑列) 등 11현이었고, 낙랑군의 치소(治所)에 대해서는 평양설도 있지만, 대동강의 대안(對岸)인 토성리(土城里)가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질의하신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하여서는, 학계 일반으로 낙랑군은 황해도 지역에 있다가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인하여, 4세기 초엽(314~333) 모용외慕容廆에 의하여 대방군과 함께 요서지역으로 이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진서> ‘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 관련 기록은 이치된 낙랑군의 위치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평양지역에 낙랑한묘樂浪漢墓가 5,000여 기가 있고, 1990년대 초 평양시 낙랑구역 통일거리에서 발굴된 정백동 364호 나무곽무덤에서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부(樂浪郡初元4年[B.C.45]縣別戶口簿)>가 발견되어 보고된 바 있는 데 근거합니다. 동 호구부에는 수성遂成이 낙랑의 속현으로 등장하고 있어, 수성현 또한 한반도 일대에 있다가 낙랑군의 이치와 함께 요서지역으로 옮아 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부(樂浪郡初元4年[B.C.45]縣別戶口簿)> 관련 내용은 권오중 외, <낙랑군호구부연구>(동북아역사재단, 201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고조선 요동중심설은 중국측 기록중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王險城이 험독險瀆에 위치하고 있다는 견해로 대표됩니다. 남송대南宋代 배인裵駰이 찬술한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후한대後漢代 사람인 서광徐廣의 견해를 인용하여 창려昌黎에는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당대唐代 사마정司馬貞이 찬술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서광徐廣의 말과 후한대 응소應昭의 주를 인용하여 요동의 험독현險瀆縣이 조선왕朝鮮王의 구도읍舊都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왕험성王險城이 요동遼東지역의 험독현險瀆縣 지역에 있으며 이곳이 조선왕의 구도읍舊都邑이라는 인식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기록 가운데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동지역에 설정하는 견해는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制詩註』에 나타납니다. 이후 홍여하洪汝河는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에서 진번眞番을 심양遼陽에 비정하고 패수浿水도 요하遼河로 비정하여 요동중심설을 견지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신경준申景濬, 이익李瀷 등이 고조선의 중심을 요동지역으로 비정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신채호申采浩,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정인보鄭寅普로 이어져, 이같은 고조선의 요동중심설이 1960년대 초 이후 북한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인 바 있습니다. 요동설과 관련된 북한학계의 일련의 연구과정은 요동설, 평양설 및 이동설로 나뉘어 진행된 논쟁의 기간을 거쳐 리지린으로 대표되는 요동설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단군릉 발굴이후 평양중심설로 급선회되고 요동지역은 발전과정에서 확대된 것으로 이해하는 혼란을 보여준 데 대하여, 우리 학계에서는 윤내현尹乃鉉이 북한학계의 요동설에 일부 내용을 변화시킨 입장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3) 고조선古朝鮮 중심지 이동설移動說은 요동설과 평양설의 절충적 측면이 강한 견해로서 두 지역에 공존하는 고조선 관련 문헌 및 고고학적 자료의 해석을 위한 방안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즉,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지역으로 설정하고 후기에는 중국세력의 확장에 따른 영역축소라는 이유로서 한반도 서북지역으로 이동하였다는 논리입니다. 먼저 기자족단箕子族團의 존재를 중시한 견해로서 천관우千寬宇는 사료에 나타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중시하여 이를 기자족箕子族의 이동이란 관점에서 이해하였습니다. 이형구李亨求는 은말殷末·주초周初에 대릉하大凌河유역에 주족周族으로부터 밀려난 은왕족殷王族인 기자箕子를 대표로 하는 은殷의 유민遺民들이 기자箕子조선을 건국하여, 기원전 12-11세기경 기자箕子의 이주로부터 기원전 2세기초 조선왕朝鮮王 준準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을 이어 왔다고 보았습니다.
근래에 서영수徐榮洙는 전성기의 고조선의 강역은 대체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동호東胡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을 경계로 진국辰國과 이웃하며 북쪽과 동쪽으로 예맥濊貊, 부여夫餘, 진번眞番, 임둔臨屯, 숙신肅愼과 접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노태돈盧泰敦은 기원전 3세기 초까지 고조선의 중심부는 요동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해성현海城縣의 서남쪽과 개평현蓋平縣을 포괄하는 지역의 어느 곳에 있었고 연燕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은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한반도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파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동론적 인식은 북한학계에서는 1960년대 초반 정찬영鄭燦英 등 일부의 견해로서 나타났었습니다.
결국 고조선의 위치 관련 자료의 대부분이 중국과의 접촉에 관련된 지명地名들에 관한 것으로서 이들 자료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른 해석 차이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중국세력과의 관계에서 대표적으로 부각되는 지명은 고조선 관련 사료에서 추출되는데, 전국시대 연燕과 고조선의 관계, 연대燕代 요동遼東의 위치, 진장성秦長城의 위치, 만번한滿番汗, 패수浿水의 위치, 왕험성王險城의 위치, 및 한漢에 의해 설치된 한사군漢四郡 특히,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문제 등에 집중되어 논의가 진행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학계에서 이들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 곧 문헌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조사까지 폭넓게 진행되어야 할 사안으로 사료됩니다. 선생님의 우리 역사 사랑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선생님의 학문적 성취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 위원회에서는 민원처리 결과에 대한 민원인의 만족도를 파악하여 민원처리 업무 개선에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시어 민원처리 만족도를 등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기획협력실
첫댓글 참고로 국사편찬위원회의 답변 중 중요한 부분의 글자를 제가 파란색으로 변경하였으며, 한자로 쓰여진 부분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한자음을 추가하였습니다.
晉書/地理上/平州
樂浪郡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朝鮮周封箕子地.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鏤方 駟望
도대체 국사편찬위원회를 포함한 강단사학계의 눈에는 '樂浪郡漢置', 즉 '낙랑군은 漢나라에서 설치하였다'는 글귀는 보이지 않나 봅니다. 4세기 초엽의 이치니, 교치니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낙랑군 遂城縣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遂城 일대라는 것을 국편에서 일단 인정한다는 것은 놀라운 진전이네요.
국사편찬위원회의 답변 중 "선생님의 지적대로 진나라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진서> 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 또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데 대하여 이론은 없습니다. <진서> 지리지의 낙랑군이 어느 때의 낙랑군을 지칭하느냐의 문제가 관건일 것입니다."라고 한 부분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착각인듯 합니다.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진나라 평주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조양의 동쪽으로 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진서> 지리지의 낙랑군 수성 또한 한반도 평양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제 질문은 <진서> '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는 분명히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인데 왜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평주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로 보느냐를 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국편에서는 엉뚱하게 위와같이 답변을 했군요.
@사람이 하늘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번 상고사 토론회에서 공석구 교수의 발표 내용을 살펴보면 갈석산의 유무를 빼고는 동일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진서지리지의 수성현은 한반도의 것으로, 반면 태강지리지의 수성현은 요서(여기서 요서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의 것으로 주장하는군요. 착각이 아니라면 그나마 국편의 이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긴 합니다.
@지구인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은 공석구 교수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진서> '지리지'에서 평주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일대를 가리키고 있으므로 창려군과 요동군 및 현토군도 모두 하북성지역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국편의 주장처럼 낙랑군이나 대방군은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인하여, 4세기 초엽(314~333) 모용외慕容廆에 의하여 요서군으로 이치된 곳이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물론 이것도 말이 안되지만) 창려군이나 요동군이 하북성 지역에 있는 것은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첨부한 <진서지리지> '평주'조의 기록입니다.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연이 모두 제멋대로 요동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ㆍ창려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을 멸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했다. 함녕 2년(AD 276년) 10월, 창려ㆍ요동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현 18,100호이다" <진서지리지> '평주'
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삼국지> '공손도전'에 따르면 공손연의 멸망과 관련하여 "성을 함락하여 (공손연이 임명한) 상국相國 이하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고 공손연의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고, 요동遼東, 대방帶方, 낙랑樂浪, 현도玄菟가 모두 평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평주는 공손씨 정권의 강역이며, 공손연을 멸한 위나라 또한 평주를 두었다가 유주에 합하였으며, 서진이 함녕 2년(276)년에 다시 평주를 설치하였던 곳입니다. 이를 통하여 공손씨가 차지하였던 지역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는 공손씨가 한반도의 황해도 일대까지 차지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요.
@사람이 하늘이다 제가 비정한 서진의 평주 위치와 통설의 평주 위치 지도입니다.
사람님의 수고에 격려를 보냅니다...다만, 여전히 '공회전되고있다'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군요...즉, 그것은 국편이나 사람님이나 물론 통설이나 모두 史實이 아닌 부분을 머릿속에 미리 그려놓고서 대응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각자 자기들에게 유리한 사료들을 중심으로해서 짜맞추어진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보이는데, 그것은 '역사왜곡의 단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있기 때문입니다...어쨋든, 사람님의 주장이 그나마 '초기왜곡'에 속하지만, 국편이나 통설에서는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후기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마 그들은 '그 왜곡의 틀'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것입니다.
어쨋든, 국편이나 통설에 맞서서 분투하시는 한편으로 '왜곡되지 않은 역사'를 찾는 작업에도 눈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북성'까지 찾으셨으면, '오리지널'을 찾을 수 있는 1차관문은 넘은 것으로 봅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남아있는 사료들' 속에서 '하북성'을 찾아내실 수가 있었었지만, 이제부터는 반드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갈석과 좌갈석'과 같은 문제는 반드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만, 그 실상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갈석산은 오로지 백석산 하나뿐'인데, '무체현 갈석산은 착오'이고, '진황도시 갈석산은 가짜'라고만 보시면, 결코 '實史'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물론, 모두 가짜입니다만,]
@카오스 한민족의 상고사를 공부하는 것은 밤하늘의 천문을 공부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봅니다. 상고사의 수많은 사건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지요. 밤하늘의 천문현상은 북극성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지요. 북극성을 알면 복잡해보이는 별들의 움직임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복잡다단해 보이는 한민족의 상고사도 고조선의 중심부에 위치했던 갈석산을 이해하면 한눈에 들어옵니다. 또한 모든 역사학자들의 주장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지요.
@사람이 하늘이다 제가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는 이유는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으므로 그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뚜렸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갈석산은 그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뚜렸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도 그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중국의 수많은 사서들을 통해서도 그 위치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 장성의 유적도 남아 있습니다. 즉 갈석산은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유물과 과학적 합리성으로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카오스님은 무엇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며,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카오스가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으므로 아마 피곤하실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사람님을 괴롭힐려는 의도가 아니므로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무엇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려하느냐?'고 물으셨으니, (굳이 답을 드린다면) '합리성과 현실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즉, 이는 '현존 역사사료들이 모두 합리성과 현실성에 맞지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러차례 지적햇었지만, '갈석'이 '갈석산'으로 둔갑하는 과정이 비합리적이고 또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지요. 3천년전 현,섬서성 사람이 무슨 재주로 치수를 해가면서 현,발해만까지 온다는 것입니까? '왜곡'일 수 밖에요...
@카오스 그래도, '답(實史)'를 찾으려면, 역시 무엇인가 실마리는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갈석산'과 견줄 수 있는 힌트로는 '河(하)'가 있습니다...즉, 고대인들이 과연 무엇을 '河(하)'라고 하였었으며, 왜 '河(하)'라고 하였었는지?...그리고 그 '河(하)'의 끄트머리가 왜 '海(해)'인지?를 근원적으로 추적해 보시면 답이 보입니다. 역사왜곡자들이 모든 기교를 부려서 '왜곡해 둔 것(현존사료)들'을 액면 그대로 믿어버리면 결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어쨋든 너무 피곤해 하시는 것 같아서 이제 댓글을 그만 두겠습니다...자주 들여다 보겠으니 필요하시면 글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사람님의 건승을 진정으로 바랍니다
@카오스 하나라는 현 중국 하남성의 황하 일대에 위치했던 조그마한 나라였는데 과연 하나라 우임금이 하북성 보정시 일대까지 와서 치수를 했을까? 이런 카오스님의 의문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저 또한 우임금이 하북성 보정시 일대까지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우공구주의 강역은 춘추전국시대와 진.한대를 거치면서 지나족의 강역이 확대됨에 따라 그 지역이 옛날부터 자기들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임금의 전설을 접목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아, '통설에서 현,하남성 정도로 보는 하나라'으l 우임금을 '현,섬서성사람'이라고 한 것에 대한 지적이시군요...일단, 카오스도 사람님이 말씀하신 바와같이 '춘추전국시대와 진.한대를 거치면서' '그 지역이 옛날부터 자기들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임금의 전설을 접목한 것'으로 보지만, 그 위치는 하남성이 아니라 섬서성이었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라'의 존재여부나 위치와 관계없이...'우임금은 어디까지나 전설'이므로 '현,섬서성에 접목된 우임금은 현,하북성의 발해만까지 오지 않았었다'는 것을 지적했었던 것이고, 결국, 하나라, 우임금과 관계없이 '碣石'과 '海'는 섬서성 부근이었다는 의미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