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 메르 데 글라세 내려가는 철계단 / 우 : 연도별 빙하 침식
몽땅베르 역에서 그랑드조라스 방면을 배경으로 / 뒤 : 이호석, 좌 : 송금진, 우 : 이주용
- 마지막 세대 -
메르 드 글라스(Mer de Glace)
06.03
성혁이형의 컨디션이 나흘이나 회복되지 않자, 우리는 혹시 코로나는 아닐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코로나에 걸리고 말고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지만, 귀국에 차질이 생기는 상황만큼은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다행히 자가검진 결과는 음성. 프랑스 감기이니 프랑스 약이 잘 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 약을 주고 나온다.
오늘도 비 소식이 있어, 등반 대신 메르 데 글라스(Mer de Glace) 빙하로 정찰 겸 빙벽등반을 나간다. 이번에는 케이블카가 아닌 산악열차를 타고 몽땅베르(Montenvers) 역까지 이동해야 했는데, 케이블카만 타다 열차로 산을 오르니 감흥이 새롭다. 느리지만 여유를 즐기며 뱃길로 외국에 나가는 기분이 이러할까?
아, 배 아파. 빨리 좀 갔으면.
다행히 아직까진 그럭저럭 날씨가 나쁘지 않다. 테라스에 서서 빙하를 따라 드휴(Aiguille du Dru)부터 그랑드 조라스(Grandes Jorasses)까지 이어지는 시원한 풍광을 눈에 담는다. 마을에선 끄트머리만 보여 첨탑처럼 얇은 줄 알았던 드휴는, 실은 코뿔소의 뿔처럼 밑동이 굵직하면서도 끝은 예리한 매혹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호석이형과 돌아다니다 보면 형은 한 번씩 내게 벽 이름을 묻곤 했는데, 매번 어김없이 형의 손끝에는 뾰족하게 솟은 드휴 - 베흑뜨(Aiguille Verte) 연봉이 있었다. 한 세 번쯤 물어올 때, 최소한 저번에 보았던 곳과 비슷하다는 생각은 했을 텐데 다시 묻는 것을 보면 ‘저 벽만큼은 절대 까먹고 싶지 않은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케이. 드휴는 호석이형이랑 온다.
메르 데 글라스는 ‘얼음의 바다’라는 뜻이라 한다. 거대한 빙하 조각들이 바닷물처럼 넘실거리는 거대한 골짜기를 상상해 보라. 얼마나 멋들어진 이름인가.
사실 알프스의 빙하들 또한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바였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역에서 빙하 바닥으로 내려가는 길 중간중간에는 ‘연도별 빙하 높이’ 표지판이 있었는데, 이를 한 장에 담은 사진을 보고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1825년만 해도 몽땅베르의 바로 아래인 해발 1,860m까지 올라와 있던 빙하면이 1995년에는 1,725m, 2016년에는 1,590m까지 총 270m를 녹아내렸다. 수직으로 63빌딩 높이만큼의 빙하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린 것이다. 게다가 최초 135m가 녹는 데에 170년이 걸린 것에 비해, 다음 135m가 녹는 데는 겨우 2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어쩌면 설원을 걷고, 빙하 지대를 횡단하며, 설벽과 빙벽을 오르는 일은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처럼 겨울을 좋아하던 클라이머들은 매년 요요처럼 우울증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런 날엔 비슷한 처지들을 불러 모아 먼지 앉은 장비나 닦고, 달랠 길 없는 마음을 옛이야기로 달래야지.
며칠째 등반을 못하니 잡생각이 많아진다.
완벽하던 예보가 웬일로 살짝 빗나가 생각보다 일찍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도 피할 겸, 렛쇼 산장(Leschaux) 정찰은 후순위로 미루고 빙하 동굴로 들어간다.
얼음 동굴이라니.. 놀랍고도 아름다웠다. 물론 아름다운 공간에 왔다고 우리의 행동거지까지 아름다워질 리는 없지만. 핫초코를 마시다 말고, 스크류 구멍에 부으면 슬러시가 되어 나오지 않겠냐는 헛소리에 즉각 구멍을 뚫는다. 초딩들이 따로 없다.
비가 그쳐 동굴을 나서는데, 호석이형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역으로 돌아간다. 동굴서부터 춥다 춥다 하더니, 설마 호석이형마저 감기인가 싶다. 살살 자존심도 긁어봤건만 끝내 돌아가는 것을 보니 꾀병은 아니었다.
주용이형과 둘이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갈수록 거세져 결국 우리는 워킹에서마저 후퇴를 했다.
자켓에 트라우저까지 있었음에도 옷과 장비가 제법 젖어 축축하다. 이대로 기차에 오르는 것은 너무 민폐 같아 역 테라스 난간에 널어 볕을 쪼인다. 올라올 때만 해도 비가 쏟아졌는데, 지금은 옷에서 김이 날 정도로 해가 뜨겁다. 으휴, 이놈의 날씨.
마무리는 며칠째 고대하던 터키식 찜질방. 사실 우리보단 성혁이형에게 더 필요한 찜질방이었지만, 기침약이 너무 세서 온종일 병상을 벗어날 수가 없단다.
“아이고 두야, 사람 약을 사오라니까 돼지 약을 사왔노..”
첫댓글 고달픈 여정이 가슴에 와 닿는 애잔함이…
녹아가는 빙하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