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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마산면 관포리, 배우 김진규 선생 생가를 찾았습니다. 6, 70년대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걸작이란 걸작들의 주연을 쓸다시피 한 당대 최고의 배우. 부인 김보애가 쓴 평전에 고향을 회상하는 절절하고 애틋한 수기가 들어 있더군요. 그곳을 예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직접 만든 ‘성웅 이순신’이 흥행에 실패하여 당시 4억 원짜리 집까지 팔고 제주에서 말년을 보내다 돌아가셨답니다. 생가 터에 육촌동생이 살고 있었습니다. 제주로 가신 후에는 잘 오지 않았다고 하데요. 전에는 지산초등학교와 서천중학교에 풍물등속도 기증하고 이런저런 신경을 쓰셨다고 합니다. 낙심하여 고향에도 들르지 못하셨나 봅니다. 가봤더니 금녕 김씨 집성촌으로 큰 배우가 날만한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육촌 말씀으론 오래전 방송 팀이 한번 찾은 후로 누구도 오지 않았다구요. 표지석 하나 없더군요.
1955년, 영화사에 길이 남을 ‘피아골’이란 걸작을 만든 이강천 감독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신 분으로 이 이가 데뷔시킨 분들이 위의 ‘피아골’로 김진규, 이예춘, 그 밖의 작품으로 허장강, 장동휘, 최지희, 전영선 이들은 훗날 대배우로 입신하지요. 18년 감독생활에 28편을 발표하셨답니다. 최초로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을 1958년도에 만드신 영화사에 빛나는 분입니다. 이 도 서천 출신으로 그 생가지를 찾고 싶었습니다.
조선 말 판소리 5명창 중 두 분 이동백, 김창룡 명창이 서천 분이란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판소리사의 대 명창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 명창이 강경에서 장항 빗그매로 이사하여 김창룡, 김창진을 낳습니다. 김정근은 김창룡에게 소리를 김창진에게는 소리북을 가르칩니다. 이동백도 빗그매에서 김창룡 형제와 김정근에게 소리를 배웁니다. 훗날 서울로 온 두 분은 대 명창으로 일세를 풍미합니다.
5명창의 소리북을 쳤던 김창진은 작파하고 부여 무량사에서 십년 독공 끝에 득음, 서울 원각사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중고 동편 서편 5명창의 장단점을 섭렵하여 극복해낸 소리이니 얼마나 뛰어났겠습니까. 이후 명창들의 견제가 어찌나 심하였던지 그 중 사형인 이동백, 친형인 김창룡의 구박이 제일 극심했답니다. 견디다 못한 김창진은 서천 너더리로 내려와 아편을 하다 돌아가십니다. 어린 시절 그에게서 소리를 배운 박동진 명창은 말년에 스승을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더군요.
김창진 명창의 친손자가 탤런트 김인태, 손부 배우 백수련, 증손자 영화배우 김수현으로 내려오는 우리 예인의 뿌리가 이리 깊습니다. 또한 제자 박동진 명창이 판소리 최초로 다섯 바탕을 완창, 판소리사에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뿌리인 김성옥 명창은 진양조를 최초로 창안한 분으로 그 진양조를 받아 펼쳐낸 송흥록 명창과 처남 매부지간이며 그 송흥록은 동편소리의 창시자입니다. 그러니까 김성옥을 중심으로 소리의 유파가 갈려 나갑니다. 강경에는 비정할 만한 기록이 없으니 장항 성주리가 당연히 판소리의 메카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그 가치를 추정할 수조차 없습니다.
생가 터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그들이 평생 수련하여 남긴 예술혼이 펄펄 살아서 예술 전분야로 퍼져 나가 우리 삶과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작은 흔적이나마 소중하지 않을 수 없지요. 알려진 유적들을 어서 정비하여 서천의 새싹들에게 자부심 뿐 아니라 전국에서 공부하러 오는 곳으로 가꾸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몇몇 사례를 들었지만 타 분야 예술인들도 수두룩하다 들었습니다. 뉴스서천이 한 분 한 분 발굴해내어 기초를 쌓아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창간 16주년을 축하합니다. 깊고 탄탄한 언론으로 무궁하소서.
◆박광배/시인, 출향인
잊혀가는 서천의 인물 뉴스서천이 찾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