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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로 하는 곳에 마다하지 않고 꾸준히 활동한 삶
- 충남시민재단 김지훈 실행위원장
제 이야기를 하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요즘 메르스가 유행이라서 여러 행사나 모임들이 취소되는데, 우리 시민연대 정기모임도 취소되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청중 웃음). 어제 저녁에도 대표님이 강권하였고, 메르스도 동지애로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달 착륙하던 해에 고흥에서 태어나다>
저는 1969년에 전라남도에서도 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흥 시골학교 관사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흥은 지금은 우주선과 유자로 유명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주 멀고 먼 삼면이 바다인 시골 반도땅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해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인간이 최초로 착륙한 해입니다. 그 때는 전국적으로 달 착륙에 열광하던 때라서 우리 친구들 이름을 보면 월(月)자가 많았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초등학교 교사였고 고향은 고흥이고, 가난한 농촌에서 농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가 농사지으라는 걸 거부하고 광주에 올라가서, 독학으로 일하면서 공부해서 교대를 들어가셨고, 그래서 조금은 늦게 교사생활을 시작했던 의지가 강한 분입니다. 어머니도 고향이 같은 고흥이고요. 부잣집 딸이었고 70이 넘으신 옛날 분인데, 키가 1미터 60센티가 넘는 훤칠한 키에 미모(?)를 갖추었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저에게 1970년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해인데요, 제가 많이 아팠습니다. 열이 나고 잘 먹지를 못해서 어머니가 이 병원 저 병원, 유명하다는 데는 다 다녔다고 합니다.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말 저를 고치려고 힘들게 백방으로 다니며 고생했다고 해요. 아마 소아마비이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덕분에 장애에 대한 큰 불편 없이 어릴 때에는 밝게, 구김살 없이 컸던 것 같습니다.
<교사 아버지와 함께 보낸 섬마을 소년>
제가 좀 크자 아버님이 고흥 보다 더 시골인 섬으로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당시에 전남에서 교감으로 승진을 하려면 섬에서 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어머니는 가기 싫다고 하고 아버지는 설득하고, 그런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제게 거금도는 지금도 좋은 섬으로 남아 있습니다. 금산으로 불리웠던 거금도 하면 몇가지 떠오는게 있는데 그중 레승링 박치기 선수 김일의 고향으로 유명해요(청중 감탄). 김일 선수가 고향에 와서 학교에서 시범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그렇듯 김일도 부모님 산소를 잘 만들어서 크고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거금도의 영웅이었죠.
또 하나는 넓고 푸른 바다입니다. 학교 앞이 바로 바다여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모래사장이자 바다였습니다. 지금도 고깃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며, 포근한 섬마을이 기억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니 저는 학교에서 거의 자랐습니다. 집 밖에 나가면 학교고, 학교가 끝나도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1시간 이상 걸어서 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오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즐겁게 생활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 아들이라는, 뭐랄까 그런 후광을 입었다고나 할까(청중 웃음),
섬은 농번기가 육지하고 다릅니다. 농사지을 때가 농번기가 아니고 김을 양식하니까 김 따는 겨울이 농번기죠.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를 도와서 추울 때 일을 많이 했습니다. 저야 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고생을 많이 했어요. 당시 저희 아버지가 선생님이다 보니 명절 때 선물이 들어오는데, 모두가 김이었습니다(청중 웃음).
시대나 사건은 그 사람의 개인적 경험으로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광주사태, 광주항쟁은 보고 싶던 만화영화를 보지 못한 걸로 연결됩니다. 어느 날인가 마징가제트를 하는 MBC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근데 학교에 가면 본 얘들이 있고, 막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MBC가 폭도들이라고 방송을 하니까, 시민들이 불태워버린 거 아닙니까. 섬이 꽤 큰 편인데, 가운데 중간에 산이 있어서 우리가 사는 쪽은 광주방송이 잡히고 아래쪽은 제주방송이 잡혀서, 제주방송이 나오는 아이들은 마징가제트를 볼 수 있었던 거죠.
<광주로 유학온 후, 마음의 상처를 받고 방황한 고교시절>
그렇게 보내다가 중학교 2학년 때 광주로 올라갑니다. 누나가 고등학교를 광주로 가게 돼서 함께 간 거죠. 그 당시 공부를 좀 잘하거나, 공부를 시키려면 순천이나 광주로 갔습니다. 아무래도 애들 교육 때문에 어머니가 얘들을 데리고 광주로 온 거죠. 아버지는 더 작은 섬으로 갑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으로. 그 때부터 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본 것 같아요.
광주에 오니 아무래도 섬하고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공부도 그렇지만 어울리는 것도 좀 차이가 나고 그랬습니다. 고등학교는 금남로에 있는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에 들어갔는데, 2학년 초반까지는 별일 없이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생님께서 소풍을 갈 때, 제가 다리가 좀 불편해서 그런지, 좀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를 줘서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근데, 수학여행을 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담임선생이 ‘수학여행 가지마라’는 거예요, 참 나, 지금도 생각하면 화가 나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데, 제가 부담스럽긴 했겠지만, 너무 한 거죠. 다른 친구들 다 가는데, 가지 말라니. 부모님도 가라고 해서 가긴 갔어요.
결국 수학여행 가서 상처를 진짜 많이 받았어요. 설악산 중턱까진 가잖아요, 울산바위인가, 선생이 나 보고 숙소에서 짐을 보라는 거예요. 아이들은 다 가는데 혼자 남아서 가방을 지키고 있자니, 속으로 눈물이 많이 나더라고요,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고. 그 뒤로부터 학교에 건성으로 다니기 시작했죠. 나가지 않을 때도 많았고. 그렇다고 부모님이 마음 아파하실까 봐 얘기도 못 했죠(청중 숙연).
성적도 떨어지고, 방황도 많이 하니 부모님은 난리가 났죠. 어머니가 참 많이 우셨어요. 3학년 되어서도 학교에 나가지 않으려 했고, 공부와는 담을 쌓았죠. 부모님이 학교에 많이 불려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죄송한 시기였습니다. 나중에 학교하고 부모님이 동의해서 자율학습이나 이런 것 안 하고 대학원서도 쓰지 않기로 하고, 9시에 딱 맞춰 등교하고 오후 4시에 나가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 때는 데모도 많고 최루탄이 매일 터졌습니다. 한국사회도 격변기였고 저도 방황기였습니다.
<삼수 끝에 학생운동의 꿈을 품고 대학을 가다>
학력고사야 나하고 상관없었지만 친구들 점수도 나오고, 대학도 간다고 하니까 좀 그러더라고요. 놀기도 많이 놀았고. 그래서 부모님에게 재수한다고 했죠. 대신 광주가 아니라 서울에서 하는 조건으로. 그래서 후암동 있는 정일학원에 정식 시험 봐서 들어갔습니다. 그 때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점수도 올라가는 게 보이고,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점수도 괜찮게 나왔는데, 전기 대학에 떨어졌어요. 후기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일 년 더 하면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삼수를 하게 됩니다. 부모님은 어차피 군대 안가도 되니까, 너는 4수를 해도 다른 친구들과 비슷하다고 격려해 주셨죠(청중 웃음). 근데 광주로 내려간 것이 실수였어요. 학원이 광주시내였는데, 진짜 데모가 많았거든요. 광주에서는 87항쟁 이후에도 몇 년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는데, 내가 다니던 학원이 충남도청 부근이어서 늘 데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친한 친구들도 대부분 대학에 다녔는데, 특히 전남대, 조선대 유명했잖습니까, 녹두대다 오월대다, 특히 저와 가장 친한 친구가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고 앞에서 잘 싸우는 선봉대였습니다. 그 친구가 데모 끝나면 학원 쪽으로 와서 같이 얘기도 하고 운동권 노래도 배워주고 그랬습니다. 그 때 김지하씨 시에 붙인, ‘새’라는 노래도 많이 불렀죠. 그래서 삼수는 공부로만 보면 실패했다고 할 수 있는데, 나도 무조건 대학교에 가서 학생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이과였는데요, 그 시절엔 유전공학이 한창 뜰 때였습니다. 전기 떨어지고 유전공학이 있는 대학을 전국적으로 뒤지다 보니까, 여기 신창에 있는 순천향대학교가 있더라고요. 부모님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 되도록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도 있고 해서, 원서를 썼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교통편이 지금처럼 좋지 않아서, 광주에서 순천향대까지 기차타고 버스 타고 다섯 시간도 넘게 걸렸죠.
1990년도 신창은 허허벌판이었지만, 제게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을 대학교 들어가면서부터 했습니다. 선배나 누가 권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한 거죠. 그래서 동아리를 찾는데, 친한 친구 얘기가 무조건 ‘조국’이나 ‘청년’자가 들어간 곳을 가라는 거예요. 그 때 마침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는 현수막을 보고, 바로 이거다, 해서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그냥 나오는데, 민중문화연구회라는 데에 사람들이 있어서, 공부하는 곳이냐고 물어보니, 당연히 할 수 있다고 그러죠. 나중에 보니까 친구가 들어가란 곳하고 성향이 반대인 정파였더라고요(청중 웃음). 사람 운명은 어쩌면 순간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 후로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몸이 좀 불편해서 거리에서 앞장서서 싸우지는 못했지만 빠지지 않고 다 했죠. 집에는 일 년에 한 번 갔나, 그럴 정도로. 부모님 간섭도 받지 않고 원하는대로 살았다고나 할까, 그렇습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 아버지와 더욱 가까워지다>
그러다 93년도에 오토바이사고가 크게 났습니다. 얼굴이 부서지고 이가 전부 나가고, 순천향대병원에 입원했는데, 폐에 피가 많이 고여서 바로 수술 안하면 죽는다고 그랬답니다. 근데, 병원에서는 보호자 동의를 받아야 하잖아요. 아버지가 연락을 받고, 무조건 수술부터 하라고 하고, 외삼촌 차를 타고 3시간 반 걸리는 길을 2시간 만에 오셨답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버지를 보는 순간, ‘아빠!’하면서 폐에 있던 피를 엄청나게 토해냈답니다.
며칠 있다 깨어나 보니, 피를 토해내서 수술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그래요. 그 때 아버지가 제게 ‘너는 더 이상 효도하지 마라. 살아있는 것만 해도 효도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말만 믿고 지금도 효도하지 않고 있어요(청중 웃음). 그만큼 아버님 충격이 크셨던 거겠죠.
지금 이빨이 전부 제 것이 아닙니다. 얼굴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고 좀 이그러지고 그랬습니다. 사고 이후 광주에서 3개월 정도 치료를 했습니다. 이때 아버지하고 얘기를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몇 년을 속 썩였는데, 제가 다치고 나서 그런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특히 순천향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하루에도 수십 명의 선,후배들이 찾아와주고, 의대 선,후배들이 병원에서 더 챙겨주고, 자기들 자취방까지 엄마에게 쓰시라고 비워주니까 부모님이 많이 감동한 것 같아요. 그래도 ‘학교생활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해주시고, 당신도 다가오려 하고, 권영길도 찍으시고, 민주노동당 정당 투표도 해주시고, 제가 하는 사회운동을 많이 인정해주시는 편입니다.
(청중, 아버님은 교장이 되셨나요?) 당연히 교장선생님으로 퇴임을 하셨구요. 당시 가장 생각나는 사건으로 아버지가 막 교장이 되셨을 땐데, 정부에서 정년을 단축한다고 밀어붙였습니다. 이해찬이 총리였는데, 그래서 전 아직도 좀 싫어합니다. 65세가 너무 많다고 저도 생각은 했는데, 한꺼번에 60세로 한다니까 너무 한 거죠. 아버지는 교장을 하려고 평생 섬으로만 돌아다니며,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면서 고생 고생했데,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교장을 하면 보통 8년을 하는데, 3년만 하고 나가야 한다니, 더구나 아이들 4명이, 저 위로 누나가 있어요, 하나도 결혼을 안 했으니 오죽했겠어요. 어머니도 한숨을 많이 쉬셨죠. 저도 도서관에 가서 우리 아버지 얘기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62세로 정년이 단축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누나가 결혼하고 차례로 모두 결혼을 했습니다(청중 웃음).
<온양신문 기자로 사회진출>
어쨌든 졸업을 하고 직장을 구해야했습니다. 그 즈음에는 학생운동에서 사회진출이 유행했습니다. 사회에 나가서 운동을 계속하기 위한 직장에 취직하자는 것이죠. 광주에 내려가서 도서관을 다니면서 입사할 곳을 찾으면서 3달 정도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아는 분을 통해서 고흥수협 자리를 알아봐 주셨어요. 고흥은 수협이 농협처럼 큰 곳이고 소개로 들어갈 수 있어서, 가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전화가 한 통화 왔습니다. 나 보다 한 학번 위지만 나이는 나 보다 한 살 어린, 대학교 때부터 아주 친했고 지금 대전일보에 있는 이찬선 기자가 지역신문을 하자며 아산으로 올라오라는 겁니다. 아니 그때는 지역 언론운동이란 말을 많이 썼어요. 홍성을 필두로 지역에서 언론운동을 하자는 그런 흐름이었습니다. 온양신문에서 같이 일하자는 겁니다.
지금 돌아보면 고흥수협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온양신문에 취직해서 사회운동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길에 후회는 없습니다. 온양신문에서는 주로 노동 농민단체나 사회 현장 취재를 맡았습니다. 시내는 자전거 타고 다니고 시외는 버스 타고 다니면서 현장을 발로 뛰었습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고, 바른 언론, 기득권에 영향 받지 않는 독립 언론으로 최선을 다했던 때로 기억됩니다. 나름 인정도 받고, 사명감이 충만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금도 열심히 농민, 노동자, 시민 운동을 하는 형님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특히 학교 다닐 때 만났던 명진이 형은 기자 때도 제가 유일하게 자랑스럽게 받았던 촌지를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형은 늘 저에게 많은 촌지(?)를 주고 있어서 가장 의지하는 형입니다.
<이상형인 여성과 결혼?
1996년부터 5년 정도 하니까, 신문도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저도 재미가 좀 덜해졌습니다. 아마 기득권으로부터 독립적인 그런 부분이, 제 생각과 조금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지금의 아내인 푸른아산21의 박기남 국장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박국장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저하고 비슷한 시기에 온양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알고는 지냈습니다만, 제가 고민을 할 때 비슷한 고민이어서 급격히 가까워졌습니다. 박국장은 부산에서 노동상담소 일을 하다가 제가 온양신문 일을 할 즈음에 올라와서 아산YMCA, 아산농민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부산에 내려갈까 말까 생각할 정도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제 이상형은 술을 같이 먹고 새벽까지 토론하는 여성이었습니다. 당시에 박국장은 진짜 술도 잘 먹고 새벽까지 끄떡없이 얘기를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지금도 이상형이 같은가, 라고 물어보면 좀 달라진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새벽까지 토론한다는 건, 다른 말로 자기 고집을 잘 꺽지 않는다는 얘기일 수 있거든요(청중 웃음). 사실 오늘 제가 발표한다고 말하니까, 자기 얘기나 아들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말라고 했는데(청중 웃음), 좋은 이야기만 했다고 해주세요.
하여튼 2001년에 결혼하였습니다. 박국장은 처음에 내가 신문사 다니니까 돈을 좀 버는 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았고, 또 결혼하고 고민을 얘기하니까 흔쾌히 그만두라고 해서, 결혼 2달 만에 신문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저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백수 비슷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청중 웃음). 대신 박국장이 돈을 벌어야 해서 아산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와 아산YMCA에 이어 푸른아산 21까지 여태껏 벌고 있습니다.
<시민운동과 육아를 병행하다>
다른 신문사에 취직을 할까, 그런 저런 고민을 하던 중에 지금의 최대표께서 찾아왔습니다. 최대표 성격 잘 아시잖아요(청중 웃음). 그 때는 아산시민모임이었으니까, 아산시민모임에 젊은 피가 필요하다, 무조건 맡아서 해야 한다, 승낙을 안 하면 가지 않겠다, 뭐 그런 분위기 있잖아요. 지금도 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기자를 해봤으니까, 의사나 약사든 시민들을 시민모임에 가입시켜서 시민모임이 전문성을 갖도록 해 달라, 그런 취지였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 아산시민모임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시민운동에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민모임에서 상근을 시작할 때, 20만 원인가 그렇게 받았습니다. 다음 해에 종화를 낳았는데요, 박국장이 주로 돈을 버는 처지라 제가 주로 아이를 키웠습니다. 사무실에 데리고 출근하고 회의에도 데리고 가고 그랬습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종화는 지역에서 키웠다라고. 그 얘기가 맞는 것 같아요. 늘 함께 했으니까요.
종화를 키울 때 육아일기를 3권 썼습니다. 100일 동안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면 책을 출판해 주는 사이트가 있었는데 주로 그곳을 많이 이용해서 육아일기를 썼습니다, 글을 쓰려면 잘 관찰해야 되잖아요,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기록하다 보니까 사실 제가 더 많이 생각하고 성숙되더라고요. 종화가 5학년 때쯤 약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듯해서 100일 정도 ‘종화의 성장 일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쓴 적도 있습니다.
<아산시민모임을 이끌면서 느낀 보람들>
아산시민모임에서 참 보람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2002년 당시에 티비에서 ‘기적의 도서관 만들기’ 프로젝트가 지역의 신청을 받아서 어린이 도서관을 지어주는 프로그램으로 꽤 유명했는데 우리 아산도 해보자고 제안해서 아산어린이도서관을 추진하게 되었죠. 나중에 선정되진 않았지만, 그럼 우리 힘으로 만들어보자 해서 어린이책 시민연대, 당시엔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이랑, 여러 단체가 힘을 모아서 추진했죠. 그런 노력으로 아산에도 어린이 도서관이 만들어 졌습니다.
학교급식운동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지역에서 최초로 주민발의 형식으로 조례를 제정했으니까요. 당시에는 주민발의 요건이 엄청 까다로웠습니다. 유권자 기준으로 20분의 1인가 그랬습니다. 엄청 많은 숫자죠. 다른 단체도 고생이 많았지만 제가 실무책임을 맡아 지역 곳곳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주민발의. 주민감사청구. 주민소송, 주민소환이 지방자치에서 주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산에서 주민발의운동을 제대로 해본 거죠. 지금도 우리 단체가 학교급식 심의위원회와 학교급식센터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권력감시나 시정참여 운동도 주요한 활동이었습니다. 시장 판공비 공개 운동, 시의원 관광성 해외연수 문제제기, 예산학교 등 열정적으로 사업을 펼쳤습니다. 지금은 참여예산제가 보편화됐고 주민숙원사업으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주민의 의사를 직접 예산에 반영하는 사업도 한참 했습니다. 숭례문이 불탔을 때 아산에 숭례문을 본떠 지으려고 했거나, 지역사회에 충분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았던 이어령 문학관을 세운다거나 하는 부분을 잘 막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아산시 예산안 분석을 통해 낭비성 예산안이 삭감될 때는, 이런 보람으로 시민운동을 계속하는구나, 그렇게 느꼈습니다.
또 장애인에 대한 여행보험 등 보험차별을 시정한 부분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장애인은 사고가 많을 것이다’는 전제로 여행보험을 받아주지 않거나 다른 보험도 차별이 많았습니다. 아산 장애인부모회와 함께 소송을 해서 이겼습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그 권리를 찾아나가는 사업은 앞으로도 지속하면 좋을 듯합니다.
사회복지정책을 관주도가 아니라 현장에서 민간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복지협의체 활동이나 식량주권 사수나 로컬푸드 운동 등에도 참여하고 이라크파병반대나 최저임금인상운동 등, 돌아보면 크고 작은 일이든 아산지역사회에서 우리 시민연대가 다양하게 참 많은 일을 했으며, 연대했던 것 같습니다.
<충남지역 시민운동의 중추로 성장하다>
2010년 넘어서는 주로 충남지역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 좀 재미없어들 하시니까 짧게 말씀드릴께요. 충남참여자치연대 집행위원장을 10년 동안 하면서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을 하다보니까, 우리 시민연대만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NGO 단체, 비영리 비정부 시민단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시민단체들이 젊은 활동가로 세대교체가 되지 않고 있고, 재정적인 어려움이 많은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2~3년 고민하고 여러 단체와 함께 작년에 충남시민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충남차원에서 NGO, NPO 지원을 위한 중간조직을 만들어서 시민운동을 활성화시키자는 취지죠.
제가 충남시민재단 창립을 위해 앞에서 뛰었고, 작년부터 실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10여 개에 달하던 직책을 모두 정리하고 충남시민재단에만 전념하고 있는데요, 서울, 부산. 광주. 충북, 대전, 대구 등 광역자치단체 여러 곳에서 시민재단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충남도 차원에서도 이런 공익활동을 지원하는 조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도의회 분포가 10대 30이라 여의치 않지만,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아산시민연대도 충남시민재단과 함께 NGO 센터나 중간지원조직을 함께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일을 마다하지 않은 삶, 바람과 각오>
마지막으로 제가 시민연대를 하면서 느낀 점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고 저도 잘 하진 못했는데요, 시민이 함께하는, 회원이 행동하는 모임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명이나 논평, 정책제시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한두 명이 하는 게 아니라 회원이 참여하고 시민들과 함께하는 그런 운동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좀 더 다양한 사업이 필요합니다. 권력감시, 시민참여가 중심이지만 자칫하면 의식있는 사람들만의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일반 시민들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강좌나 강연, 생활상의 문제도 함께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합니다. 어렵지만 함께 노력해야 우리 시민연대가 더 커지고 더 큰일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아산에 온지 26년째입니다. 고향인 고흥이나 6년 정도 생활한 광주 보다 훨씬 많이 살았습니다. 대학에 오고, 사회에 나와서부터 아산, 충남에서 계속 사회운동을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하겠죠. 잘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필요한 일이라면 빼지 않고 해왔던 것 같습니다.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꾸준히, 필요한 곳에서 활동하는 그런 사람으로 계속 일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산이라는 땅에 당신이 있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