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희 (가수/대학 교수)
가족 : 배우자 유훈근
소속 :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장
학력 : 고려대학교 법학과
김상희(金相姬, 1943년 3월 29일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1]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고려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1년 가수로 데뷔, 1965년부터 활동하였다.[2] 1971년 TBC 가요대상, 1973년 제1회 대한민국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의 학장 및 한국교통방송의 DJ로 활동 중이다. 1999년에는 아들의 병역비리에 가담을 하기도 하였다.[3] [4]
히트곡으로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울산 큰애기〉, 〈대머리 총각〉, 〈경상도 청년〉, 〈금산 아가씨〉 등이 있다.
학력
고려대학교 법학과
경력
2009 ~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장
수상내역
2005 KBS가요대상 공로상
2004 제11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대상
1998 제3회 예술실연자대상 가수부문
1973 제1회 대한민국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
장르 경계 넘나들며 다채로운 음악적 실험
60년대는 대중가수를 아티스트로 대접하는 요즘과는 달리 '딴따라'로 비하했던 시절이다. 학벌을 중시했던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학사가수라는 학벌 프리미엄의 위력은 대단했다.
고려대 법대 출신의 여학사가수 김상희는 당대를 대표하는 인기가수다. 그녀의 존재가치는 단지 고학력가수의 프리미엄 틀 안에 안주했던 인기가수보다는 장르를 뛰어넘는 다채로운 음악적 시도와 실험에 도전한 뛰어난 보컬리스트였다는 점에 빛을 발한다. 감미로운 중음역의 음색으로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김상희는 팝, 뮤지컬, 민요, 가곡과 더불어 재즈까지 섭렵하며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보컬리스트다.
세월이 많이 흐른 요즘 그녀의 존재는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 60~70년대 대중음악계를 풍미했던 그녀의 이름 석 자는 젊은 세대들에게 그저 왕년의 인기가수 정도로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70년대는 물론이고 한국대중음악사상 최고의 섹시 여가수로 평가받는 김추자도 왕년의 인기 트로트 가수로 오해되는 요즘이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신중현 사단의 대표여가수로는 김추자, 김정미, 펄시스터즈로 각인되어 있다. 김상희는 신중현사단 여가수의 계보에서도 거의 삭제되어 있다. 이는 한순간의 외도라 말할 정도로 짧았던 활동 탓이기도 하다. 장르적으로 신중현사단 최고의 사이키델릭 여가수로 김정미의 이름이 선명하다. 문제는 한 때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신중현사단의 사이키델릭 여성 록커로 자신은 물론이고 장르 자체를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렸던 주인공이 김상희란 점이다.
건강 문제로 법조인 꿈 포기 대중가요 음반 시장에서 김상희의 음반들은 비교적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그 중 짧은 신중현사단 활동시절의 음반 3장은 초희귀 음반으로 대접받는다. 신중현의 작품이라는 브랜드 파워와 더불어 김상희의 파격적 변신과 실험적 시도가 안겨주는 신선함 때문이다.
김상희는 우수한 학업성적뿐 아니라 학생회장, 학교 신문반 사진기자 등으로 활약하며 교내 노래꾼으로 유명했던 멀티플레이어 재능이 범상치 않았던 소녀였다.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요즘처럼, 그녀 역시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 입상자 출신이다.
고려대 입학 전인 1961년, KBS의 전속가수를 모집 광고를 보고 심심풀이 삼아 응모를 한 그녀는 수백 명의 응모자중 베스트 8에 선발되며 정식 가수가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것은 샘표간장의 라디오 CM송을 취입하면서부터.
당시 이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불리어졌다. 그녀가 한동안 무명가수의 범주에 머문 것은 학교와 가족에게 가수활동을 숨겨야 했던 개인사정이 한 몫을 했다. 가수활동을 숨기기 위해 가장 좋아하는 글자인 (희)姬와 친한 친구들 이름과 성에서 한 자씩 가져 온 (김)金과 (상)相을 조합해 예명을 김상희로 정했다.
그녀의 본명은 최순강이다. 4년 연속 납세액 1위 가수 가수활동과 병행해 법관을 꿈꿔왔던 그녀는 건강 문제로 법조인의 꿈을 접고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에 들어갔다. 1965년 '울산 큰애기' 1966년 '대머리 총각', '경상도 청년' 1967년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뜨거워서 싫어요', 1968년 '단벌신사', 1969년 '빨간 선인장'등 감미로우면서도 발랄한 음색의 노래들로 히트퍼레이드를 벌였다.
1960년대는 경제재건 의욕이 탱천했지만 빈곤했던 시절이다.
옷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상경을 시도했던 시골 젊은이들의 행렬이 이어진 이농현상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었던 1965년에 발표된 김상희의 '울산 큰 애기'는 그녀의 빅 히트곡이다. 1968년에 발표한 '단벌신사'는 엉뚱한 금지사연이 있다.
노래가 히트되면서 북한에서 노래가사 내용을 인용해 '남쪽은 가난해 신사들도 옷 한 벌 밖에 없을 만큼 궁핍하다'는 식으로 남쪽을 비방하는 노래로 이용했던 것.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첨예했고 반공의식이 투철했던 당시 방송금지의 멍에는 당연했다.
금지의 아픔도 잠깐, 결혼 후 '빨간 선인장'등 느릿하면서 분위기 있는 성인 가수 이미지로 변신을 꾀한 김상희는 1968년부터 1971년까지 '4년 연속 가수납세액 랭킹1위'라는 부와 명예를 얻으며 인기가도를 내달렸다.
신중현과 펄시스터즈가 합작해 꽃피운 소울, 사이키로 대변되는 <신중현사운드>로 인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던 1969년.
데뷔 1년 만에 가수왕에 등극한 펄자매가 전속사를 옮기며 결별을 선언했다. 이에 신중현은 가창력과 품격 있는 무대매너로 정평이 난 김상희를 픽업해 사이키델릭 여성 록커로 변신시키는 대모험을 단행했다.
몇 개월 동안 신중현으로부터 사이키델릭 창법을 사사받은 김상희는 서울 명동에서 열린 신중현 사이키델릭 리사이틀 무대에서 현란한 사이키 조명아래 신곡 <어떻게 해>를 선보였다. 기존 이미지와 전혀 다른 창법으로 소울 사이키 가요를 부르는 예상치 못한 김상희의 변신에 관객들의 반응은 '펄시스터즈의 모방'이라는 혹평과 '결혼 후 오히려 가수 연령을 5년이나 젊게 해준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이라는 찬사로 엇갈렸다.
이때부터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 김상희와 펄시스터즈는 국내 사이키델릭 여왕자리를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을 펼쳤다.
1969년 10월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신중현 리사이틀 쇼에서 결국 사고가 터졌다. 늦게 도착한 김상희로 인해 펄시스터즈와 출연순서로 다투는 과정에 욕설과 삿대질이 오간 감정싸움으로 번져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둘 사이의 충돌 사건은 진상조사단까지 구성되는 물의를 빚기도 했다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김상희는 1970년 1월 첫 사이키델릭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이때의 공연실황을 담은 '김상희 리싸이틀쇼' 음반은 기록에 취약한 대중음악계의 소중한 70년대 공연 자료이고 척박한 김상희의 최고 명반으로 손꼽힌다.
코미디언 배삼룡이 사회를 맡고 신중현과 퀘션스와 여대영악단이 세션을 맡았다. 이 실황음반의 백미는 2면에 수록된 사이키델릭 향기가 진동하는 7분50초짜리 신중현의 명곡 '어떻게 해', 신들린 애드립 연주는 듣는 이의 탄성을 불러낼 만큼 현란했다. 특히 록 버전으로 들어보는 김상희의 히트곡 '울산 큰 애기'도 놓칠 수 없는 특별한 트랙이다.
국제무대에도 진출
기성세대를 대상으로 활동했던 김상희는 무교의 코파카바나 클럽무대와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으로 진출하며 젊은 남성층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호사다마라 할까. 뜨거운 화제 속에 히트퍼레이드를 벌이던 '어떻게 해'가 '단벌신사'에 이어 금지의 수난을 당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제목과 가사를 '누워서 해'등 선정적인 내용으로 개사를 해 부르는 짓궂은 남성들이 문제였다.
저속하게 개사된 노래가 더욱 파급력을 발휘하면서 '창법저속'이란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이 내려졌다. 김상희의 사이키델릭 음악 모험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국제적인 가수로 거듭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그해 김상희는 패티김과 함께 '일본 EXPO 70'의 한국행사 '동경 아리랑페스티발'에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한 달 간 참여했다.
이때 관심을 보여 온 일본의 케논 음반사를 통해 여러 장 음반을 발매했다. 또한 야마하음악제에서 영어로 노래하는 김상희를 눈여겨본 미MGM사와 음반계약 체결을 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세계적인 트렘펫 주자 히노데루 마사와 합동콘서트는 물론 홍콩, 태국 등
동남아순회공연까지 개최하며 국제적인 가수로 명성을 쌓아나갔다.
성음사의 수출용음반은 김상희가 당시 팝송 곡으로 세계진출을 모색했던 시기였음을 증명해주는 음반들이다. 1971년 사이키델릭에서 다시 웨스턴 컨트리풍 장르로 복귀한 김상희는 국내 최초의 전속6인조 개인 전속악단 '김상희와 그녀의 악단'을 조직해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홍콩 등 해외공연을 성사시켰다.
1972년 문정선이 가곡 '보리밭'으로 빅 히트를 터트리자 가요계에 가곡음반 발매열풍이 불어 닥쳤다. 조영남, 은희와 더불어 김상희도 가곡에 도전했다. 1973년 제1회 한국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 수상에 이어 1976년엔 '즐거운 아리랑'으로 동경가요제 특별상을 수상하며 김상희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TV와 라디오 진행자로 거듭난 김상희는 80년대에 들면서 남편의 정치적 탄압과 함께 방송활동을 잠시 중단했지만 지금까지도 신보를 발표하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출처] 김상희 '어떻게 해' 하편 1969년 신향음향 짓궂은 남성들 선정적인 개사로 방송금지|작성자 절판소장
여자학사가수 1호, 김상희 |
| 카페매니저 |
이 노래 ‘삼오야(三五夜) 밝은 달‘은 '여자 학사가수 1호'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가수 김상희의 데뷔곡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김상희가 KBS 전속가수 합격 이후 1962년에 발표한 노래다.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구김살 없이 밝고 발랄하면서도 침착하고 동시에 현명해 보이며 호감이 가는...’ 김상희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이 노래는 이후 1979년, 32소절이 16소절로 바뀐 채 한 작곡가로부터 무단 도용되어 ‘십오야(노래 The Wild Cats)’로 발표되기도 했다.
이 노래는 지난 2006년, ‘손석우 노래 55년’ 음반을 통해 2절을 더 써넣어 또다시 김상희의 목소리로 재취입되었다. 삼오야(三五夜)는 음력 보름날 밤. 특히 음력 8월의 보름을 이른다. 먼저 김상희의 데뷔곡인 ‘삼오야 밝은 달’의 가사를 보자.
시원한 바람 서늘한 바람/산들산들 산들 불면/나뭇잎마다 흥에 겨워서/하늘하늘 하늘거리고
하늘에 밝은 삼오야 달이/둥실둥실 둥실 떠오면/설레는 마음 아가씨 마음/울렁울렁 울렁거려요
저 건너서 들리는 저 소리/하모니카 부는 저 소리/삼돌이가 부는 저 소리/신이 나서 부는 저 소리.
삼오야 밝은 둥그런 달이/둥실둥실 둥실 떠오면/설레는 마음 아가씨 마음/울렁울렁 울렁거려요
저 건너서 들려온 저 소리/바둑이가 짖는 저 소리/삼돌이가 얼씬 못하게/망을 보며 짖는 저 소리
삼오야 밝은 둥그런 달이/둥실둥실 둥실 떠오면/설레는 마음 아가씨 마음/울렁울렁 울렁거려요.
아아 아아/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삼오야.
-삼오야(三五夜) 밝은 달, 손석우 작사 작곡, 김상희 노래, 1962년.
▲ 작곡가 손석우와 함께 |
‘얼굴 없는 가수’로 출발한 여대생 가수
여전히 트레이드마크, '여자 학사가수 1호'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가수 김상희. 개인적으로 김상희씨와는 KTV의 공개방송 프로그램 ‘대한늬우스와 함께 하는 리사이틀 인생쇼’를 지난 2012년부터 1년간 함께 진행한 적이 있었다.
원로가수들을 초대, 데뷔 당시부터 현재까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토크쇼 형식의 공개방송 프로그램이었다. TV가 없던 시절의 ‘대한늬우스’ 화면과 함께 그동안 발표한 음반과 사진 자료들을 포함해 대표곡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소중한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대중가요의 산 증인인 원로가수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더 늦기 전에 기록해야 할 소중한 작업이다. 리사이틀쇼는 그 첫 시간을 진행자인 김상희를 시작으로 금사향, 김광남, 김용만, 김하정, 남보원, 남상규, 남진, 명국환, 박건, 박일남, 손인호, 송춘희, 안다성, 안정애, 원희옥, 윤일로, 쟈니브라더스, 조애희, 한명숙 등 총 24편이 제작, 방송되었다. 현재까지도 재방송 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 프로그램으로 아쉽게도 몇 년 전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필자는 최근에 다시 KBS 라디오 ‘세월따라 노래따라’에서 매주 일요일, 원로가수들을 초대, 대담을 나누는 ‘일요 초대석’을 이어갈 수 있어 한편 다행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어릴 때 막내고모, 혹은 막내이모나 큰 누이처럼 여기던 김상희는 자기 관리에 매우 철저한 가수다. 데뷔이후 현재까지 노래와 방송진행을 떠난 적이 없다. 최근에도 ‘괜찮아’를 발표, 무대에서 부를 정도로 수명이 매우 긴 가수다.
김상희는 누구인가. 지난 2006년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의 기사로 대신한다.
또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 뱅 스타일의 ‘김상희식 단발머리’
▲ 작곡가 박춘석과 함께 |
김상희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는 숱 많은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린 헤어스타일, 즉 뱅 스타일이다. 이 '김상희식 단발머리 헤어스타일'을 위해 30여 년 동안이나 머리를 잘라주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을 정도다.
본명 최순강(崔純江). 고려대 법대 61학번. 풍문여고 재학 시절, 1~2위 성적을 다투던 그녀는 특차시험을 통해 대학에 합격한 뒤 서울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모집에 참가, 최고 득점으로 전속가수에 발탁된다.
대학에 갓 입학하는 김상희가 방송활동이나 가수활동을 집과 학교, 양쪽에 모두 숨겨야했던 건 유명한 일화다. 때문에 쓰게 되는 예명이 바로 김상희(金相姬). 가장 흔한 김씨 성에 친구 이름을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들었다. 이 무렵 얼굴 알려질 게 두려워 공개방송 무대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고 녹음방송만으로 가수활동을 해야 했다. 이를테면 ‘얼굴 없는 가수’였던 것이다.
‘반쪽 가수’ 김상희는 데뷔곡 ‘삼오야 밝은 달’을 ‘텍사스 루울라', '나는 능금' 등을 연달아 발표하지만 대부분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만다. '얼굴 없는 가수' 김상희의 반쪽 활동 등이 그 주요 원인인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김상희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어필하며 제법 인기를 얻게 되는 곡이 '처음 데이트(64년)'다. 물론 이 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재학 중이던 고려대학교에서는 이 가수가 본교생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한다. 워낙 철저하리만치 비밀리에 가수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대학 4학년 때 ‘처음 데이트‘가 히트되고 있던 어느 날, 공교롭게도 타고 있던 버스가 굴러 가벼운 부상을 당하는데, 마침 학보사 기자가 함께 타고 있다가 신문에 기사화되면서 내가 ‘가수 김상희’였음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털어놓는다. 당시 상황에서 ‘명문대 여대생이 가수활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하는 점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65년. 그녀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가수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후 70년대 말까지 매년 히트곡을 꾸준히 발표하며 대형가수로 자리한다.
히트곡들을 대략 꼽아보자면, ▲64년-처음 데이트(손석우 곡-이하 괄호 안은 작곡자) ▲65년-울산 큰애기(라화랑), 오늘 같은 날은(손석우) ▲66년-경상도 청년(전오승), 대머리총각(정민섭) ▲67년-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김강섭), 뜨거워서 싫어요(정민섭), 진정 난 몰랐네(김희갑) ▲68년-단벌신사(정민섭), 결혼지각생(김기웅), 빗속의 연가(이철혁) ▲69년-빨간 선인장(김강섭), 당신을 알고부터(남국인), 어떻게 해(신중현) ▲70년-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전우중), 홍콩엘레지(김강섭) ▲71년-참사랑(남국인), 사랑의 가족(김학송) ▲72년-팔벼개(민인설) ▲73년-가고 싶어라(김학송), 기다려(남국인) ▲74년-어쩌나(원희명), 황소 같은 사나이(박춘석) ▲75년-나 이제 외롭지 않네(신대성), 행복할 수 있다면(장욱조) ▲76년-주룩비(신대성) ▲77년-즐거운 아리랑(김강섭).... 등등, 그리고 최근 노래 ‘괜찮아’까지.
말하자면 김상희는 당대의 ‘히트 제조기’라 할 수 있는 실력파 작곡가들과 골고루 손잡고 기복 없이 매년 히트곡을 발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노래들은 비교적 밝다. 그럼에도 위 노래 중 방송 금지된 곡들도 있다. ‘어떻게 해’는 ‘창법 저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딱지가 붙여졌다. 또 한 곡은 ‘단벌신사’. 이 노래는 당시 북 측에서 “지금 남조선에는 '단벌옷에 넥타이 두개로 지낸다’는 노래가 불려질 정도로 인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역선전한 것이 빌미가 되어 우리 측에서 서둘러 이 노래를 방송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기도 했다.
속칭 ‘괄호 밖의 남자’들까지 포용하는 ‘만인의 연인’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빨간 선인장’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과 더불어 김상희는 지극히 보편적인 소시민의 시각을 담은 경쾌한 노래들로 뭇 선남선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녀의 ‘3대 걸작 서민가요’를 보면 60년대 당시 청춘남녀의 이상향과는 자못 거리가 먼 캐릭터조차 따듯하게 감싸 안는다.
텁수룩한 얼굴이 나이보다 7~8세 위로 보이지만 그래도 내겐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경상도 청년‘, 단벌옷에 넥타이 두 개뿐인 서른한 살 노총각으로 주머니가 텅텅 비어 영화구경 한번 제대로 못할지언정 그래도 듬직하다고 추켜세우는 ’단벌신사‘, 행여나 장가간 게 아닐까 궁금할 정도로 나이 들어 뵈지만 그래도 내일 또 만나질까 기다려진다는 ‘대머리 총각’. 이렇듯 그의 노래는 당시 이상향의 주류에서 한참 비껴난, 일종의 ‘괄호 밖의 남자’들에 대한 따듯한 포용이 물씬 배겨 있다. 이 뿐인가.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가 많지만 그래도 순박한 ’울산 큰애기‘가 제일 좋더라 하는 식의 삼돌이의 편지 내용은 또 어떤가.
때문에 나는 유년시절, 개인적으로 가수 김상희가 세상에서 가장 맘 좋고 따듯한, 즉 포용력 있는 누나쯤으로 여겼던 다소 우스꽝스러운 기억도 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은 당대 최고의 PD와 한다는 소식에 저으기 실망(?)감을 넘어 배반감마저 느꼈던 개인적인 그 기억이라니...^^
어쨌든 ‘괄호 밖의 남자’까지 포용했던 자신만만한 그녀의 메시지는 ‘만인의 연인’이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범국민적인 지지로 그녀는 68년 ‘연예인 납세실적 1위’라는 전성기를 누린다.
▲ 일본에서 독집음반 취입하던 시절의 김상희.1970년 |
가수 김상희에 대해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70년을 전후해 여러 장르의 노래들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타이틀 롤인 2대(代) ’애랑’역을 맡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는 예그린악단에 의해 1966년 10월26일에 초연되었는데 바로 이날을 기념해 우리나라 ‘뮤지컬의 날’로 정해졌을 정도다. 주인공 ‘애랑’역은 당시 최고 스타의 몫. 말하자면 춤과 노래, 연기라는 삼박자를 갖춘 스타만이 맡을 수 있었던 배역으로 초대 애랑 역은 패티김이, 그리고 2대가 김상희였다. 이어 3대는 김하정, 4대 펄시스터즈의 배인숙 등으로 애랑 역의 계보는 이어진다.
또한 ‘성불사의 밤’, ‘그대에게 내 말 전해주’ 등을 담은 가곡음반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또한 작곡가 신중현과 손잡고 ‘어떻게 해’를 비롯해, ‘나만이 걸었네’, ‘파도소리’ 등을 담은 사이키델릭 록 음반을 취입하는 등 여러 장르의 노래들을 시도,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쳐보였다는 점이다.
이즈음 그녀는 또한 월드스타로 도약한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각각 음반을 발표하게 된 것. 70년, 일본에서 'EXPO 70'이 열릴 때 그녀는 우리 문화의 기수로 가수 패티김과 함께 파견, 동경에서 한 달간 '아리랑 페스티벌'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일본 측으로부터 음반 취입을 제의 받는다. 이 여세로 세계적인 트럼펫 주자인 히노데루 마사와의 합동 리사이틀을 갖기도 했고 홍콩, 태국 등 해외공연과 더불어 미국 MGM과도 계약,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한국 대형가수의 세계무대로의 진출은, 오히려 국내에서 ‘한국가수의 월드스타 출현’이라는 기대와 맞물려 국내에서도 팝송만을 불러 취입, 수출용 음반을 출시하기도 했다. ‘즐거운 아리랑’으로 1977년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상희씨는 현재까지도 가수활동과 더불어 방송 진행자로도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녀 스스로도 가수 활동 보다 ‘방송국 월급쟁이’로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할 정도. 어느덧 그녀는 ‘방송 진행은 옷 입는 것같이, 노래는 밥 먹는 것같이’한다고 토로한다. 50 여년을 가까이 하다 보니 그만큼 자연스러워졌다는 얘기다.
그녀가 방송 진행자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7년 KBS TV ‘당신의 멜로디’라는 쇼 프로그램. 당시로서는 여성 진행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담당 PD가 방송이 잘 안되면 사표를 쓰겠다며 방송국 간부들을 설득했다. 그 담당 PD가 바로 지금 그녀의 남편인 유훈근씨다.
유PD와는 이듬해인 1968년에 결혼했다. 4선 의원을 지낸 그녀의 시아버지 유청(柳靑)씨는 광복 후 한민당 전라도당 위원장을 지낸 유직양씨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인기 가수와 종갓집 7대손 장남이 결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남편 유훈근은 KBS PD로 일하다가 MBC에서 뉴스 앵커를 지냈다. 1979년 MBC 보도부 차장으로 근무할 때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다. 10·26 이후 DJ가 사면복권 되면서 공보비서로 들어가게 된 것. 이 여파일까, 김상희씨는 5공화국 들어서면서 무대에 설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화여대 옆에서 반 평짜리 공간을 얻어 샌드위치 장사를 하기도 했다.
김상희씨는 연예인봉사단체 '한마음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벌써 40여 년째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노인 복지시설을 열댓 번쯤은 찾았다고 한다. 주로 남들이 잘 찾지 않는 무허가 시설 같은 데를 주로 가기 때문에 보통 방이 비좁아 악기도 겨우 전자오르간 하나만으로 노래를 해야 할 경우도 다반사, 그래도 돌아올 때는 다들 눈물을 흘리곤 한다. 가수 겸 방송인 김상희씨는 2004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당시 조선극장을 운영하는 상당한 재력가의 딸로, 그리고 4선 의원을 지낸 종갓집 7대손의 맏며느리로 결코 쉽지 않은 가수활동과 방송활동을 병행하면서도 늘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 김상희씨, 현재 두 손자를 둔 할머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괜찮아’를 부르며 삶에 지친 이들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만인의 연인’이자 ‘서민들의 변함없는 친구’다.
[출처] 여자학사가수 1호, 김상희 (한국 가요사) |작성자 샤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