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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부] 발칸 3국 여행기-슬로베니아 포스토이나 동굴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전편들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크로아티아는 이탈리아 반도와 아드리아해를 끼고 마주보고 있으면서 1,778km의 긴 아드리아 해안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도서가 많은데, 1,246개 섬의 해안선까지 합칠 경우, 총 6176km의 해안을 보유한 해양 국가이다. 특히 유럽인에게는 여름 휴가지로 최고명소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으며 해마다 1,000만여명의 해외 관광객이 방문한다.
그리고 항상 이 나라가 의문인 것은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1밖에 되지 않는 나라가 축구가 엄청 강하여 월드컵이나, 유로 컵 등에서 항상 상위권에 드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예컨대 중국과 비교해보면 인구가 많다고 축구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축구 현실을 볼 때 항상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대게 프로축구엔 관심이 별로 없고, 매일 프로야구에 빠져 살더라도 월드컵축구경기가 시작이 되면 예선의 경기부터 본선까지 온 신경을 곤드 세우는 것은 왜일까?
어느 스포츠 전문가들의 설에 따르면 축구가 인류기원과 더불어 가장 남자다운 스포츠라고 한다. 전쟁과 같은 시스템이라서 남자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끄는 이유라고 한다.
지금 전편에서 소개한 것을 왜 다시금 뒤돌아보는 것은
오늘 크로아티아의 리예카를 떠나 슬로베니아의 포스토이나 동굴로 떠나기에 다시 한번 크로아티아를 상기 하는데,
객관적이기보다는 내 맘에 들지 않았던 기억들,
다시 말해서 전쟁, 인종학살, 종교탄압, 고문, 강간, 굶주림 등을 1차세계대전부터 유고내전에 이르기 까지 상당히 관여했던 나라라는 개념이 있었던 기억이 강하기에 좋은 것을 보아도 좋게 보일 리가 없었고,
단지 그 풍광이 아름답기에 해외여행자가 많고, 세계의 부호들의 별장들이 돈 자랑을 지나 호화로움의 극치가 다다른 곳 이라는 삐닥한 시선을 이제 교정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제의 압제당시 독립 운동가들은 물론, 지식인들을 상당히 지독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처형한 사실이 있다.
당시 이런 일들이 일본인들에 의해서 집행되었다지만, 일본인 수하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도 같은 민족임을 망각한 채,
일명“앞잡이”라는 별명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본인들보다 앞장서서 더욱더 잔학하게 동족을 사지의 구렁텅이로 물아 붙였던 일들을 우리는 보아왔다.
그리고 일제에 협조하고 급료를 받고 일왕 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관료를 지낸 사람들,
예전의 일본 앞잡이에서 다시 충실한 건국의 디딤돌로 거죽을 바꿔 쓴 그들에 의해 이 나라가 운영되는 처참한 현실도 있었다.
내가 몇 년 전에 졸필로 기고하였던 터키여행기나, 더 앞서 소개한 동유럽 여행기에서 소개한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건국에 앞서 일제 “앞잡이”들의 속아냄이 있어야 되는 것이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경영할 인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동참이 요구된 것에 울분을 금치 못하는 것은 나 만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볼 때 크로아티아에도 독립운동가도, 지식인들도, 양심있는 행동가들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항상 자기 목숨하나 구명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변을 가진 “앞잡이”들도 있었으리라.
양차 세계대전(1,2차)을 거치고 유고해체의 내분을 격으면서 자기네 민족의 앞날과 국가의 영속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했던 그들도 우리와 같았으리라.
크로아티아는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를 가진 나라이기에 더 이상의 언급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인류에게 저지른 큰 죄악에 대해 속 깊이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올 곳게 반성하고 피해를 입은 주변국에게 진심어린 사과는 물론, 피해자들의 안녕에 기여하면서 번창하길 바랄뿐이다.
비열한 일본이 아닌 독일과 같이 솔직하고 정의롭게 말이다.
어제저녁 바닷가 호텔에 접한 풍광이 아름다워 목사님의 세레나데를 들었던 배란다가 새벽의 여명에 푸르르다.
아침의 호텔조식은 따끈따끈한 삶은 달걀과 잘구워진 빵, 구수한 향을 풍기는 커피, 베이컨과 소시지가 일품이다.
오늘도 여느날이나 다름없이 여독의 나른한 몸을 뜨거운 샤워로 어루만지고 아침을 맞는다.
여행자의 행장은 초라할수록 행장이 가볍고, 반대로 산뜻하고 화려할수록 그 무게가 극에 달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해외 여행가는 것이 보편화 되다보니, 어느 신문의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국내여행보다 편하고 저렴하다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우리나라 패키지여행, 그러니까 피켓을 따라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여행하는 여행자의 행장은 동남아의 휴양지나 유럽의 유명 관광지라 할지라도 늘 같다 라고 보면 된다.
항상 알록달록한 아웃도어복의 행열이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의 가이드들은 동양인들 중에 한국인을 대번 알아본다고 한다.
그 행색이 특이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늘 아웃도어복을 상용하기에 어디에서나 눈이 들어오기 때문이란다.
동네 뒷산을 가더라도, 걸맞지 않는 에레베스트 등반용 이웃도어복을 입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럽의 정중앙 로마의 베드로성당에서도 아랑곳 하지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다. 이렇다보니 현지 이탈리아 가이드 왈“ 베드로성당에는 빙벽이 없습니다. 혹 담장(성벽)을 기어올라 타고 가시려나요?” 이라 빈정거리며 묻는다고 한다.
예식장에 상복입고 가는 꼴이다.
물론 어느 사람은 내가 편하면 제일이라고 하는데,
전통과 명예, 예절을 중시하는 유럽에서는 그에 걸맞는 옷차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옷차림을 매우 흥미로운 눈초리로 보지만 그 눈 뒤에는 격멸하는 눈이 도사림을 알아야 한다.
거추장스럽지만 검정색 아웃도어 바지와 형광색의 고어텍스를 벗어 던지자.
그렇다고 흰 드레스셔츠에 양복을 입고 가란 얘기가 아니다.
계절에 맞는 케주얼(casuals)스타일 이라도 저거리와 면팬츠(면바지)에 운동화나 등산화가 아닌 갈색 가죽구두와 같이 입어보도록 진정으로 권유하고 싶다.
어느 사람에게 케주얼 스타일로 나오라고 했더니 츄리닝 운동복을 입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물론 케주얼(casuals)이란 평상복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운동할 때 입는 운동복은 정말 아니다.
다만 옷이 없어서 그런다고 하면야 어쩔수 없지만 말이다.
정말 친한 친구 만날 때 입는 옷,
그러니까 김치 국물이 얼룩진
다소 된장찌개의 내음이 가시지 않은 옷인들 어떠하랴.
단추가 하나 없는 셔츠면 어떻소.
다 혜저서 무릅팍 구멍난, 옆줄이 털어진 추리닝이면 어떻소.
친한 친구 만날 때는 그다지
거죽에 걸치는 옷이 중요하진 않다.
그렇지만 해외 여행할 때 우리는 우리나라의 간판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과 같다.
말과 행동에서부터 몸가짐, 옷 매무세 등 다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내실이 얼마나 있느냐가 더 중요 하겠지만,
그들이 나를 처음 보는 내 행색이 무엇을 판단할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예절에 대해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언행과 몸가짐, 옷 매무새에 대해 수시교육을 받는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
이유에서는 첫째가 우리민족도 예의라면 지고 못사는 동방예의지국의 백성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백의민족이라는 수식어가 늘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항상 우리민족 앞에 고유명사처럼 따라 붙었던 수식어의 백의민족이 언제부터 형광색 고어텍스를 즐겨 입었는가?
어느 녀석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후 부터?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점정교복에 찌들은 베이비부머 세대부터라고 나는 단정한다.
그들은 검정색교복을 벗고 난 이후 선풍적으로 히트 친 히피풍의 청바지를 선호했으나 금전적인 이유로 다시금 검정물감의 미군복을 몸에 맞게 수선하여 검정색으로 다시금 갈아입어야만 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어 수입이 안정화 되자 “바캉스- 레저- 캠핑- 웰빙” 이라는 콧바람을 쏘이기 시작하면서 의류업체들의 마케팅전략에 힘입어 “빨주노초파남보”의 형광색으로 갈아입기 시작하였고,
또한 허세에 힘입어 외국 유명세를 탄 아웃도어 상표 아니면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고,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나라에서도 일반인에게 잘 팔리지도 않고 단지 등산 전문인용 기능성 옷을 그들의 판매가에 거의 두배나 세배의 가격에 중국에서 싸구려 OEM방식으로 생산된 옷을 수입해서
우리에게 봉(손주말로는 -"호갱")을 잡는다고 하니 웃길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나도 사놓은 고어텍스를 뒷산 갈 때 입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지만 말이다.
이제 이런 옷은 뒷 산 가실 때 입으시고,
해외 나들이 가실 때는 간편하고 품위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가봅시다.
그렇다고 명품으로 휘두르란 얘기는 더욱더 아님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아침식사를 마친 구수한 커피향의 레스토랑을 나와 호텔을 나선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도심은 한산하다.
어제의 흐린 날씨가 개었다 흐렸다를 반복한다.
리예카 항구의 도심을 지나면서 보면 언덕위에 있는 집들이나 배를 만드는 선창의 모습이 꼭 우리나라의 인천이나, 부산을 연상케 한다.
항구에 정박한 무수한 컨테이너선과 멀리 외항에 떠있는 무수한 화물선들이 낮설지 않다.
이곳 리예카는 아드리아 해에 딸린 크바르네르 만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어제 기슭을 넘어온 알프스 산맥과 아드리아 해 사이의 좁은 평지에 걸처 있으며, 어제 도심으로 내려온 산 기슭에도 시가지는 이어져 있다.
이 항구는 아드리아 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어 여러 나라의 관심을 끌었고 하는데,
예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하게 된 뒤부터 이 곳에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 곳의 지배를 두고 이탈리아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 간에 영유권 분쟁이 일어난 후,
1920년 양국간에 “라팔로” 조약으로 피우메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일부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떼어주고 사실상 독립국으로 두기로 합의 하였는데,
1924년 이탈리아가 다시 점령하여 피우메 자유국은 완전하게 없어지고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가 나누어 영토화 하였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 끝난 후 완전히 유고슬라비아의 영토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항구의 시설이 확충되면서 유고연방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 성장하였고, 각종 공업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크로아티아 최대의 무역항이며 오늘날에도 예전처럼 이탈리아에서는 피우메라 부른다고 하는데, 이 오랜 지명들은 “피우메”나 “리예카” 모두 '강'(江)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몇 년 전에 한 국내경제신문에 우리나라에서 이 항구의 현대화 계획에 참여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모르겠다.
리예카를 떠난지 한 시간여 만에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로 들어간다.
다른곳에 비해 입국심사가 시간이 걸린다.
버스를 정차시키고 전원이 입국심사대에서 입국심사를 받은후 도보로 긴거리를 걸어야 했는데, 비가 오는 것을 맞고 가야 했다.
내가 입국심사대를 마지막으로 통과 하여 기다리는 버스에 올랐다.
비오는 한산한 시골 거리를 한참지난 후 포스토이나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다행인 것은 내리던 비가 멈추고 비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오늘의 일정은 이곳 슬로베니아 노트란스카 지방에 위치한 포스토이나 동굴(Postojna Cave. 슬로베니아어로 포스토이나 야마. Postojnska jama)에서 시작된다.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앞선 관광객이 많아 한 시간여를 동굴입구에 위치한 상점에서 쇼핑을 했는데, 크게 사고 싶은 것은 없었으나,
향초를 놓을 수 있는 유리가공품으로 된 촛대를 가족들에게 선물용으로 마련했다.
세계적으로 유영한 관광지라 그런지 동굴입구 앞에는 레스토랑, 보석가게 등 호사스러운 상점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아래쪽에 기념품판매소와 커피와 간단음료 및 간식을 할 수 있는 카페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동굴의 크기는 어마어마해서 혼자서는 돌아다닐 수가 없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출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동굴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동굴이라고 하는데, 그 첫번째는 미국의 켄터키주에 있는 메머드 동굴로서 길이가 579Km이라고 하며, 포스토이나 동굴은 20.57Km 길이로 미국의 것보다는 비교할 것 없이 훨씬 짧지만 카르스트 동굴로 수백만년에 걸친 석회암의 용식으로 생긴 희귀한 종유석과 석순이 장관을 이뤄 그 경관에서는 세계에서 단연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 1986년인가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동굴은 1819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공개되기 한해전인 1818년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 동굴을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황제가 방문을 하게 되면 동굴 내에 보안검사라든가 동굴의 안전성을 검사하게 되는데, 그 검사과정에서 동굴 벽 30m 위쪽에서 호화롭고 아름다운 동굴이 추가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루카 체치(Luka Čeč)라고 하는데, 1819년에 이 동굴이 대중에게 공개될 때, 체치는 이 동굴 최초의 동굴 관광 안내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동굴 내에 안전 통로가 개설되고 동굴 출입자가 약 1,000명으로 늘어나면서 관람료를 징수하게 되고 동굴 퇴적물의 보호 등 범 정부차원의 관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872년에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이곳까지 철도 노선이 가설되고, 동굴로 가는 특별관광열차가 정시적으로 운행됨으로써 동굴 출입자는 크게 늘어 1870년에는 8,000명으로 증가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884년에 전기를 끌여 들여, 1945년 전기로 기관차를 운행하였으며, 1967년에 철도를 복선화하였다고 한다. 슬로베니아에 지하철이 없다보니 이곳에 지하철이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지하철이라고 한다.
유럽 중심부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는 카르스트 지형학의 발상지로서 이곳에서는 무려 10,000여개의 지하 동굴이 발견됐고 현재 20개의 동굴이 관람용 동굴로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동굴의 일부에서는 눈이 없고 색깔도 없는, 뱀처럼 생긴 양서류의 일종인 동굴영원(Proteus anguinus)이 서식한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종류의 동물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여기 동굴에 관람을 위해 와서 동굴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서야 알았는데, 아! 이런 미개하게생긴 희귀한 것도 다 있네 라고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이 동물은 몸길이가 30㎝까지 자라고, 달팽이와 벌레를 먹고 산다고하며, 허파와 아가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동굴의 관람이 끝날 쯤 어항같이 생긴 웅덩이에 이 동물이 서식하는 곳이 있다.
보통 바위틈 속 깊이 숨어 있어서 볼 수 가 없다고 하는데, 행운이 따랐는지 밖으로 나온 것을 볼 수 가 있었다.
이 동굴의 처음은 열차를 타고 15분쯤 들어가 본격적인 동굴탐방에 나서게 되는데, 머리를 들으면 바위에 부디치게 되어 있어 상당히 위험하고 손을 옆으로 뻗어도 손상될 만큼 위험하다.
그래서 열차가 달리면서 휘는 곡선주로를 달릴 때나 덜컹거릴 때 비명음이 절로 나온다.
그런 곡예열차를 타고 광장입구에 내린 사람들은 이동굴이 가진 어마어마한 광경에 그저 감탄할뿐이고,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맨처음에는 그 경관에 정신이 멍할 지경이었으나 그 경관이 하도 많아 나중에 시간이 흘러 갈수록 덤덤해지기 시작해진다.
기묘형형의 종유석들과 자연이 빚어 놓은 경탄할만한 조각품들은 동굴속을 빼곡이 채워져 있다.
또한 동굴 내부에는 Concert Hall로 불리는 넓은 광장이 있는데 천정의 높이 35m, 넓이 50m, 길이 120m의 거대한 공연장같은 홀로 1만 명이 동시에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연료 저장소로 이용되던 한 동굴은 파르티잔(유격대)들의 기습을 받아 폭파되었으며, 지금도 연기에 검게 그을은 흔적들이 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동굴의 한 광장에는 기념품 판매소가 있었는데 기념품가게 내부에 걸린 사진들을 보니 181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시절 요제프 황제가 다녀간 기념사진들과 유고연방시절 통치자였던 티토의 방문 모습도 있어 묘한 시대적 감정을 느낀다.
열차를 타고 동굴을 빠져나온다.
동굴의 어둠에 익숙한 눈이 밖으로 나오니 시리다.
동굴의 입구와 출구가 따로 떨어져 있어 타고 들어온 열차와 나올때의 열차가 좀 틀린다.
들어올 때 이용한 열차는 비좁은 반면 나올때의 열차는 새것이라는 느낌과 좀 넓다는 느낌이다.
동굴의 입장료는 다소 비싼편으로 22.9유로이니 3만원이 훌쩍넘는다.
동굴입구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긴다.
빵과 셀러드 맥주 한잔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음여정의 블레이드성과 호수로 갈 길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