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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after life after death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
CH: What is the biblical hope? Why is bodily resurrection crucial to that hope?
질문: 성경이 보여주는 희망은 무엇입니까? 몸의 부활이 그 희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NTW: The biblical hope is for “new heavens and new earth,” that is, for the utter renewal and reordering of the Creator’s project—begun in Genesis 1 and 2 but aborted, or at least radically distorted, because of human rebellion.
톰 라이트의 대답: 성경이 보여주는 희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바로잡으시는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중단되었거나 적어도 근본적으로 왜곡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인간의 반역 때문이었습니다.
The Resurrection of Jesus is the launching of this new creation. His body seems to be at home in either heaven or earth or both, so that he embodies and encapsulates this new creation in himself.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몸은 하늘이나 땅 또는 그 둘 다를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이 새로운 창조를 구체화하시고 특징적으로 보여주십니다.
Those who belong to Jesus are thus signed on as new-creation people, not just as parts of new creation but (since this is what humans were made for) as agents of new creation.
그러므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새로운 창조 사역에 동참할 것을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창조 세계의 일부가 될 뿐 아니라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 사역을 실행하는 대리인입니다.
At the moment this is partial and puzzling; Jesus is raised, the rest of us are not. He conquered death; but death still takes us.
현 시점에서 이 일(새 창조의 사역)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우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지만 죽음은 여전히 우리를 포박하고 있습니다.
But because of the resurrection and the Holy Spirit, what we do “in Christ” in the present is in fact part of, and preparing for, the new creation, whether or not it looks like that.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시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일은 사실 새로운 창조 사역의 일부가 되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 지라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In the new creation, decay and death will have been abolished, but it’s clear from Romans 8 that this will be the same world, only rid of its corruption and decay, just as Jesus’ risen body was the same, only different because now it is incapable of disease, suffering, or death itself.
새롭게 지음을 받을 세상에서는 썩어짐과 죽음은 철폐될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8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이것은 동일한 피조물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즉, 타락과 썩어짐이 제거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살아나셨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이유는 지금 피조물은 질병과 고난, 또는 죽음 그 자체를 이길 수 없다는 점입니다.
CH: What should Christian views of the future look like?
질문: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면 미래는 어떤 모습입니까?
NTW: Like the Resurrection of Jesus, transposed to all of creation; like the coming together of heaven and earth in a way we only glimpse momentarily at present in great beauty, in great works of putting-right (justice), and above all in prayer, sacrament, Scripture, and ministering to the poor.
톰 라이트의 대답: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모든 피조물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 우리는 단지 일시적으로 그것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엄청나게 아름다운 것을 볼 때나, 또는 정의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을 볼 때,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도를 드리거나 성례를 행할 때, 또는 성경을 읽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조금 맛볼 수 있습니다.
The reality will be that coming-together that we sense in music, sometimes, or in human love. It will be like all that, only much, much more. It will be both our ultimate homecoming and our ultimate arrival somewhere totally new—since we’ve never before encountered anything totally incorruptible and without-decay.
아마 실재의 모습은 우리가 음악이나 때로는 인간을 사랑하는 가운데 느끼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모습이 있겠지요. 그 모습은 우리가 최후에 이 세상으로다시 돌아오는 날에 완전히 새롭게 된 세상에 다다를 때에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완벽하게 깨끗하고 부패하지 않은 세상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CH: What does this mean for how we think about salvation and the kingdom of God?
질문: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구원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NTW: For many people “salvation” means “being rescued from the world.” In the Bible the world is God’s world, and we are supposed to be looking after it and making it fruitful, so there isn’t much point in being rescued from it.
톰 라이트의 대답: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세상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돌보고 번성하게 하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Rather, we are saved FOR the world—rescued to be rescuers, put right (justification) to be putting-right people (justice); restored to the beauty of being image-bearers so that we may be beauty-bringers, beauty-creators, for the world.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자가 되라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모든 것을 바로잡는(정의) 백성이 되라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칭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그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We are, in other words, to be saved ultimately, in the future, from corruption, decay, and death; from being “out of line,” unjust; from ugliness. So, the new “you” will be the “you” that God had in mind all along.
달리 말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구원을 받을까요? 우리는 타락과 썩어짐과 죽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정도에서 벗어난 데서’ 구원을 받았으며, 불의와 추함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로서 ‘당신’은 하나님이 언제나 마음에 기대하셨던 바로 ‘그 사람’이 될 것입니다.
Gnosticism at this point whispers, “Yes, the real ‘you’ is deep inside somewhere—so just get in touch with it and let it express itself.”
이쯤에서 영지주의는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그래요, 진정한 ‘당신’은 당신의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끌어내어 마음껏 표출하세요.’
But the answer is, “No, the real ‘you’ is God’s fresh gift in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the Messiah.” At present we suffer with him so that we may be glorified with him.
그러나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시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 안에 선물로 주신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 안에서 고난을 겪지만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God’s kingdom means God’s sovereign, saving rule. Jesus taught us to pray that it would come “on earth as in heaven.”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구원하시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보면, 그 나라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Salvation happens when this prayer is answered, whether partially and in anticipation (as in all the people whose healing Jesus himself described as “salvation”) or fully at the end (Rom. 8, Rev. 21–22.)
구원은 이 기도가 응답되는 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구원은 부분적이면서 미래지향적입니다(예수께서 치료하신 후에 ‘구원받았다’고 선언하신 사람들처럼) 그리고 결국에는 그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로마서 8장, 계시록 21~22장).
The church exists to serve the kingdom-purposes of God; it’s a cliché to say we are “saved to serve,” but it’s true.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뜻에 헌신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자면, 진부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섬기기 위하여 구원을 받았’(saved to serve)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Jesus’ Resurrection launched the new creation. The Easter stories in the Gospels do not say, “He’s risen; therefore we’re going to heaven.”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절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갈 것입니다.’
They say, “He’s risen; therefore God’s new creation has begun (under his lordship); therefore we have a job to do!” That’s why the disciples are then given the Spirit.
복음서가 들여주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주님의 통치 가운데);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CH: What are some practical implications of this?
질문: 이런 메시지는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NTW: People sometimes say to me, “I’m overwhelmed - I see all the things that need doing in God’s world, and I don’t know where to start!” That’s a good reaction.
톰 라이트의 대답: 사람들은 가끔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좋은 반응입니다.
The answer is: (A) Prayer. Prayer itself models, exemplifies, and lives within the new creation, the coming together of heaven and earth—that’s why it’s hard work and why we are easily distracted.
대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기도하십시오. 기도 그 자체가 새로운 창조 세계에서 모델이 되고 본보기가 되며 삶의 방식이 됩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 이유로 기도는 힘든 일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쉽게 놓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B) Scripture. In the great story, Scripture tells of creation and new creation—the latter effected through covenant and new covenant—we are shaped for our tasks, attuned to the voice of God and, simultaneously, to the cries of pain in the world (think of the Psalms!)
(2)성경을 읽으십시오. 위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은 창조와 새 창조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특히 새 창조는 언약과 새 언약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라고 지으심을 받았으며, 우리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고통으로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시편을 생각해보십시오).
(C) Sacrament, especially the Lord’s Supper. Mother Teresa spoke of meeting Jesus in the sacrament and then meeting him on the street.
(3)성례에 참여하십시오. 특히 성찬에 참여하십시오. 마더 테레사가 말하기를, 성찬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거리에서 그분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D) Service, in whatever way we’re called. Here being part of the body of Christ is vital: each local worshiping community will gain a sense, in its own locality, of where the pressure points are, what needs doing (food banks? drug rehab? youth employment? hospice care?).
(4)봉사에 참여하십시오. 그 어떤 방식이든지 좋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역에 있는 예배 공동체는 저마다 자기 지역에서 고통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푸드뱅크나 약물 재활, 또는 청년 고용, 호스피스 돌봄 등).
We regularly find our vocations, part-time ones as well as full-time ones, by sharing with others who are committed to God’s kingdom. From Genesis 1 to Revelation 21, God’s purposes are temple-shaped.
우리는 자주 우리의 소명을 발견합니다. 그 소명에 우리는 시간을 내어 헌신하기도 하고 전적으로 헌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소명을 발견하려면 하나님 나라에 헌신된 분들과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1장까지를 훑어보면, 하나님의 목적은 성전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The temple is where heaven and earth came together. That is why the first Christians saw Jesus himself as the true temple and why Paul sees the church itself as the temple, the place where the Spirit dwells.
성전은 하늘과 땅이 하나되는 곳입니다. 그런 이유로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자신을 진정한 성전으로 여겼으며, 동일한 이유로 바울은 교회를 성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곳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So images of the temple being destroyed and rebuilt come into play in terms of new creation. And at the moment, our life of prayer and worship is the genuine, Spirit-filled anticipation of that great day. CH
그러므로 성전이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지게 되는 그림을 표현하는 용어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기도 생활과 예배생활은 그 위대한 날을 바라보는 진정하고 성령충만한 맛보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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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출처
https://christianhistoryinstitute.org/magazine/article/life-after-life-after-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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