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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62:1)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찰나刹那라도 잊지 못하십니다. 결코 포기하지 못하십니다. 그들의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결코 쉬지 못하십니다.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 부으십니다. 일하고 또 일하십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로운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다.”(사62:1b)라는 증거대로, 새 이름을 주십니다.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새 하늘입니다. 새 땅입니다. 시온입니다. 새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또 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라.”(사62:4a),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라는 증거에 따르면, “사랑하는 님חפצי־בה(헤프치 바흐)”입니다. “(기뻐하는) 아내בעולה(베울라)”입니다.
거룩한 신부입니다. 그들은 원래 “버림받은 자עזובה(아주바)”에 불과했었습니다. “버려진 황무지שׁממה(쉐마마)”에 불과했었습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이름으로 불려 지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존재 자체가 완벽하게 바뀌리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아니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다릅니다. 창세전부터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무조건 주고만 싶으셨던 진짜 이름이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찰나조차도 식지 않고 오히려 거침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뜨거운 마음으로 불러보고 또 불러보고만 싶으셨던 진짜 이름이었습니다.
당신의 호적에 올려놓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고 교제하며 외치고만 싶으셨던 진짜 이름이었습니다. 또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사62:3)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존귀하게 하십니다.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을 누리게 하십니다. 당신의 거룩한 영광에 참여케 하십니다. 이상이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작정입니다. 완성하기 위해서 결코 쉴 수 없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을 만큼 위대하고,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당신 백성을 위하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하시는 것은 그분의 존재 안에 어떤 결핍이나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당신과의 교제에 깊이 참여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이 저와 여러분 안에, 저와 여러분이 당신 안에 충만하게 거하기 원하십니다. 곧 떼려야 뗄 수 없는 완벽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자신의 바람과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은 하나입니까?
보라! 내가
본문은 “보라! 내가”(사65:17a)라고 시작됩니다. 사실 성민 이스라엘은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골목만큼 많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뼈가 마르고, 눈이 쇠하고,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피를 쏟듯 외치는 경고를 외면했습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군사들이 죽었습니다. 임신한 아녀자들은 배가 갈린 채 죽었습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벽에 패대기쳐진 상태에서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거리를 나뒹굴었습니다. 주검이 마치 산처럼 쌓였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진한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해지고 온 세상이 그 폐허를 보고 놀랄 것이다.”(렘25:11a)라고 외쳤던 선지자의 예언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나라를 잃었습니다. 대부분의 인재들은 이방인의 땅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노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긋지긋한 포로생활을 끝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려했던 예루살렘의 영화를 생각하면 통곡부터 올라왔습니다. 회개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회복을 위해서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바람은 요원해 보였습니다.
기약 없이 세월만 흘렀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서 문을 열어놓고 기도하던 백성들은 하나 둘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간절했던 바람마저도 희미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이다.”(렘25:11b)라는 선지자의 예언 역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거의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지친 백성들은 바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70년의 포로생활이 끝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고 나의 선한 약속을 이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렘29:10)라는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온 천하를 호령하고 있던 군왕도 도무지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고레스로 하여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고 또 유다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나에게 지시하셨다. 그러므로 너희 중 그의 백성들은 누구든지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여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스1:2b-3)라는 조서를, 전국에 공포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포로들을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셨을 때 꼭 꿈만 같았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뻐서 웃고 즐거운 노래를 불렀으며 다른 나라들은 우리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큰일을 행하셨다.’라고 말하였다. 정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시126:1-3)라는 시인의 고백대로,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찬양이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그렇다고 화답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을 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었던 밭은 거칠 대로 거칠었습니다. 불에 탄 성문을 수리하고 무너진 성벽과 도성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피땀을 흘려야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의 시선은 따가웠습니다. 끊임없이 도발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던 동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기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도성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던 최고의 지도자를 암살하려는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거기다 제국이 부과한 세금은 가혹할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부풀었던 그들의 꿈은 산산 조각나는 듯했습니다. 희망은 달았지만, 현실은 쓰디썼습니다. 급기야 돌아온 공동체 내부에서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갈등과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좋았습니다.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막대한 책임과 의무가 따라옵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은혜를 까먹습니다. 하늘을 놓치고 맙니다. 새로운 희망을 품고 시작한 오늘이라고 해서 다를 수 없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희망을 외치기에는 사명의 무게가 너무나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마저 따라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삶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입니다. 잿빛입니다. 어디서도 빛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보라! 내가”라고 외치셨습니다.
창조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온 우주는 물론 각 나라와 민족과 개개인의 삶까지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제시하셨습니다. 당신을 보라고 외치셨습니다. 당신이 하시겠다고 외치셨습니다. 시간의 갱신, 마음의 갱신, 자세의 갱신, 믿음의 갱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사65:17b-18a)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이 사분오열 무너져 가고 있던 믿음의 공동체를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더 이상 고통과 슬픔 따위를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완전한 공동체를 창조해 주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은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가 전심전력으로 나를 따랐으므로 나는 그가 밟은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신1:36)라는 말씀에 따르면, 갈렙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약속의 땅을 믿음으로 밟았습니다. 동족의 절대 다수가 통곡하며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절규하는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취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따랐습니다.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내가 만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존속할 것이 분명한 것처럼 너희 후손과 너희 이름도 분명히 존속할 것이다.”(사66:22),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의만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벧후3:13)라는 말씀에 따르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메시아 공동체입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입니다. 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누릴 수만 있다면 현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아픔과 슬픔과 절망 정도는 얼마든지 참고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임도 불구하고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사65:18b-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라는 외침이 반복됩니다.
시간과 마음과 자세와 믿음의 갱신에 대한 요구가 반복됩니다. 의미상, 이어지는 내용 역시 반복입니다. 당신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반드시 창조하시겠다는 의지의 천명입니다. 새롭게 창조될 공동체에서는 죄의 삯인 죽음의 지배가 없습니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사65:21-22)라는 하나님의 선포에 따르면, 완벽한 공평을 누리게 됩니다.
과실의 재배와 가옥의 건축은 노동과 가옥이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더 실감나게 하려는 의도에서 우러나온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장수하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나무 역시, 영원한 삶을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우러나온 표현입니다. 또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사65:23)라고 이어지는 선포에 따르면,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출산 과정에서 죽거나, 출산 이후 짧은 생을 마친 아이들이 많았던 당시의 아픈 시대 상황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창조될 공동체에서는 더 이상 그런 종류의 아픔이나 고난은 없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65:24-25a)라는 선포에 따르면, 새롭게 창조된 공동체에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영적 교제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소원을 아시고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어주십니다. 모든 피조 세계가 완벽하게 회복됩니다.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함께 생명을 만끽합니다. 아담의 범죄와 함께 조성되었던 적대감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과 승리를 통해서 완전히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립니다. 풍성합니다. 윤택합니다. 기름집니다. 오직 단 하나의 존재 곧 사탄만 저주 받은 채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포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65:25b)라고 마무리됩니다.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보라...여호와의 말이다
사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일상은 없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내야 할 일상이 너무 버거워 눈물이 흐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상황 속에 당신 자신을 끌어드리셨습니다. 당신이 반드시 성취하실 일에 대해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창세전 작정입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입니다. 완성된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위로입니다. 격려입니다. 시인은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시27:1-3)라고 외쳤습니다. 얼마나 강한지 어떤 어두움도 짓누를 수 없는 확신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해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어두움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두움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던 달은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하루는 해를 데리고 깊은 어두움이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있던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어두움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깊은 어두움은 해가 굴에 들어서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도가 큰 확신 속에서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어두움이 빛을 이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요1:5)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그都鐘煥는 담쟁이라는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선물로 주신 참된 믿음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습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지도 않습니다. 무심결에 불신앙의 고백을 늘어놓지도 않습니다. 포기는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민14:9)라고 선포합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깊은 어둠이라 할지라도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빛은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를 창조합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누리게 합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을 누리게 합니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참고,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입니다. 또 아무리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b)라는 주님의 약속만큼은 잊지 마십시오.
“세상 끝 날”이 언제일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나 계시고, 도전해 오는 폭풍 속에도 계시고, 그것에 용감하게 맞설 수 있도록 해 주는 힘 속에도 계시고, 승리할 때도 당연히 함께 계시고, 패배로 괴로워할 때는 더 당연하게 찾아오셔서 꼭 안아 주시고, 세상에 올 때도 함께 계셨고, 세상을 떠날 때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절망에 대항하는 희망의 속삭임인 동시에 매일 아침 우리의 얼굴을 비춰주는 햇살이기도 하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수시로 다가와서 말을 건네주시고, 힘을 불어넣어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도 여전히 조금도 쉬지 않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창세전 작정을 완성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절대 주권과 탁월한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후에도 넘어지고 또 넘어질 것이 분명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을 잊지 마십시오. 새로운 기회로 주어진 하루하루 삶 속에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찾아와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사명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함께 쭉 동행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결코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으로 무장하는 복된 삶, 뿌리 깊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 곧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복된 삶, 재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시온과 하나님 나라라는 정체성에 합당한 영적 풍요를 누리는 복된 삶, 맡겨진 사명까지도 얼마든지 감당하는 복된 삶, 무엇보다 당신이 이루겠다고 외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을 목격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