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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13:4절은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척도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부종”이란 하나님과 전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연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성도의 삶은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름(oil)이 필요한 한 수도사가 올리브 묘목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연약한 뿌리를 위하여 단비를 내려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단비를 내려주셨습니다. 수도사가 또 태양을 위해 기도하자, 이번에는 구름이 걷히더니 해가 나왔습니다. 수도사는 또 나무가 단단히 자랄 수 있도록 서리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나무에는 서리가 내려 반짝였습니다. 그런데 웬걸 나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경험을 다른 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동료 수도사는 조용히 “나도 역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나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키우시기 때문이지요.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나무에 대해서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기 때문이지요. 다만 단비든, 바람이든, 태양이든, 나무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에 맞게 달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우리는 주를 믿는 동시에 모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우리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20절입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지중해 북쪽 연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두로와 시돈은 식량을 전적으로 인근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로와 시돈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진 아그립바 1세는 이 지방에 대한 식량공급을 중단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식량난에 빠진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아그립바의 침소를 맡은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아그립바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아그립바 1세는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가이사랴로 내려갔고, 이 정보는 블라스도를 통해 즉각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21-23절입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행사 두 번째 날 그가 입은 은빛 왕복은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의 연설이 시작되었을 때, 어떻게 해서든 아그립바의 마음을 사야된다고 생각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그를 향해 하나님이라고 환호했고, 그는 그것을 즐기며 지극히 만족해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유대인들이 불길의 징조로 여기던 올빼미 한 마리가 무대 뒤에 있는 기둥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올빼미를 본 아그립바 1세는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닷새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그가 죽기 전에 그의 몸은 이미 썩어 벌레가 생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도 야고보를 참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 마저 죽이기 위해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투옥된 베드로가 사라져버리자, 무고한 경비병들을 죽였습니다.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식량공급을 하루아침에 중단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리까지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에게 주어진 권력은 영원할 것 같았고, 불가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을 때, 그는 겨우 내장에 기생하는 벌레에게 먹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24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아그립바 1세는 벌레의 밥이 되어 인생을 끝내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해 갔습니다. 이는 기독교의 확장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 육신의 정욕만을 위해 사는 자의 인생이란, 한 마디로 구더기 밥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6:7-8절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육신의 정욕입니까? 기껏 구더기 밥이 되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영생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영생을 사모하는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5절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안디옥 교회에게 있어서 물질은 봉사와 섬김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번 시작한 봉사와 섬김을 중간에 끝내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사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점을 주후 46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그립바 1세가 죽은 것은 주후 44년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사울과 바나바의 봉사와 섬김은 2년 정도의 간격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2년 동안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마음은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을 마쳤던 것입니다. 한번 시작한 일이라면 끝까지 마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1절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를 섬겼던 지도자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원칙적으로 연장자, 혹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의 이름을 먼저 기록했습니다. ① 첫 번째 지도자는 바나바였습니다. 레위지파로 구브로 출신인 그는 선한 사람이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하는 그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도들이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로 불렀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교회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② 다음은 시므온입니다. 그는 “니게르”였습니다. “니게르(niger)”란 “검다”는 뜻으로, 이 단어로부터 “니그로(negro)”가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흑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흑인이라면 유대인일 수 없기에 그는 이방인임이 틀림없었습니다. 2천년 전이라면 분명 극심한 인종차별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에는 이방 흑인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교인이 아닌, 교회의 지도자로서 말입니다. ③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구레네 출신이란 것 외에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안디옥 교회에서는 지도자 반열에 올라 있었습니다.
④ 또 헤롯의 젖 동생으로 마나엔입니다. 여기서 젖 동생이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를 의미합니다. 그가 헤롯의 죽마고우였다면, 그 역시 당시 최고 집권층 출신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집권층에 속한 유대인이라면, 일반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매국노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경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배경을 지닌 마나엔 또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⑤ 마지막으로 사울입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는 등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안디옥 교회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은 결코 쉽게 함께 할 수 없는 서로 다른 경력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 안에서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이 정도였다면,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복음이야말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말씀임을, 구성원들 스스로가 삶으로 증명하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서, 은혜 안에서 우리는 하나될 수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성령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위에 언급된 다섯 명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지가 되었으며, 사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때에도 바나바의 이름은 사울 앞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여행의 팀장은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여전히 바나바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9a절은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밝히고 있고, 13a절 또한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목적지 구브로에 도착한 사울은, 그때부터 바울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날 때에는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이때부터 바울을 선교여행의 지도자로, 기독교 역사의 중심 인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사도행전은 마치 바울행전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바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초대교회사의 중심인물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마28:18-20절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행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벗어나 땅 끝에 있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복음을 듣고 구원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 가운데 그 누구도 땅 끝을 품으려는 자가 없었습니다. 기껏해서 빌립과 베드로가 몇 명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스라엘의 경내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려는 제자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땅 끝을 마음에 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땅 끝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언제든지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새로운 사도행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음성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안디옥 교회는 한참 성장하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바나바는 교회의 핵심사역자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놓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금식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그들은 마침내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보내었다”에 해당하는 “아폴뤼오(apoluo)”는 “놓아주다, 또는 풀어주다”는 뜻입니다. 곧 나로부터 놓아준다,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되, 안디옥 교회에게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보냈다는 말입니다.
이곳에서 안타깝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파송한 교회가 현장을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파송한 교회는 현장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결정들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사역이 중단되기도 하고, 파송한 교회와 사역자의 관계가 단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파송한 교회는 파송된 사역자가 본 교회에 얽메이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교회만의 일은 아닙니다. ① 부모 자식관계도 똑같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분가시키면서도 마음으로는 풀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독립된 가장 같지만, 불행하게도 실제로는 부모의 손에 여전히 갇혀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하나의 인격으로 태어난 자식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풀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② 또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선입관으로부터 서로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상대방에게서 부족함을 발견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도록 서로가 통로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간관계는 개선이 되고, 더 깊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금식은 절제를 의미합니다. 곧 자기절제를 위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보냄과 떠남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디옥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 보냄과 떠남을 잘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하는 교회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아주 작은 공동체에 모여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도 작아 보이기만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떠나보내는 안디옥 교회 역시 당시에는 작고 연약한 교회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없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금식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을 때, 선계선교를 위한 중심교회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또 서로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와 함께만 해주신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과 함께만 해주신다면, 우리 공동체와 저와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위대한 일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만 하시면 인간의 규모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위대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또 다른 공동체가 든든히 세워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워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작은 공동체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미 위대한 일들을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십시오. 편견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떠나보낼 것은 보내고, 가야만 하실 분은 가십시오. 성령의 음성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한 건축 설계사는 "저에게 설계 부탁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자기가 원하는 모양의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양대로 설계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설계한 집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은 대단히 못 마땅해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고, 그 개성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가장 잘 설계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인생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 1세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다가 충에 먹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복음 안에서 하나되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떠나 보내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세계선교를 위한 위대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잘 설계하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저와 여러분의 연약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위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