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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렬 작품론
그림과 그림자의 입체적 중재, 현실과 이상의 줌인(zoom-in)/이령
먼저 구광렬 시인의 작품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작품의 기저에 깔린 중남미와 한국이라는 이종문화(단순한 소재의 혼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종의 문화가 결합된 다양성)의 혼종에서 느껴지는 새로움, 산문적 시지만 결코 흩어짐 없는 유려한 음악성, 단단한 서사구조가 불러오는 흥미로움, 영화의 한 장면을 눈으로 읽는 것 같은 명징함, 메시지를 끝까지 견인하는 묵직한 사유의 깊이, 무엇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으로 인해 그의 시작은 매우 입체적이다. 그가 시단의 입체파 시인이라 명명되는 이유가 아닐까!
지혜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좌절이 빚어내는 열매라고 했던가? 누구나 자신이 가진 지혜의 범주 내에서 주어진 현상을 판단하고 규정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한 시인의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 독자는 자신이 가진 시안의 깊이에 따라 작품을 평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는 좋고 나쁨의 범주로 이분화 되기보다 독자의 호불호와 닿아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작품과 작품의 배경, 작가의 사유에 대한 독자의 접근성 등의 집중적 독서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나는 구광렬 시인의 작품에서 진중하고 오래된 독자임을 밝힌다.
먼저 구광렬 시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그 만의 독특한 시작 배경과 시적 형상화의 상황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멕시코국립대학에서 중남미언어(문학박사)를 전공하고 “하늘보다 높은 땅: La tierra mas alta que el cielo” (멕시코 출판사 Eon刊), “팽팽한 줄 위를 걷기: Caminar sobre la cuerda tirante” (우루구아이 출판사 aBrace 刊) 등을 통해 정식으로 멕시코 문단에 데뷔했다. 또한 현대문학에 ‘들꽃’을 발표하며 한국문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슬프다 할 뻔 했다”(문학과 지성사 刊), “불 맛”(실천문학사 刊)등의 국내시집을 발간했다. 그 외에도 많은 번역서와 소설, 문학관련 저서 40여권을 집필했다. 멕시코 문협상, 브라질 ALPAS XXI 라틴 시인상을 수상한 멕시코 시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에서는 오월문학상과 산문집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이 젊은 비평가들에 의해 ‘2009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한국문단에서 보기 드물게 스페인어와 한글의 이중 언어로 번역을 하고 시와 소설을 쓰는 전 방위 멀티태스킹 문인이다.
시적언어 번역은 단순한 텍스트번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깊이 이해해야만 가능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이기에 시인 본인이 이중 언어로 빼어난 시를 쓰고 양 문화권에서 공히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가히 놀랄만한 일이다. 이런 일련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구광렬 시인이 고국인 한국보다 중남미에서 더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세계적인 시인이 한국문단에서 다소 덜 조명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의 시가 한국문단에서 받아들여지는 점에선 다소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질성은 새롭다는 것이고 새롭다는 것은 신선함과 이해 측면에선 조금의 불편함을 내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존의 형식만을 고수할 때 새로움은 불편함을 초래한다. 기존의 형식에 기반을 두고 고착화된 틀을 깰 때 새로움이 생겨난다. 이 때 새로움이란 기존의 형식을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형식에 도전하는 즉 양념이 첨가된 온고지신의 고마운 비약일 것이다. 비단 문학 예술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든 불편함의 기저에는 “문제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수반되는 인지 부조화 현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느 분야든 새로움과 불편함은 발전의 발화점이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새로움에 대한 도전과 수긍이 없다면 인간의 문화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문단에서도 이제 그의 시를 깊이 들여다볼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의 시집 ‘불맛’의 시편들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시인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매개로한 가장 한국적인 것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고국을 떠나 수십 년 동안 중남미에서 수학하고 시를 써온 시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시의 기저에 깔린 정서는 전통적이다. 반면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시의 형식에 있어서는 매우 모던하다. 전통적인 시의 근저에 모더니즘적인 주지적 어법과 삶 그리고 인간의 관계성에서 도출된 따뜻한 정서, 경험에서 도출된 깊은 사유의 혼종이 불러오는 새로움이 바로 독자로 하여금 ‘불 맛’을 오래 음미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불 맛’의 시들에 비해 ‘슬프다 할 뻔 했다’는 여러 작품에서 한국문단에서 받아들이기에 다소 이질적인 정서들이 더 많이 드러난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주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시는 거의 수사를 배제하고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고도의 절제된 시로 독자에게 매우 드라이하게 다가오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구문 반복을 통한 사유의 깊이감과 단 한자라도 간과한다면 전체 시가 무너질 것 같은 완결성, 다시 말해 설명을 배제한 시인이 하고자하는 말을 독자가 최대한 건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에 매우 신선하다. 오히려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가 인정한대로 체 게바라의 추종자답게 매우 인류애 적이고 따뜻하다. 다만 시인이 먼저 감정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감성을 건지게 하는 노련함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근래 한국시들에서 자주 목격되는 정신병폐적인 단순한 말 부림, 사유가 결핍된 난삽함에서 오는 낯설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생경함 혹은 낯설음이 있기에 새롭게 느껴진다.
즉, 그의 시에서 보여 지는 난해성은 근래 한국시에서 시도되는 자아 분열적 시작(詩作)의 형태를 뛰어넘어 한국적 정서의 바탕위에 중남미 정서가 혼종 되면서 생겨난 전혀 다른 차원의 난해성일 가능성이 높다. 즉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설로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에서 우루과이 출신의 시인인 사울 이바르고옌은 “그가 중남미에서 이러한 독특한 이중 언어적 시작(詩作)을 계속한다면 곧 그의 상상과 글쓰기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울 이바르고옌의 말에서 새로운 국면이라는 의미는 미루어 짐작컨대 구광렬 시인의 이중 언어적 시작이 단순한 소재의 이중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남미 문화와 한국문화의 결합과 표현의 입체성으로 인해 모국어의 세계를 낯설게 보게 하고 외국어로서의 세계를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다양성으로 인해 좀 더 앞선 시세계의 발전을 모색한다는 뜻이리라.
그가 찾아가는 시인 편에 보내온 신작 5편의 시를 통독해 보면 공통된 특색이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한 순간의 장면을 포착해서 입체적인 시공간의 구성과 깊이 있는 사유로 끌어와 낯설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시어들은 고정된 언어관습을 넘어선 날 것들의 투시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확장과 증폭이 자유롭다. 그의 시는 가스통 바슐라르식의 이미지의 폭탄 속에서도 시적 질료들의 재편성들이 다채롭지만 깊은 사유 로 일련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만이 가진 시적 기저에 놓인 문화적 스펙트럼의 광폭 때문이며 상상력의 결과일 것이다.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이미지를 부려놓고 있다. 그런데 그 낯설음이 억지스럽지 않는 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한 장면들을 가져와 선명하게 묘사해서 메시지를 독자가 구하도록 하는 구성이 입체적이면서도 탄탄하기 때문이다. 병풍 속 그림들은 각각의 의미가 있지만 결국 병풍 밖 풍경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전언을 던지는 서사들이 결국 광활한 wild sketch를 자아내고 있다. 5편의 시가 모두 시인이 직접 경험한 일들에서 시적발아가 생겨나지만 일차적인 현상과 사유를 넘어 깊게 파고드는 천착이 불러오는 힘. 새로운 이미지들의 생성, 탄탄한 서사구조와 군더더기 없는 모던한 어법, 그렇기에 매우 드라이하게 느껴지는 형식, 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생을 관조하는 따뜻한 시선, 그것이 그가 지닌 독보적 시적어법이다.
앞서 언급한 시집들에서 보여 지는 시들보다 5편의 시는 좀 더 입체적이다. 즉 ‘불 맛’은 전통적 정서에 더 치우쳐 있고 ‘슬프다 할 뻔 했다’는 시제의 독창성과 더불어 모더니즘적 어법으로 인해 좀 더 건조했다면 이번에 보내온 5편의 시들은 내용은 더 깊어졌고 형식은 더 입체적이다.
「비망록과 마그네슘」에서 지하철 강남역 8번 메가 박스 까지 동선을 따라가는 하나의 단어가 밤이 되고 새벽에 전원시 한 줄로 태어나기까지 시인은 독자의 의식을 유도하고 있다. 마그네슘이 막네슘으로 막네슘이 막시발눔이 되기까지 따라붙던 독자의 의식은 마지막 행, 기억은 편했고 비망록은 들칠 필요가 없었다는 귀결에선 딱 멈춰 서서 다시 앞에서 펼쳐진 시의 장면들을 회상하게 하는 재독의 마력을 부려놓는다. 마치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듯하다. 무작정 백과사전을 편 뒤 맨 윗줄의 단어로 시를 써보기로 작정한 시인이 발견한 단어는 마그네슘이었다. 마그네슘에서 막네슘이되고 막시발눔이 되는 우연을 발견한다. 그릇된 일기예보를 탓하지 않는 운명에의 순응, 그러므로 결국 시인은 기억은 편했고 비망록은 들칠 필요가 없었겠다. 눈이 올 거라던 예보와 달리 비가 내렸으나 그릇된 일기예보를 탓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루는 24시간이고 밤이 이슥해지자 비는 진눈개비로, 진눈개비는 눈송이로 바뀌고 하루 종일 머리에 따라붙던 단어 마그네슘에서 마침내 그리움이 스며 나오는 것이다.
마치 숲을 던져놓고 나무를 골라보라 식의 대명제를 던지는 것 같은 작품이다. 우연에서 발견한 한 단어를 붙잡고 깊은 천착에서 나오는 비망록에 대한 고백, 막막했던 마그네슘이 田園의 시 한 수가 되는 것도 어쩌면 시에 대한 치밀한 천착과 기다림, 우연에서 필연을 발견하는 심안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처럼 구광렬의 시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미세하고 작은 서사들을 끌어와 우연을 부려놓고 결국 다시 큰 주제를 던지며 필연으로 귀결시키는 완결성이 있다. 마그네슘이 막네슘이되고 막시발눔이 되는 지점에서 기성 어법의 경계를 변경하고 있다. 시인은 칠레산 포도주가 입안에서 튈 때, 마그네슘! 이라는 낱말에서 그리움이 스며 나왔고 편리하고도 편안한 망각을 위한 또 다른 기억을 위해, 불온하고도 불편한 기억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시방, 날보고 욕하는 거제? -그냥, 막네슘이라 했는데...... -것 봐, 막시발눔이라 하고 있잖아! . . . (중략)
기억은 편했고 비망록은 들칠 필요가 없었다. 「비망록과 마그네슘」부분
지리적으로 강수량은 적고 낮과 밤의 온도차가 크며 안데스 산지의 만년설로 인해 지하수는 풍부하니 포도산지로서 최적의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 칠레에선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와인의 품질이 낮아질 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와인에 있어서 공히 가격대비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이는 그의 시편들에서 보여주는 우연에 기댄 필연성, 즉 질료로서 이미지들이 기존 어법의 경계를 허물며 어떻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흔한 장면을 가져와 묵직한 사유로 끌고 가는 힘, 삶의 밀도와 부피, 무게중심의 반경을 응축해서 선명한 이미지를 던진다. 즉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장면 묘사에서 독자를 상상력의 행로에 동참시키고 깊은 메시지를 건지게 한다. 아래의 시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고백과 고백사이」-발렌타인데이, 투 섬 플레이스에서中- 시인은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치는 예수보다 더 신(神) 같던 사제 때문에 마리아보다 더 성모(聖母) 같던 수녀 때문에 성당을 오래 다녔다고 고백한다. 도무지 부활의 희망이나 의지를 보여주지 않던 신보다 인간을 사랑하게 된 시인은 현상의 전복을 통해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 시의 서사에서 보여 지는 단편들이 각자의 의미 있는 것들이 하나의 큰 의미로 복속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결국엔 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인간과 현상을 신으로 보는 시인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그 또한 신이었을 거다 신 없으면 기원후(紀元後) 인간이 신이 되려 드니까, 죄는 물론이고 벌 또한 인간의 짓이란다. -중략
현상과 사람의 본질에 대한 따뜻함이 잘 드러나는 비본질적인 낯설게 하기의 텍스트 같은 시 “펌프와 젖꼭지-나 다니던 초등학교, 사창가에 있었다”에서는 창근이네 집의 창녀들은 어린애가 보기에도 어린애 같았고 그녀들은 비싼 울음을 싸게 파느니 싼 웃음을 비싸게 파는 정답고 순한 누나들로 묘사되어 있다. 포주였을 창근이 아버진 그럼에도 서예가였으며 색색거리는 누나들의 교성에도 붓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장면만 그대로 묘사하고 시에서 건지는 감정과 상상력이 불러오는 즐거움은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 시다.
입석으로 올 때나, 좌석으로 올 때나, 그림자를 두고 내리는 건 마찬가지다 두고 내릴 그림자도 없는 녀석들 때문이 아니다 구겨서라도 들어갈, 깔려서라도 함께 할, 제 살점과 뼈다귀를 찾고 있을 그 그림자들 때문이다. -설날 동대구역에서 中
「설날 동대구역에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적발화가 아주 일상적인 장면에서 시작되고 그 한 장면을 포착해서 깊은 생의 사유로 확장시키는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페르소나는 그림자다. 삶의 후배(後背)로서의 그림자에 천착하는 시인, 그것은 아마도 밝음 쪽의 그림과 어둠 쪽의 그림자마저 제 위치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림 너머의 그림자가 불러오는 사유의 확장은 바로 현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상 이면의 진실까지 들추어내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다. 그림이 되지 못하는 그림자, 그림자까지 포함하는 그림이야말로 그림이지 않나? “좌석坐席이란 것도 그렇다 잠시 무릎을 접을 뿐이다 의자 부피만큼만 자신의 그림자를 깔고 앉을 뿐이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림의 배후인 그림자까지가 그가 그리는 그림이다. 삶의 음영을 통해 삶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처럼 밝음과 어둠이라는 삶의 두 양태를 포착해서 삶의 진실을 부려놓는 설법이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그림에 국한되는 사유가 아니라 그림이 부려놓는 그림자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의 확장을 보여준다. 다채로운 이미지의 나열과 함께 질료들의 양태까지 천착하는 입체성이 바로 구광렬 시의 독보적 시작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구광렬 시인의 입체적 시적 어법의 극대화는 「건전 이발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발사는 시인에게 일상적인 대화를 시도하지만 시인은 이발사의 말을 허투루 듣고 있다. 대신 이발관 벽에 걸린 그림에 시선이 닿아있다. 강아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그리는 그림, 그런데 시인은 그 강아지 그림도 강아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아닌 그 화가의 웃음에 시선이 고정된다. 상상력의 극치다. 이는 구광렬 시인의 시의 가장 독보적 시적어법인 입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구체적이고 중첩적인 묘사를 통해 상상력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이발소를 나온 시인은 현실과 마주한다. “그렇게 풍경은 그림이 되고 있었지만, 난 그림 밖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머리를 깎는 동안 이발사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딸이 농협에 취직했다, 휘발유보다 경유가 더 비싸지겠다, 보일러가 터졌다 하지만 이야기의 반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그림 때문 이었다 어미 개와 강아지 열 마리를 그리고 있는, 한 화가를 그린 그림 이었다 그중 한 마리가 캔버스 밖으로 발을 내밀어, 그림 속 화가에게 건네고 있었다 그림 속 그림의 강아지의 웃음, 그림 속 화가의 웃음, 그림 밖 내 웃음이 삐거덕거리지 않고 번져나갔다 그제야, 자신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는 걸 안 이발사, 웃었다
밖으로 나오니, 함박준이 내렸다 건너 성당의 마리아상 속눈썹에까지 쌓일 기세였다 공원놀이터가 보이고, 빈 그네 위에 흰 눈이 쌓이고, 고요한 밤, 소시민을 위한 밤이 될 듯했다 단지, 머리카락을 잘랐을 뿐이건만 뇌수술을 받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담벼락에 주차되어있는 내 디젤 짚을 보는 순간, 20년 된 보일러가 떠오르고, 10년 째 취직 못하는 아들놈이 떠올랐다 그렇게 풍경은 그림이 되고 있었지만, 난 그림 밖에 있었다 정녕 그 그림을 그린 화가도 웃었을까 시동을 걸기도 전에, 그림 속 강아지 발이 그리웠다
-「건전 이발소」 전문
세부묘사가 구체적이고 사실적일수록 작품을 이해하는데 부조리하고 불가해적인 측면이 강하기 마련인데 구광렬 시인의 작품은 확실히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단순한 그림 안의 대상(어미 개와 강아지 열 마리)과 대상 안의 대상(어미 개와 강아지 열 마리를 그리는 화가) 그리고 그 대상 안의 대상의 표정(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웃음)까지 묘사하는 매우 입체적인 표현과 하나의 대상을 그림의 안과 밖으로 나누는 발상은 그의 시적 어법의 독창성이 극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병풍안의 풍경이 병풍 밖 풍경과 어울려 하나의 풍광이 완성되듯, 그림과 그림너머의 그림자가 어울려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듯 시인이 그리고 있는 야성의 스케치들은 이렇듯 각각 의미 있는 존재들이지만 서로 어울려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낸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자아내고 있다. 그림자까지가 그림이 되듯 그가 그린 그림은 이처럼 선명하고 깊으며 다채롭고 입체적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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