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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라, 모사라.
이사야 9:6~7
오늘 저녁 예배에 우리가 살펴볼 주의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예언인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지 7백년만에 이 예언 말씀 그대로 지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우리 구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이 주어진 당시 상황을 보면, 북 이스라엘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저쪽의 갈릴리는 이미 아람 나라에게 수시로 침탈된 상태요 곧장 앗수르에 의하여 빼앗겨서 이방화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는 어둠만이 가득하였습니다. 또한 남 유다 역시 불의하고 패역하고 불경건한 아하스 왕의 통치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코앞에 이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에도 구원의 여망이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실 것이라고 예언이 주어진 바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그들에게 큰 빛이 비출 것이며 그치지 않는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멍에와 채찍과 압제의 막대기가 꺾어지는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적 비전은 듣기만 해도 얼마나 설레는 것입니까? 우리나라가 일제의 36년 동안의 압제 밑에서 8.15해방을 맞았을 때 해방의 기쁨이 컸는지, 삼일 동안 밤낮으로 거리로 쏟아져나와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고 전해지지 않습니까? 6.25 전쟁의 참상을 겪은 분들은 전쟁이 얼마나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는지를 잘 알기에, 전쟁을 두려워하고 이를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금 우리나라도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끼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슬픔과 압제와 고통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부당한 지도자의 약탈과 부당한 압제로 인한 고통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 모든 불의하고 부조리한 세상이 공의와 공법이 가득한 나라로 온전히 정착되어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과연 전쟁이 없는 영원한 평화의 나라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 본문 말씀의 예언은 참으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귀한 예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과 그의 사역 가운데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장차 예수께서 그 나라, 그의 통치를 온전히 성취하고자 그의 때에 온전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7백년 전에 선포되었던 이 예언 속에 구원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구원자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사역을 하실 것인가에 대하여 여기 다섯 가지 이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째, 그의 이름은 기묘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자의 몸을 빌어 태어날 아기, 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아기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어졌으니, 곧 위대한 권세와 능력과 통치의 권력을 가진 통치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이름을 맨 처음 ‘기묘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묘자라는 무슨 뜻입니까? 이는 ‘기묘, 놀라움, 기이함, 알 수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면’을 가리킵니다. 이 기묘함은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에 대하여 성경에서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이 ‘기이하다’는 단어가 사용되곤 합니다. 시편 17:7 이하의 말씀에,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아래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누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31:21 이하의 말씀에서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는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 구주의 사랑 역시 놀라운 사랑이요 기이한 사랑이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사랑 아닙니까?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부어주신 사랑을 주셨습니다. 달아날 뿐 아니라 대적하여 원수처럼 구는 우리에게 도리어 한없이 너그럽게 대해주시고 오래참아 주셨습니다. 그의 사랑은 참으로 기이한 사랑이요 놀라운 사랑이요 우리가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크고 깊고 높고 영원한 사랑인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그 사랑을 알아가다가 저 천국에서 더 많이 깨닫겠지만 영원히 그 사랑의 크기를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구주의 존재와 그의 사역 역시 기이합니다. 그의 모든 행하심은 우리에게 기이합니다.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감추어진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이사야 28:29 말씀에,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구주의 행하심을 누가 다 알 수 있습니까? 주께서 애굽에서 그 백성을 인도하실 때 그들을 어찌 홍해 바다를 길로 삼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시편 77:19 말씀에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의 지혜의 오묘함을 깨닫고는 노래하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요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로마서 11:33,34)
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사와 그의 통찰력은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움 그 자체 아닙니까? 그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대하여 막힘이 없이 대답하시며, 모든 대적하는 자들의 입을 막으시지 않았습니까? 그가 지금도 행하시는 모든 일의 섭리적 손길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지혜자라고 해서 누가 주님의 지혜를 따라잡을 수 있겠으며, 그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욥처럼 우리는 그 앞에서 우리 입을 다물고 기이함을 인하여 놀랄 뿐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 역시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분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부모가 그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 곧 우리 구주를 보고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니라”
이 말씀은 “내 이름은 ‘모른다’이다. 내 이름은 네가 깨달을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본질을 누가 감히 알 수 있습니까? 시간과 공간에 매인 인간, 땅에 일에 매인 인간이 온 세상 만물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시고 그의 뜻을 따라 영계와 물질계를 그 뜻대로 주관하시며 통치하시며 무한한 능력으로 그의 뜻을 그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 이름은 기묘자라”라고 대답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구주 예수님을 안다 해도 결코 다 알 수 없습니다. 영원히 그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두고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기묘자 예수께서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셔서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놀라운 지혜를 증거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걷도록 인도해주셨으니, 이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이르시기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고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이 땅에 한 아기로 태어나서 자라나 우리 가운데 일하시며 그 놀라운 지혜를 말씀하시며 기이한 사랑을 드러내시고 기이한 이적을 나타내주셨으니, 그를 보는 자마다 놀라워하고 기이히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기이함의 은혜, 놀라움의 은혜를 평생 더욱 새롭게 가져야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마음이 딱딱해지고 강퍅해져서는 안되겠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주의 기이한 사랑에 감격하여 울며, 기도 많이 하여 그의 기이한 이적적 도우심을 경험하면서 그의 도우심에 감격하며 간증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또한 기록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에도,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에도 이러한 놀라움과 기이함의 감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편 119:18 말씀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19:129,130 말씀에서도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의 증거들이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추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증거 곧 기록된 말씀들이 늘 새로운 와닿아서 읽어도 읽어도 또 새롭게 큰 감동으로 우리 영혼을 사로잡는 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기이함입니다. 영원히 늘 새롭게 놀라움과 미지의 영감과 기이한 도우심으로 우리의 삶을 역경과 고난에서 구원해주시고 새로운 창조의 길로 인도하시는 놀라움 자체입니다. 그러한 기이함을 늘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늘 주의 말씀을 사랑하며 기도에 힘써서 기이함의 영 곧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법칙의 한계, 이성적인 한계, 인간의 경험의 한계, 인간 능력과 지혜의 한계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의 초월적인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깨닫게 해주심의 은혜를 계속하여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입니다. 모든 것이 평범하고 지루해지고 짜증이 나고 복잡해지고 눌리고 답답하고 점점 길이 잘 보이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기묘함’, ‘초월성’은 낯설지만 지극히 절실히 필요한 힘이요 구원입니다. 바로 그 기묘함의 원천이 우리 구주 예수님입니다. 주의 놀라움, 기이함, 초월적 역사하심이 여러분의 삶 속에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기이함이 여러분의 일상의 삶을 기대가 넘치는 삶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생동감이 넘치게 할 것이며 놀라운 창조적인 삶으로 인도해가는 원동력이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이름은 ‘모사’입니다.
모사란 뜻은 ‘작정, 뜻, 계획. 마음의 도모’를 가리킵니다. 혹은 ‘조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장차 올 메시야는 뜻과 작정을 정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뜻과 작정은 사람의 뜻과 작정과 달리 영존하는 것입니다. 한번 정하시면 상황과 여건에 의하여 결코 좌절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그 뜻과 작정은 반드시 성취시키는 분입니다. 이사야 46:9,10 말씀에 보면,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며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이요 고레스라는 사람을 일으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이요 자기 백성을 다시 회복시켜주게 하겠다는 맥락 속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직 바벨론이 앗수르를 정복하기 전에 아직 약한 나라일 때 말씀하신 바요 페르샤의 왕 고레스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2백년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작정하신 뜻을 밝히셨고,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막겠습니까? 어떤 어려운 난관도 그의 작정을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정은 개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잠언 19:20,21 말씀에서 이르기를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 인생을 생각하며 많은 계획을 세워 그 일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이 자기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이루어가려고 애를 써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작정, 곧 우리 구주의 모사, 작정이 그 사람에게 딱 서 있으면 다 그 일이 성취가 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일이 합력하여 그를 향하신 주님의 뜻만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도 다 뜻이 있습니다. 작정이 있습니다. 계획이 있습니다. 다윗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깨달았던 진리를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예레미야에게도 주께서 이르기를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그의 작정을 세우시고 그 뜻을 끝까지 이루어가시므로, 우리들은 그의 작정과 뜻을 거슬러 행하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온 세상의 일들을 작정하시고 경영하시는 것을 알고 그의 행하시는 일들을 경외함으로 지켜보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 모사라는 뜻에는 돕는 자, 조언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영어로 ‘상담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자기 백성들을 돕고 조언하며 책망하며 위로해주곤 하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상담자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최고의 지성인 니고데모에게도 그러하였고 가장 평범한 여인이요 상처 많은 수가 성 여인에게도 차별없이 상담해주셨습니다. 그 상담을 받았던 그 두 사람은 동일하게 인생의 문제에 큰 위로와 힘을 얻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요 우리의 놀라움이 되시며 우리의 친절한 상담자 되신 주님을 늘 환영하며 의지합시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기이한 도우심을 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삶에 상처를 싸매줄 것이요 위로와 용기를 줄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힘이요 기쁨이요 능력입니다. 그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