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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를 떠난지 약 1시간이 지나서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버스는 중앙역인 아토차역을 지나가고 있다.
어제까지는 날씨가 좋아 여행이 즐거웠는데 오늘은 좀 불편한 하루일 것 같다(승근이 사진)
먼저 마드리드 관광 루트를 지도에 표시해 본다.
조금후 버스는 시벨레스 광장의 분수대를 돌아 메트로폴리스 빌딩이 있는 그란비아 거리를 향해 가고있다.
시벨레스 광장 중앙에는 시벨레스 여신의 분수대가 있고 주위로는 관공서가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요란하고 아름다운 이 건물은 마드리드 시청이다. 이외에 부에나비스타 궁전, 리나레스 궁전, 중앙우체국, 주정부 사무소와 스페인 은행, 해군 역사박물관, 육군 사령부 등이 있다
레티로 공원에서 시벨레스 광장을 가로질러 푸에르타 델 솔 광장까지 쭉 뻣어있는 이 도로가 '알칼라 거리'로 마드리드의 메인 스트리트 이다
알칼라 거리에서 V자로 갈라져 나가는 이 거리는 마드리드에서 최고의 번화가이자 쇼핑가인 그란비아 거리 이다. 뉴욕과 파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거리 양쪽으로는 은행, 고급호텔, 쇼핑센터, 명품샵, 극장, 카페와 바들이 밀집해 있다. 거리 자체가 길지는 않지만 마드리드의 향취를 생생하게 느낄수 있어 관광객들과 현지인들로 늘 북적이는 핫 플레이스이다.
우리 일행은 비는 줄기차게 내리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식당을 찾아서 고고 !!
그란비아 거리 뒤편의 한식당 '마루(MARU)'에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의 저녁식사를 즐기게 된다
메뉴는 한식으로 흰밥에 된장국이고 반찬으로는 돼지고기 볶음, 미역무침, 오이무침, 콩나물, 김치와 김이 나왔는데 간소한 차림이었지만 한끼 식사로는 그런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식당 앞의 좁은 골목에는 고급스러운 빌라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식사 후 다시 그란비아 거리로 나왔는데 스페인의 상징이며 자랑거리인 메트로폴리스 빌딩이 보이지 않는다! 대대적 수리 중인지 DIOR 광고판으로 건물을 몽땅 덮어 버렸다. 이러면 별 수 없다. 그동안 숨기고있던 비장의 도법을 시전할수 밖에..수리수리 얍 !!
쨔잔 ~~ 하늘을 뒤덮은 구름도 물러가고 건물을 가리던 광고판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역시 나는 너무 대단해 ㅎㅎ
그건 그렇고 이놈의 건물이 위치와 자세가 상업용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을 압도하며 헤쳐나가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돌격선처럼 보인다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란비아 거리에서 인증사진 하나 박아두고,
메인 스트리트 알칼라 거리도 사진에 담아 보았다
버스를 타고 한바퀴 돌아 프라도 미술관에 도착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1819년 페르난도 7세가 완성시켜 개관되었다. 처음에는 왕실에서 수집된 다양한 미술품이 전시되었으나 현재는 12~19세기 유럽국가들의 미술 작품을 나라별로 나누어 전시해 놓았다. 소묘. 판화. 화려한 장식미술 작품들도 볼만하며, 특히 엘그레코, 고야, 벨라스케스, 히에로니무스보스 등의 그림들이 볼만하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미술관 동쪽 언덕에는 산헤로니모 엘 레알 성당이 자리잡고 있고
미술관 북쪽 광장에는 고야의 동상이 있으며, 건물 정면에는 벨라스케스의 동상이 있다
입장을 위해 건물 뒤편에 있는 미술관 입구로 이동했다
오늘은 날씨도 우중충하니 미술관 안에서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그림을 그의 생애 순서대로 중점 감상해야겠다.
사라고사 인근 푸엔데토도스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시스코 고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로, 궁전의 벽을 치장하는 테피스트리를 그리면서 왕실로 부터 주목을 받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궁정화가가 되었고 왕가와 귀족들의 많은 초상화를 그려내며 수석 궁정화가로서의 명예를 누렸다
그 가운데 유명한 작품이 1800년(당시 54세)에 그려진 아래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이다. 왕족의 초상화로서 근엄성을 내포하면서도 화려한 색상과 빛의 마술을 보는듯한 이 그림은 당시 가정과 국사에서 위세를 떨치던 왕후를 파격적으로 중앙에 배치하고 힘 있는 눈매로 가족의 질서를 끌어가는 모습인데 반해, 나약하고 무능했던 국왕과 기울어져 가는 왕실 가족의 힘없고 연약한 모습을 은근하게 대비해 놓았으며, 당시 왕실 각 인물의 특색을 외양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날카롭게 담아내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후 고야가 쫒겨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인데, 아둔한 왕실은 자신들의 모습이 풍자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한다.
또 고야 자신도 그림의 왼편에 그려 넣었고 제일 어린 왕자를 왕후의 내연남이었던 마뉴엘 고도이 총리와 꼭 닮게 그린 센스도...
이 그림은 고야의 유명한 연작으로 1800년(54세)에 그린 '옷을 벗은 마하' 와 1803년에 그려진 '옷을 입은 마하' 이다.
'옷을 벗은 마하'로 인해 고야는 1813년 카톨릭 교회로 부터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비너스 등 신을 제외한 여성의 누드화는 신성모독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이단심판은 면할수 있었으나 이 일로 인해 궁정화가의 직을 잃게된다.
위 내용을 작성 중 카카오로 부터 아래와 같은 통지를 받으면서 동시에 이 페이지 전체가 카페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경고를 받았다. 음란물이 아니고 명화이며 남녀노소 모두 관람이 가능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고있는 작품임을 이유로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할 수 없이 페이지를 다시 만들고 그림의 중요부분은 가렸다.
그림은 항상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환경과 작가 개인이 처한 상황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고야의 그림도 시절이 좋았던 초기에는 화려하고 섬세한 터치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으나, 전쟁의 참상 및 독재적인 왕실과 종교재판이 횡횡하는 시대를 거치며 점점 어둡고 거칠며 비판적인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고, 말년에는 병마에 시달리며 좌절감에 휩싸여 '검은그림' 연작을 남기게 된다.
이 그림도 고야의 작품으로 1814년(68세)에 그린 '1808년 5월 3일의 학살' 이다.
1808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공하자 이에 대항해 스페인 반란군이 봉기를 일으켰고 그 복수로 마드리드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을 화폭에 담았는데, 어둠이 짙게 드리운 산 모퉁이. 얼굴은 안 보인채 총을 겨눈 기계와 같은 학살자들과, 밝은 등불 빛 속에 죽음을 앞두고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있는 양민들의 모습을 바로크-낭만주의적 기법을 통해 극적으로 그려냈다.
이건 고야의 1823년(77세) 작품 '마법사의 안식일 '이며 '검은그림 연작' 중 하나로 부패한 교회와 무지한 군중을 비판하고 있다.
궁정화가의 직을 잃고 쫒겨난 고야는 궁핍했고 말년인 1819~1823년에는 전쟁과 혁명, 독재와 종교 탄압에 자신도 병들어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속에 살고 있었다. 마드리드 교외의 주택 '귀머거리의 집'에 거처하며 교회의 타락상과 삶과 권력에 대한 환멸, 인간의 광기와 폭력성 등을 주제로 검고 어두운 물감으로 1층과 2층의 석고벽에 유화 14점을 그렸는데 그 중 한 작품이다.
이 벽화는 고야가 죽은지 50년이 지난 후에야 벽에서 그림을 떼어내 보존 처리후 캔버스로 옮겨 오늘날 우리가 볼 수있게 되었다
고야가 죽기 1년전인 1827년(81세) 작품으로 '보르도의 Milkmaid'이다. 당시 고야는 프랑스로 망명해 보르도에 살고 있었으며 1828년 타국인 그 곳에서 사망한다. 이 작품은 늙은 자신의 삶을 보살피던 보르도의 목장 여인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이 처한 말년의 허망하고 기댈 곳 없는 신세가 여인의 모습에서 나타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인 벨라스케스의 '펠리페 4세 일가'
이 그림은 논란이 많은게, 장소가 궁전이 아닌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인데다가, 왕과 왕비는 거울속에서만 살짝 비치고 있고, 마가리타 공주가 주인공 인듯 하지만, 벨라스케스 자신의 초상이 너무 눈에 띈다.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이...하여튼 이 그림은 보는 관람자(왕과 왕비?)의 시각으로 그려진 거라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궁중에서 일하는 난장이 궁인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그러고 보니 고야의 '카를로스 4세 가족' 그림도 본인이 그림 속에 있는데 이것도 마찬 가지네??
이 그림은 마리아노 포르투니의 1867년 작품 '세인트 안드리우'이다. 잘 모르는 스페인 화가지만 그림이 마음에 들어 찍어봤다
이 그림은 Juan Luna의 1881년 작품으로 당시 화가의 단골 소재였던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인데 색과 빛의 처리가 마음에 든다.
그림과 관련한 로마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기원전 31년 당시 3두체제의 한 축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로마를 넘보고 있다고 원로원을 설득해 이집트 원정을 나선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해군을 구성해 옥타비아누스의 전함과 악티움 앞바다에서 처절한 해전을 벌였는데 결과는 참담한 패배로 끝나고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택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클레오파트라도 로마에 끌려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안토니우스를 따라가기로 결심을 하고 독사에게 스스로 물려서 죽음을 택한다. 이 악티움 해전의 결과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며 결국 초대 황제로 등극해 로마가 공화정으로부터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의 시대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 로마동전을 열심히 수집했었는데, 로마의 율리우스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사랑했던 이집트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은화도 함께 수집하려 하였으나 가격이 너무 높아 포기를 했는데 이 은화는 취리히의 한 옥션에서 수집가에게 $18,200에 낙찰되었다.
미술관 관람을 모두 마치고 밖으로 나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이 있는 시벨레스 광장까지 걸었다
가는길에 길가 공원에 있는 아폴로 분수대가 조명을 받아 무척 아름답게 보인다.
시벨레스 광장에 있는 시청이 강한 조명을 받고 밝게 빛나고 있다
시청 건너편의 건물
시벨레스 광장에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들어섰다. 스크린 도어 등 안전시설은 아직 부족하지만 모든 시설이 비교적 현대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는 것 같다. 외국에 나와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좋은 곳인지 금방 실감할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느 외진 곳의 버스 정류장을 가봐도 몇분 후에 몇번 버스가 오는데 좌석이 여유가 있고, 없는지도 알려준다.
곰과 딸기나무 동상이 있어 유명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하차해 밖으로 나오니 가랑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다. 솔 광장에서는 머무르지 않고 그냥 지나쳐 좁은 골목길을 조금 더 걸어가니 드디어 스페인 풍이 물씬 풍기는 마요르 광장이 눈앞에 들어왔다.
마요르 광장은 세비야의 스페인광장과 더불어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1619년 펠리페 3세때 건축된 바로크 양식의 붉은 직사격형 건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각종행사와 투우경기, 교수형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건물 1층의 회랑을 따라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점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어 관광객과 휴식을 취하러 나온 많은 시민들로 항상 북적이고 있다
광장 한가운데는 말을 타고있는 펠리페(필립) 3세의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마요르 광장을 나오니 왼편에 산미구엘 시장이 보인다. 100년이 넘는 전통시장이었으나 리모델링 되어 현대식 개방형 건물로 변모했고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에게도 큰 인기가 있는 곳이다.
골목길을 한참 걸으니 드디어 넓은 광장이 나오고 오른편으로는 보라빛 조명으로 빛나는 왕립극장이 보인다
드디어 마드리드 왕궁에 도착했다. 공원에서 왕궁을 배경으로 한 컷!
마드리드 왕궁은 1764년 국가행사를 위해 건설된 언덕 위의 궁전으로 2800개가 넘는 방이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유럽에서 가장 크며 스페인 왕실의 공식 거처이지만 실제 왕이 거주하는 궁전은 시외곽의 외딴 곳에 있는 사르수엘라 궁전이다. 건물이 아름답고 웅장하며 예술품과 골동품으로 가득한 방을 투어를 통해 관람이 가능한데 50여개의 방만 개방하고 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밤에 왕궁의 일부만 잠깐 보았지만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사람이 점으로 보일 정도로 웅장한 궁전이다
이것으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투어를 모두 마치고 숙소가 있는 세고비아로 향했다
이 여행기록을 보면 마드리드를 자세히 돌아보며 여행을 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저녁식사 후 비가오는 밤거리를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체 마냥 쫓아 다니다가 끝난 거 같은... 프라도 미술관 하나만 생각나는 그런 여행이었다.
마드리드 관광기념 마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