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 시가 있는 시평 6, 54 파주검단사에왔다.
파주 시민인 라남주 호남 향후회장의 청으로 파주에 있는 검단사에 가기 위하여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출발하여 금촌역에 하차한 이후에 검단사 주지스님이 차를 디기하고 있어 너무도 감동을 받아 검단사를 향해 갔는데 검단사에 도착해 보니 감단사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혜소승려에 대하여 그 행적을 조사헤 보아야 하지만 역사적으로 기록을 하는데는 자려에 등제된 역사를 논증해야 하기에 어려움이 있는데 혜소는 범패승이다. 오늘날에 전주 금마 출신 당시는 통일 신라 시대인데 성은 최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804년 애장왕 5년에 당나라 창주 신감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얼굴이 검다하여 흑두타라고 하였던 승려다. 810년 헌덕왕 2년에 당나라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하고 도의와 함께 편력했다. 도의가 신라에 귀국하자 종남산에 들어가 지관을 닦고 길거리에서 3년간 짚신을 삼아 행인들에게 보시를 했다고 한다.
흥덕왕 5년 830년에 귀국하여 상주에 있는 장백사에 있다고 지리산으로 가서 838년 (민애왕 1)왕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만나지 않고 혜소는 남령 옥천사(쌍계사)를 창건하고 조계 6조의 영당을 세웠다고 한다.
검단사는 신라 시대 문성왕 9년 847년에 혜소스님이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전무하여 전승된 기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래도 검단사의 존재를 기록한 자료가 남아있다는 것이 또한 중요한 의미를 부여 해야 한다. 850년 76세 법납 41세로 입적하니 헌강왕 이 진감이라고 호를 지었다.
불교음악에 전파를 위하여 노력하였고 당나라로부터 차를 유입시켜 차 나무를 보급하였던 진감 스님에 대한 시를 최치원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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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다물고 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했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는 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데를 가려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네.
물에 비친 달이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시냇물에 흥을 기울였네.
산은 性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네.
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간교한 마음을 끊음이 이것으로 증명되도다.
도는 다섯 임금의 찬양을 받았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을 드리우고 분명히 아름다운 부름을 거절했네.
바닷물이야 저대로 떠돌더라도 산이야 어찌 흔들리랴.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깎음도 없고 새김도 없었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아니하였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으셨네.
바람과 비가 그믐밤 같아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의 기둥이 갑자기 무너지니,
깊은 골짜기가 처량하고 뻗어나는 등라가 초췌하구나!
사람은 갔어도 道는 남았으니 끝내 잊지 못하리라.
上士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
법등이 바다 건너로 전하여 탑이 산 속에 우뚝하도다.
天衣가 스쳐 반석이 다 닳도록 길이 松門에 빛나리라.
검단사는 문산읍에 있었으나 1731년 장릉을 탄현으로 이전 장릉에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다. 1906년에 법당을 중수하고 법화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검단사는 실향민들을 위한 사찰이라고 한다, 검단사 주지스님과 대화를 하고 차를 마시고 법화경 7차 사경을 하는 동안 방편픔을 종결하고 검단사의 법화전에 침매하고 혜소 진간 스님을 친경했다.
진관 시인 2020년 10월 24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