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子去齊하실새 尹士 語人曰不識王之不可以爲湯武則是 不明也오 識其不可요 然且至則是 干澤也니 千里而見王하여 不遇故로 去하되 三宿而後出晝하니 是何濡滯也오 士則玆不悅하노라
高子以告한대 曰夫尹士 惡知予哉리오 千里而見王은 是予所欲也니 不遇故로 去 豈予所欲哉리오 予不得已也로라 予 三宿而出晝하되 於予心에 猶以爲速하노니 王庶幾改之니 王如改諸시면 則必反予시리라 夫出晝而王不予追也하실새 予然後浩然有歸志하니 予雖然이나 豈舍王哉리오 王由足用爲善하시리니 王如用予시면 則豈徒齊民安이리오 天下之民이 擧安하리니 王庶幾改之를 予日望之하노라予豈若是小丈夫然哉리오 諫於其君而不受則怒하여 悻悻然見於其面하여 去則窮日之力而後에 宿哉리오
尹士 聞之曰士는 誠小人也로다
<家苑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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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제나라를 떠나실 때, 윤사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대, “왕이 탕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밝지 못함이오. 그 불가함을 알고, 그런데 또 이른다면 이는 은택을 구함이니, 천 리하여 왕을 보았으나 뜻을 얻지 못한 까닭으로 떠났으되 사흘을 묵은 뒤에 주를 나가니, 이 어찌 머뭇거리는고. 사인즉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고자가 이로써 고하였는데, (맹자) 가라사대, “무릇 윤사가 어찌 나를 알리오. 천 리하여 왕을 봄은, 이것이 나의 하고자 하는 바이니, 뜻을 얻지 못한 까닭으로 떠남이 어찌 나의 하고자 하는 바이리오. 내 부득이 하였노라. 내가 사흘을 묵고서 주를 떠나니 내 마음에 오히려 빠르다고 여기나니 왕이 거의 고치시리니 왕이 만일 고치신다면 곧 반드시 나를 돌리시리라. 무릇 주를 나가는데 왕이 나를 쫓아오지 아니 하심에 내가 그런 뒤에 호연히 돌아갈 뜻을 두었으니, 내 비록 그러하나 어찌 왕을 버리리오. 왕이 말미암아 족히 선을 위하시리니 왕이 만일 나를 쓰신다면 어찌 한갓 제나라 백성만을 편안히 하리오. 천하의 백성이 다 편안하리니, 왕이 거의 고치시기를 내 날로 바라노라. 내 어찌 이 소장부 같으리오. 그 인군에게 간했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곧 성내어 발끈한 듯 그 얼굴에 나타나서 떠나버리고 해가 힘을 다한 뒤에나 묵으랴?”
윤사가 듣고 말하기를, “사는 진실로 소인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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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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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士 제나라 사람 干 구할 간 澤 은택 택, 곧 祿을 말함 濡 젖을 유, 더딜 유 滯 막힐 체, 머무를 체 高子 맹자제자로 제나라 사람. 悻 성낼 행, 발끈 성을 내는 모양
* 窮日之力而後 해의 힘이 다한 뒤에, 곧 ‘해가 다 떨어지고 난 뒤 어두컴컴할 때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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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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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제나라 도읍지를 떠난 뒤에 주읍에 사흘 동안 머물자 논객들 사이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도가 행해질 줄도 모르고 제나라 군주에게 갔다면 이는 밝지 못한 사람이고, 그 불가한 줄을 알면서도 갔다면 이는 합종연횡가들이나 다름없이 부귀영화나 구하러 다니는 사람일 뿐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설혹 도를 펴려고 천 리나 먼 길을 갔음에도 도를 펴지 못했다면 그만둘 뿐이지 무엇을 더 바라고 미적거리는지 선비 된 입장에서 불쾌하다는 뜻을 표했다.
공자가 도를 펴기 위해 주유철환을 할 때에도 오해를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자였던 자금(子禽)마저도 공자가 벼슬자리나 구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이지(子禽이 問於子貢曰夫子 至於是邦也하사 必聞其政하시나니 求之與아 抑與之與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자공(子貢)이, 도를 펴려면 벼슬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공자의 구함은 다른 유세가들이 자리를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공자는 천성이 온화하고 어질고 공순하면서 검소하고 사양함이 있기에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벼슬자리를 구하는 사람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子貢이 曰夫子는 溫良恭儉讓以得之시니 夫子之求之也는 其諸異乎人之求之與인저 - 『논어』 학이편
제10장). 공자가 30대 때 제나라 경공에게 거의 발탁될 뻔했으나 안영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음에도 훗날 안영에 대해 “사람과 더불어 사귐을 잘하고, 오래되어도 공경할 줄 아는 사람(晏平仲은 善與人交로다 久而敬之온여 - 『논어』 공야장편 제16장)”이라고 평가한데서 공자의 면목이 잘 드러난다.
맹자 또한 제나라에서 도를 펴고자 노력했으나 이뤄지지 않자 떠났다. 하지만 不忍人之心의 제나라 군주에 대해 못내 아쉬운 마음을 떨치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를 송나라 학자인 양시(楊時)가 잘 표현하고 있다. “제나라 왕이 하늘에서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성실하여 용맹을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고 색을 좋아하고 세속의 음악을 좋아함을, 다 곧바로 고하고 맹자에게 숨기지 아니 했음이라. 그러므로 족히 선을 할 만 하건마는(齊王이 天資朴實하여 如好勇好貨好色好世俗之樂을 皆以直告하고 而不隱於孟子라 故로 足以爲善이언마는)” 그러나 “그 마음이 그러하지 못하여 잘못 큰 것을 위한다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게 되면 이런 사람은 끝내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으니 어찌 선을 능히 하리오(若乃其心不然하여 而謬爲大言以欺人이면 是人은 終不可與入堯舜之道矣리니 何善之能爲리오).”라고 했다. 맹자의 깊은 뜻을 전해 듣게 된 윤사는 크게 뉘우쳤다.
출처 : 孟子易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