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섬 이름은 ‘볼뫼’였다고 했습니다. ‘산을 보다’, 혹은 ‘산에서 보다’라는 뜻이었겠지요. 그게 ‘볼매(乶梅)’로, 다시 ‘관매(觀梅)’로 바뀌었습니다. 보아야 할 것이 산(山)이 아니라 난데없는 매화(梅)가 돼 버린 셈입니다. 글말은 이렇게 변했지만, 입말의 이름은 여전히 볼뫼입니다. 전남 진도군 진도항에서 관매도로 향하는 여객선 조도 페리호에서 만난 허리 굽은 노인에게 ‘어디 사시냐’고 물었더니 ‘볼뫼’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섬 이름이 제멋대로 바뀌고 말았지만, 섬을 빛나게 하는 건 오래전의 이름대로 여전히 돈대산입니다. 섬 한복판의 해발 215m 돈대산의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능선에서 펼쳐지는 바다와 섬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돈대산의 동쪽 자락 아래 관매마을에는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 거대한 다랑밭 가득 메밀꽃이 펼쳐져 있고, 돈대산 아래 서쪽에는 단정한 돌담을 둘러친 평화로 출렁이는 관호마을이 있습니다. 섬에는 부드러운 물살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만들어낸 매혹적인 백사장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아름드리 곰솔이 가득해 그윽한 숲이 있었습니다. 타박타박 섬을 걷는 내내 펼쳐지는 경관에 반해서 누구든 손목을 붙잡고 끌어 데려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관매도에서 보아야 할 것은, 그러나 이런 풍경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돈대산 정상에서는 동거차도 앞바다, 그러니까 세월호를 삼켜버린 비극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노랑나비들이 팔락거리며 날아다니는 관호마을의 숲길에서 순한 것들의 환생을 떠올렸던 것도, 다랑밭마다 피어난 메밀꽃 앞에서 마른 눈물을 넉가래로 다듬어 모아둔 소금 결정을 생각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촉촉하게 내리는 가을비 속 관매도를 다녀오는 길에서 끈질기게 신발에 달라붙던 진흙과도 같은 질문 하나. 치유되지 않는 이 눈물겨운 비극이, 눈물과 절망을 넘어서 맑게 씻겨지는 날은 과연 올까요.
# 육지와 멀어진 섬, 관매도로 가는 길
하루 두 번. 진도의 섬 관매도로 들어가는 배는 진도항에서 떴다. 진도항은 팽목항의 새 이름이다. 진도읍에서 임회면을 지나 진도항에 이르는 18번 국도에 걸린 도로 이정표에는 아직 남아있지만, 차량용 내비게이터도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도에도 이제 ‘팽목항’은 없다. 세월호의 비극을 지워버리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했다면 오해다. 세월호 사고 1년 전부터 팽목항은 항구 매립작업을 거쳐 진즉 진도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던 것이다.
팽목항이란 이름은 사라졌어도 진도항에서 세월호의 비극을 비켜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도항에서 배를 기다리던 이들은 너나없이 컨테이너 박스의 세월호 분향소에 들렀다. 분향소에 들른 승객들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하릴없이 항구 앞의 등대에서 먼 바다를 오래 내다봤다.
세월호 사고로 육지와 까마득하게 멀어진 곳이 팽목항, 아니 이제 진도항에서 여객선이 뜨는 조도와 관매도다. 조도야 인구 3000여 명이 넘는 덩치 큰 섬이니 사정이 덜했지만, 노인들만 사는 데다 논밭도 손바닥만 하고 고기잡이마저 신통치 않아 육지와의 교류로 살아온 인구 200명 남짓의 작은 섬 관매도에는 직격탄이었다. 섬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뚝 끊겼고, 섬에서 캐낸 톳이며 모자반은 아무도 사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비극 앞에서 그들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관매도는 육지와 멀어졌다. 관매도는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빼어난 경관과 풍경을 품고 있었지만, 그 섬을 만나려면 이제 비극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그동안은 비극의 관문을 지나서 태연하게 경관을 말하고, 음식 맛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2년 5개월이 지났고, 이제야 관매도로 간다.
# 적막한 섬에서 지도 없이 길을 찾다
관매도는 진도항에서 24㎞ 떨어져 있다. 육지의 거리로 환산하면 멀지 않은 거리지만, 섬의 거리는 배 시간으로 재는 법. 관매도는 상조도와 하조도를 잇는 조도대교 아래 협만을 지나 남해 먼바다로 접어들어 1시간 30분 만에 당도하는 먼 섬이다. 관매도로 가는 뱃길은 다도해의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바다를 지난다. 조도와 관매도 일대의 바다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란 이름값을 넉넉히 하고도 남는다. 촉촉한 가을비가 흩뿌리는 배 위에서 본 다도해의 바다는 수묵화 속의 풍경이었다.
조도의 창유항에 손님 일부를 내려주고 배는 더 먼 바다로 향했다. 모도와 대마도를 지나자 멀리 동거차도와 그 뒤로 서거차도가 펼쳐졌다. 두 섬 사이의 해역에 거대한 배 두 척과 크레인이 우뚝 서 있다. 침몰한 세월호를 인양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세월호 사고가 실존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갑판에 서 있던 이들은 모두 그쪽을 향해 섰다. 마치 묵념이라도 하듯…. 그건 바로 관매도로 가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섬의 선착장은 여객선이 들고날 때마다 북적거리게 마련. 그러나 관매도 항구는 조용했다. 배로 싣고 들어온 것도, 싣고 나가는 것도 거의 없었다. 섬에서는 이렇다 하게 나는 것도 없고, 무얼 사들일만 한 경제도 없으니 그랬다. 항구에 딱 하나밖에 없는 구멍가게도, 톳을 넣은 짜장면을 낸다는 중국집도 다 문을 닫아걸었다.
승객을 내려놓고 배가 떠나가자 선착장과 마을에는 길을 물을 사람마저 없었다. 하지만 묻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섬의 빼어난 경관이 발길을 저절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 파도소리를 끼고 이어지는 짙은 솔숲
관매도는 두 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다. 관매 선착장을 중심으로 동쪽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곳이 관매마을이고, 서쪽의 자그마한 포구를 거느리고 있는 게 관호마을이다. 관매마을은 그 마을보다 더 작은 장산편마을을 거느리고 있었다.
섬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관매마을 쪽의 관매 해수욕장이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았다 해도 배에서 내리면 십중팔구 선착장에서 가까운 그곳부터 찾아가게 된다. 해수욕장에는 부드러운 파도가 연신 밀려드는 고운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달랑게가 먹이활동을 하면서 남겨둔 동글동글한 모래 구슬이 해변에 가득했다. 섬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이 거기 있었다.
곱고 단단한 모래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건 모래톱 뒤편의 곰솔 숲이었다. 초지 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뤄 자랐다. 숲 사이로 오솔길이 놓여 있었는데, 숲의 규모가 어찌나 크던지 거미줄같이 이어진 숲길을 따라 걷다가 몇 번이나 길을 잃을 정도였다. 곰솔이 뿜어내는 기운으로 숲길은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바다와 솔숲의 경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는다. 한쪽에선 부드럽게 해변을 핥는 파도소리를, 다른 한쪽에선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를 끼고 걷는 기분이라니….
내친 김에 솔 숲길에서 관매도의 명소로 꼽히는 방아섬까지 가는 트레킹 코스를 이어붙여 걸었다. 방아섬은 관매도와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작은 섬. 섬 정상에는 마치 버섯 형상의 바위가 서 있다. 방아섬으로 이어지는 길은 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이 길의 주인은 방아섬이 아니라 ‘길’ 그 자체다. 두 뼘 남짓의 흙길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덩굴식물이 휘감은 난대림의 숲을 지나기도 하고, 어둑한 대숲을 관통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보석 같은 길. 이 길에 오르면 누구든 몸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 고단한 생계의 밭에 일군 메밀꽃 물결
방아섬 트레킹 코스를 되돌아나와 관매마을 끄트머리의 장산편마을 쪽으로 이어진 길로 들어섰다. 숲을 벗어나자마자 탄성이 절로 터졌다. 마을 주변에 가득 피어난 메밀꽃의 거대한 물결 때문이었다. 관매마을과 장산편마을 사이에는 오목한 지형을 따라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데, 거기에 심어진 메밀이 일제히 꽃을 틔워 올렸다. 계단식 다랑밭에도 층층이 메밀꽃으로 가득했다. ‘장관’이란 수식어는 바로 이런 곳에다 붙이는 것이겠다.
관매도에서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관매마을 쪽 평지에서는 논농사를 짓고, 장산편마을 구릉의 다랑밭에는 고구마를 심어 거뒀다. 지금은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어 폐교된 관매초교의 학생 수가 400여 명을 헤아릴 때 얘기였다. 바다를 곁에 두고 있지만, 고기잡이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섬 사람들은 다랑밭을 일궈 거둔 고구마로 생계를 이었다고 했다.
관매마을 전직 이장이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 관매도의 초등학생들이 자매결연을 맺은 연세대의 초청으로 서울견학을 갔더란다. 이른바 ‘낙도 어린이 초청’ 행사였다. 서울에 도착한 첫날, 한 대기업이 아이들에게 양식 식사를 제공했는데, 섬 아이들이 음식이 낯설어 그걸 먹지 않더란다. 모두 수저를 놓고 있는데 억지로 손을 댄 아이들도 배탈이 나고 말았다. 궁리 끝에 교장 선생님이 고구마를 박은 보리밥을 지어와서 겨우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다랑밭은 묵고 버려졌다.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고 남은 이들도 농사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든 탓이었다. 묵은 밭에다 섬 주민들이 4년 전부터 봄이면 유채를, 가을이면 메밀을 심었다. 수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경관만을 위한 농사였다.
해마다 메밀밭은 늘었다. 지난해까지는 평지에만 메밀을 심었는데, 올해는 다랑밭까지 메밀꽃밭으로 가꿨다. 그 결과 올해 섬 안에 가장 화려한 꽃밭이 가꿔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보러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관매도에 출렁이는 메밀꽃은 지금 보아줄 사람 없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 관매도 최고의 경관을 보다… 돈대산
솔숲과 메밀꽃 이야기를 앞세우다 보니 뒤로 미뤄지고 말았지만, 관매도 최고의 경관은 섬 한복판에 솟은 돈대산을 오르고 내리는 길에서 만날 수 있다. ‘볼뫼’라는 섬의 본래 이름이 품고 있는 ‘뫼(山)’가 곧 바로 돈대산이다. 돈대산의 능선은 관매마을과 관호마을을 잇는다. 돈대산이 섬 한가운데 있으니 관매마을에서도, 관호마을에서도, 또 선착장에서도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무릇 풍경을 보는 데도 순서가 있는 법. 돈대산의 높이가 찍어내는 선명한 그림 두 장은 순서대로 보아야 한다. 인적 드문 관매마을 쪽에서 돈대산으로 오르기를 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매마을 쪽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메밀꽃밭을 각도를 바꿔가며 줌아웃으로 내려다 볼 수 있고, 산정을 넘어서면 바다로 길게 뻗어 나간 관호마을 쪽의 해안선을 극적인 장면전환처럼 만날 수 있다. 관매마을에서 돈대산을 오르는 길에서는 마을의 메밀밭과 그 너머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물러나서 고도를 높여 보는 메밀밭 전경의 느낌은 아래서 볼 때와는 아주 다르다. 푸른 바다를 두르고 있는 메밀꽃 핀 다랑밭은 조각보와도 같다.
이런 경관이 지루해질 때쯤 돈대산 정상에 닿게 되는데,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이내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관호마을 쪽의 해안선이 눈에 들어오는데, 섬의 한 자락이 수직의 직벽을 이뤄 먼 바다로 길게 뻗어 나간 모습이 압권이다. 산 이쪽과 저쪽의 풍경이 도무지 하나의 섬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관이 아주 다르다. 해안의 바닷바람을 막는 돌담인 우실 안쪽에는 관호마을이 있다. 관호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지붕은 주황색이고 벽은 흰색인데, 이 모습을 돈대산 자락에서 내려다볼 때 더 이국적이다.
돈대산에서 해안으로 내려서면 거센 해풍으로 초록의 풀들이 빗은 머리처럼 누워있는 능선을 만난다. 거기서 해안을 치는 거친 파도를 내려다보면 어디 이국 어디쯤의 해안에 와있는 듯하다.
해안을 끼고 이어지는 이 길을 따라 옥황상제의 공깃돌이라는 ‘꽁돌’을 거쳐 롤케이크를 칼로 잘라낸 것 같은 지형에 놓아둔 ‘하늘다리’까지 트레킹을 다녀와도 좋겠고, 투박한 돌담을 두른 관호마을의 골목을 느긋하게 둘러봐도 좋겠다.
관매도에서는 어디든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해도 훌륭한 경관을 만날 수 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안내는 필요치 않다. 관매도에서 아쉬웠던 것은 단 하나. 매혹적인 풍경을 품고 있는 이 섬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