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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와 소리와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성도(삿 6:7-12)
글 : 김 강석 목사
세상에는 수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사람소리, 짐승소리, 우는 소리,
웃는 소리 등등의 소리의 그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왜 소리를 만들어 놓았을까?
그리고 만약 소리가 없었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
소리로서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면서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을 해 봅니다.
문득 어릴 적 시골서 자란 때가 생각이 납니다. 저는 소시적 때에 소를 끌고 산으로 올라가 풀을 먹이는 것이 일과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산에서 소먹이는 친구들과 놀이로 잣 치기나 아니면 다른 게임에 빠져서 가끔 소를 잃어버릴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전라남도말로 딸랑 딸랑거리는 핑갱이라는 소 목도리에 달린 종소리를 듣고 방향을 잡아 찾아내곤 했었습니다.
이와 같이 결국, 동물의 세계나 인간 세상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수단은 바로 그 소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고
이것이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이고 순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전14:10절 이하에서
"10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 라 " 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무기로 쓰였던 항아리 깨지는 소리, 나팔 소리, 외치는 소리에서의 그 ‘소리’ 가 함의 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소리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콜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열왕기상 14:6절과 열왕기하 6장32절에 똑같이 쓰여 있는데 거기를 보면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거기에서 그 단어는 모두‘심판을 위해 다가오고 있는 발자국 소리’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1절과(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 창세기 3장 8절에서도 (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 ) 그 날에 하나님? 즉 구별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어두움과 빛이 구별이 되는 그런 ‘날’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별을 성경이 심판이라고 합니다.
사 13:6절과 요엘서 1:15절에서도 그 날이 멸망의 날,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심판과 멸망이 진행되어지는 가운데 창조가 함께 진행이 되어 지고 있는 것이
창세기 1장의 역설적으로 거꾸로 흐르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사기에서도 그 “소리” 에 의해서 미디안이 심판을 받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성을 할 때에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에 유일한 무기로 쓴 것도 ‘소리’ 였습니다.
그 소리로 여리고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대적을 무너뜨릴 때에 쓰이는 무기가, 이렇게 종종 소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리’의 시작이 창세기 3장 8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의 그 소리처럼, 심판을 위한 여호와의 강림의 소리가 아주 원색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특히 출 19:16~19절을 보게되면 "16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섰더니 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을 하시는데 나팔 소리가 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소리와 음성이 이렇게 구별 되어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 빛의 하나님으로부터 불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려워 떠는 백성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로 하나님께서 소리와 함께 강림을 하시자 흑암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피해서 숨고 거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모세는 지금 창세기의 그 심판의 하나님을 그대로 출애굽기로 옮겨와서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반드시 그렇게 심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돌판, 십계명 돌판, 그것을 주러 내려오시는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 그 심판의 강림에 관해서 기록이 되어 있는 것 중 가장 자세한 기록이 에스겔서1:22~25절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에스겔이 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은 스랍들의 힘으로 움직여 가는, 그룹들의 힘으로 움직여가는 수레인데 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의 보좌에는 영광을 가지신 분이 좌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계 1:10-15절 보게되면
'10 주의 날에(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에서 무슨 소리가 미디안을 부셨습니까? 나팔소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소리와 함께 임재하시는 주님이 ‘주의 날’ 에 임재하시는데 뭐 하러 오신다는 것입니까? 계 1:7절에 기록하고 있는 말씀처럼 그 소리의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8절의 그 날의 하나님은 그 소리로 오시는 하나님으로 다 심판의 하나님을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선하고 악한 것을 이렇게 구별(judgement)을 말하는 것이지, 징벌(punishment)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별에는 궁극적으로 구별 된 것 중에 악한 것을 멸해 버린다는 것을 전제되어 있는 것이지만,
심판은 일차적으로 구별(judgement)입니다. 이건 선한 것이고, 이건 악한 거야! 이게 심판 말입니다.
모세는 창세기 3장 8절에서 그 소리의 하나님을 ‘그 날의 하나님, 루아흐 하 욤’ 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세기 첫째 날의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덮으시고 그것들을 분리해내고 구별을 해 내시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심판입니다.
이렇게 분리해 내는 것, 물과 뭍, 빛과 어두움, 낮과 밤, 궁창위에 물과 궁창 아래의 물, 이렇게 분리해 내는 것, 그게 심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적 주권에 의해서 모든 것을 구별해 버리십니다. 그것을 심판이라 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의견은 절대 가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그 하나님의 심판적 주권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지혜를 하나님처럼 갖겠다는 것이 마귀적 발상이었습니다. 그게 마귀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 걸 선하다고 하고, 악하다고 하는 걸 악하다고 그렇게 사는 것은 내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게 못 살겠다라고, 나도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나도 내 의지대로 판단할거야! 이게 악입니다.
그걸 죄라고 하고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꾀었습니다. 왜 니가 하나님에게만 순종하면서 살아야 돼!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선악과 먹으면 선악을 아는 지혜를 니가 알게 된다! 이렇게 꼬셨습니다. 그게 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시고 그것을 심판하셔서 소멸해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걸 부수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그럽니다.
그냥 세상의 선악의 판단을 자기가 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악한 것이니까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규정해 놓은 선과 도덕과 윤리와 이런 것들을 잘 지키면서 열심히 살다가 이 세상 떠나면 잘 사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피조물의 자기 자리이탈, 그것이 죄이고 악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실체를 진짜로 볼 수 있고 그것을 그 실체를 보고 이게 참이다! 거짓이다! 를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걸 계 5:6절에서 일곱 개의 눈이라고 표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은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함으로 말미암아 빛을 창조하시고 심판과 구별을 이루셨던 그 하나님의 신, 르와흐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실체를 보실 수 있는 분이고, 그리고 그분만이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분이다, 라는 것이 이 요한계시록에도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큰 용사여! 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끝은 어떻게 됩니까? 큰 용사는 하나님의 의해 심판을 받아 135,000명 앞에 300명으로 없음으로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새 창조의 구원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용사됨에 추구가 하나님의 의해 심판(침=치는 것)을 받는 그것이 바로 승리다! 가 기드온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을 해서 그들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이다! 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의 ‘그날의 하나님, 루아흐 하 욤’ 이 강림하셔서 흑암으로 숨어 버린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시고 다시 새롭게 창조해 내시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심판을 당하는 자를 오늘본문 12절이 용사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용사를 부수시는 하나님, 즉 선악과 따 먹고 인간이 지금 용사의 자리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걸 부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 기드온의 이야기입니다.
요엘서 2:1~3절 보세요?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 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
이것은 창세기3:8절의 이야기와 거의 똑 같은 단어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역시 나팔 소리와 함께 그 날의 하나님께서 강림을 하셔서 어둡고 캄캄한 이스라엘을 불로 심판을 하시는데
그들이 있던 곳이 에덴동산에서 황무한 들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요엘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날개달린 메뚜기 떼를 보내셔서 전부 초토화시켜 버리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이고, 무익한 자입니다! 라는 이 고백을 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들에게 스랍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 하나님의 사자가 가서 뭘 하느냐하면 그들의 삶 속에서 깨어져야 할 것들을 깨어버리고
그들 속에 하나님이 심어 놓은 새 것을 오롯하게 드러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속에서 반드시 심판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가 심판을 다 받아 살려 놓은 자들은 그 예수가 심판을 다 받아 그들 속에 심어 놓은 생명의 씨앗, 그 씨앗을 남게 하기 위해 그걸 둘러 싸고 있는 옛 육신의 죽음, 심판의 그 과정을 반드시 통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아닌 자들은 나중에 그 메뚜기 때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하도록 그냥 놔도 버리는 것입니다. 유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전에 택한 성도만큼은 이 세상 속에서 그러한 심판, 작은 심판들을 경험 하면서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경험하며 배워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그 날의 하나님, 그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어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요엘서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이미 메뚜기 떼에 의해서 박살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본문인 사사기에서 지금 이스라엘이 미디안에 의해서 박살 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직 소리가 안 왔습니다.
요엘서 1:2-4절 에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메뚜기 때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박살 낸 상태입니다. 보세요? 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 지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 지어다 --- 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
그 메뚜기 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대적 미디안도 하나님이 보냈다! 그러십니다.
그런데 요엘서 2:25절 보면
"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
하나님이 보내셔 놓고 그 메뚜기 때에 의해 피해를 다 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피해를 받은 자 그들에게만 회복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그런 것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만 메뚜기 때를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메뚜기 때에게 당한 그것을 다시 몇 배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황충, 메뚜기 떼는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하늘 군대의 대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계 9:2-3, 7~11절에 나옵니다.
무저갱이 열리고 그 속에서 마귀의 군대가 올라옵니다. 그게 황충입니다. 그런데 그걸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도 뱀을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장중 하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내진 대적 메뚜기 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세력이 일차적으로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내 안에 하나님께서 마귀의 세력을 풀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로마서 1장에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살짝 거두워서 그냥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강팍하게 때로는 놔두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야 되는지를 가르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귀이구나! 내가 미디안이구나! 그걸 깨닫아 알게 하시며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고백을 하는 것이 135,000명 인줄 알았던 내가 300명으로 줄여드는 것이고, 그렇게 내가 300으로 줄여드는 그 상태가 135,000 이었던 나를 치는 하나님으로 공격해 오시는 것입니다.
롬 7:18절 보세요?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이것은 성도인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아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악만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미디안에게 이스라엘을 내어 주셨다는 것이 바로 이 모습인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소리가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 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선악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된 그런 내 안에서 말씀에 의해서,
복음에 의해서, 심판이 일어나서 그 옛 사람적 육적 자아가 갈기갈기 찢기게 되고 삭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 여정길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것이 하나도 거하지 않는 내 속에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마귀의 세력이 가입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마귀의 세력은 그 ‘나’라는 옛 사람적 육적 자아라는 신을 중심으로 그 ‘나’라는 신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사고하고 행하게 하는 세력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자의 생각에 즉 장작을 도끼로 쐐기를 박아 벌려 놓은 것처럼 마귀의 세력이 우리의 생각을 쐐기를 박아 벌려 놓으므로써 신자의 생각을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도록 분산 시키는 것이 마귀의 세력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게 나의 옛 사람적 육적 자아인 "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원래 선악과 따 먹은 나입니다. 나만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선택하고 나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귀 세력의 침입은 때로는 고난으로 올 수도 있고, 그와는 정 반대로 교만의 자리에 앉게 하는 그런 세상의 풍요로도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나’의 인기와 평판과 영광과 가치를 챙기게 하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걸 아는 성도가 진짜 실력자이며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모습이고,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악으로 드러내시고, 그것을 심판하여 소멸해 버리심으로 안식을 완성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삶은 결국 ‘나’ 자신을 해하는 고단한 인생이라는 것이고, 거기에서 해방이 되어서 하나님의 종으로 붙들리는 것이 진짜 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그냥 붙들려 버리고 무장 해제 당하는 것, 그게 진짜 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거기에서 승리를 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먼지와 같은 것임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135,000명 앞에서의 300명으로 낮아지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실패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넓은 문과 넓은 길을 찾는 보편적인 신자들은 그런 신자의 모습에 실망하여 성경과 다른 길을 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역설적으로 그걸 승리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대적인 황충과 대척점에서 살아내야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승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황충의 삶이 깨지고 ‘티끌’의 삶,
‘나 아무것도 아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식이고, 그게 심판의 열매이며, 그게 새 창조의 완성 지점인 것입니다.
그것을 사사기의 그 기드온 이야기에 대입을 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또 다시 악을 행합니다.
그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의 마귀적 본성에 의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안으로 미디안이라는 대적들을 침투시켜 버리십니다.
사사기의 전개 내용이 전부 그러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은 그래서 몇 년간 대적들의 손에 점령을 당하게 됩니다.
황충의 지배 하에서 황충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악한 자들을 더 악하게 만드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붙드심의 손길을 잠깐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로마서 1장의 ‘그냥 내 버려두심’ 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그러한 마귀적 삶 속에서 자신이 바로 예수를 죽인 마귀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기드온의 용사 300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약함이 바로 강함을 부수는 승리라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깨우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오롯하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마귀이며, 내가 예수 죽인 자입니다’ 라는 그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300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며, 그 자체가 바로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게 미디안 135,000명을 때려 죽이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왜냐하면 미디안 용사 135,000명이 바로 나 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 역사 속 인생 속에서 내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배설물인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성도의 삶에 황충을 보내는 미디안을 보내는 일인 것입니다.
그 때에 성도는 그 일을 통하여 반드시 300 명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300이군요! 나는 없음이군요! 하나님 없으면 나는 도저히 내 힘으로 전쟁을 할 수 없는 존재이군요! 라고 고백되어지는 것이 곧 소리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소리로 어떻게 전쟁을 합니까?
그걸로 어떻게 전쟁을 하냐구요?
그러니까 그게 "나”군요! 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왔던 세례요한이 세상 권세에게 잡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승리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셨던 예수가 세상권세에 잡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승리인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인 예수가 이 땅에 소리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소리가 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더니 거기에서 진짜 승리가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에 전쟁 법칙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바로 그 소리로 삼백의 자리로 밀고 내려가신 것입니다.
심판하시면서, 작은 심판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은 그 속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 속에서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 본래의 낮아짐의 자리에 서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이 신자들을 사단의 활동으로부터, 또는 재앙과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를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욥조차도 사단이 치도록 허용을 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욥의 친구들이 도대체 아무런 까닭도 없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잘못한 게 있으니까 재앙을 받는 것이 아니냐고 욥에게 지적을 했던 것입니다.
욥은 그에 대해서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합니다.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고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면 재앙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인간의 가치가 정해지고 하나님은 그 가치 위에 차등 있는 상을 내려야 한다는 그런 발상이 바로 인간 중심의 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욥에게 마귀를 보내서 겉으로는 착하고 순전하여 흠 잡을 데가 없는 욥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십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300이라는 보잘것 없는 배설물로 폭로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욥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납작 엎드려서 항복을 합니다.
그게 심판이며, 그걸 성화의 절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가 없는 것 같은 재앙이 닥치거나 고난이 닥치거나 하면 우리는 곧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나’ 라는 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을 뿐임을 배워 알게 됩니다.
내가 바로 황충이며, 내가 바로 마귀이며,내가 바로 미디안이며, 내가 바로 예수 죽인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를 붙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미디안인 내가 소리로 오신 연약한 모습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죽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속에 심판의 소리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며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전쟁은 칼이나 창이나 병거 같은 무기에 의해서가 아닌 소리로 하는 전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강한 자가 되어서, 내가 변함으로, 내가 성숙되어서, 그것을 무기로 이기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 황충의 전쟁에서, 미디안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자라는 올바른 자아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도저히 승산이 없는 약자의 모습으로 대적 앞에 서게 되면 거기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부인인 것이며 그것 자체가 바로 승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온 세례요한이 세상 권세에게 붙들려 죽는 것이며, 하나님이 하라는 말만 하셨다는 하나님의 소리이신 예수가 세상 권세에게 잡혀 죽는 것입니다. 300입니다. 그런데 그게 승리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그냥 자기 자신이 300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 나를 맡기는 자로 부수어져 가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소리의 전쟁이며, 소리의 심판이며, 소리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의 사역이 어떠했습니까? 기적을 일으키고, 불로 제물을 살라버리고, 마른하늘에서 비오게 만들고, 바람 소리, 지진, 큰 소리 불이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강한 외형적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도 북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외형적인 능력으로 135,000명으로, 일을 했더니, 오히려 그러한 큰 역사 뒤에 엘리야가 오히려 이세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크고 강한 외형적 능력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엘리야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일 안하신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일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크고 강한 바람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고 불도 아닌 세미한 소리로 오신 하나님의 심판자, 예수님께서 그 날의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때마마 닥카’ 미세한 소리로 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팔소리, 외치는 소리, 그러나 그게 진짜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자는 이사야서 53장에 기록 된 모습으로 병거로, 철병거로, 마병으로, 칼과 창으로 오신 게 아니라 소리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그 날에 그 빛으로 오신 그 하나님이 그 빛이 임하는데 어떤 빛이 일어 나냐하면
구별이 되어 한 쪽은 전부 멸해지는데 그와 반면에 다른 한 쪽은 그 빛이 치료하는 광선으로 비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그 현실이 똑 같이 일어나게 되는데 우리는 지금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 그 새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두르고 있는 것은, 죽어야할 옛 몸 둥아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 날에 하나님이 그 빛의 하나님이 확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 안에서 죽어야 할 것들이 불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숨겨진 작은 새 생명이 회복이 되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새 창조라고 그러고 다른 말로 그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이 옛 사람이 죽어 가면 우리는 점점 역사 속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 가치 없는 존재, 무의한 존재, 부인 당하는 존재, 그리로 밀려 내려가는 것입니다.그리고 결국에는 기드온 용사 300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과 인기 등이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점점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 라는 존재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따라서 자기부인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이미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이고 우리는 ‘나’가 없어진, 다른 말로 300의 자리로 내려가 버린 자기부인의 현실을 점점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내 속에서 격발 된 열심이었던 사람들은 세상을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속에 부으시는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살아야 하는 자이기 때문에 나는 내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나를 위장하고 포장하기 위해 내 놓았던 가짜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열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예수 죽인 자이구나! 라는 그 고백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작은 심판들을 경험하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자로, 티끌로 치료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항아리와 나팔로 서는 것입니다. 소리로 서는 것입니다.
그게 미디안과 기드온의 소리의 전쟁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진리로, 그 복음의 소리로 각각 그 자리에 서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