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키워 生計에 보탠 육영수
박정희 리더십의 비결은 '청렴한 군인'.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청렴한 군인었다는 점이다. 머리 좋고 지도력 있는 사람이 깨끗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 특히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동양에선 지도자가 청렴성을 갖추지 못하면 만사가 무효이다. 세월호 침몰을 계기로 한국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는데, 지도층이 깨끗해야 용감해질 수 있다는 원리를 놓치면 성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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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7사단장 시절 박정희 준장의 법무참모는 박 대통령 밑에서 법무장관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申稙秀(신직수) 중령이었다. 군법회의는 양곡 관리 관련자들에게 重刑(중형)을 선고했다. 군법회의의 선고는 지휘관이 그 刑量(형량)을 확인해야 발효된다. 7사단장 박정희는 한 달이 지나도록 결재를 미루었다. 하루는 참모들과 만나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고민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내가 이 중령이 빼먹었다는 양곡 400가마의 내역을 보니까 저 혼자 먹은 것은 얼마 안 되더군. 거의 다 뜯기고 상관들에게 바친 것이야. 아마도 내가 그동안 부대에서 가져다 쓴 양곡도 다 합치면 꽤 될 거야. 그런 이 중령을 감옥에 보내자니 가슴이 맺히는군.”
군수참모 윤필용 중령이 “각하의 고민을 잘 알겠습니다. 어떻게 선처할까요”라고 물었다.
“이 중령이 집을 팔든지 해서 변상시키고 파면만 시키는 것이 어떨까?”
윤필용에 따르면 당시 양곡을 부대에서 떼먹는 일은 구조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장교들 월급으로는 담뱃값도 못 댈 정도였습니다. 장병 급식용 양곡에서 쌀을 빼내가는 관행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쌀가마가 여러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축이 나 막상 사병에게 전달될 때는 쌀가마니를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단장들은 ‘눈감아 줄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재수 없이 발각되면 난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지요. 朴 사단장은 이 문제를 양성화했습니다. 쌀 한 가마에 2kg씩 떼 내도록 했습니다. 1kg은 사단 운영비나 장교들에 대한 생활보조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병참부장에게 모아 주어 결손이 난 양곡을 보충하도록 했습니다.”
1958년 3월 박정희 7사단장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때도 ‘생명의 은인’ 백선엽 육군 참모총장의 도움이 있었다. 경무대로 올라간 소장 진급자 명단을 본 郭永周(곽영주) 경무관(대통령 경호실장격)이 백 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박정희 장군의 신원조회에 左翼(좌익) 활동 경력이 나타났습니다.”
백 대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박 장군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합니다.”
박정희는 肅軍(숙군)에 걸려 1년 남짓한 공백이 생겼지만 육사 2기생 가운데는 가장 먼저 소장으로 진급했다. 백선엽, 장도영, 송요찬 같은 군 수뇌부 인사들이 그의 인간됨을 이해하고 덮어 주고 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사람을 대할 때 좋고 나쁘고가 너무 분명한 면이 있었다. 당시 직속상관은 吳德俊(오덕준) 3군단장이었는데 박정희는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오덕준이 전속 부관 한병기 대위에게 전화를 걸어 “나 거기로 갈 테니 사단장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전해줘!”라고 했다. 박정희는 “나 없다고 해!”라고 했다. 한 대위가 다시 군단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군단장은 출발한 뒤였다. 박정희는 휑하니 사무실을 나가면서 내뱉었다.
“참모장 보고 접대하라고 해!”
7사단에 대한 국정감사가 있을 때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사단장을 상대로 꼬치꼬치 따졌다. 감사가 끝난 뒤 부하들을 모아 놓고 박정희는 자유당 의원들을 擧名(거명)하면서 “저것들이 무슨 국회의원이냐”고 경멸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참모장더러 자유당 의원들을 접대하라고 시키고 자신은 李哲承(이철승) 등 야당 의원들을 모시고 나가 접대했다. 그 뒤로도 박정희는 이철승 의원을 좋아했고 이 의원도 박정희를 높게 평가했다.
1958년의 4대 총선 때 청년 정치인 金大中(김대중)은 7사단이 있는 인제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등록하려고 했으나 官權(관권)의 방해를 받아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자유당 후보와 맞섰다.
<이때 우연히도 인제에 박 대통령이 7사단장으로 주재하고 있었다. 당시 그와 부정 선거와는 관계가 없던 것이지만 나는 정부와 여당의 소행이 너무나도 괘씸해서 이같은 실상을 그에게 호소해 보려고 군청에서 20m쯤 떨어진 사단장 관사를 찾아갔다. 박 사단장은 不在中(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했지만…>(《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인용)
그 뒤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 사이의 일 대 일 對面(대면)은 한 번도 없었다.
1958년 5월 박정희는 서울의 충현동에서 신당동으로 이사했다. 대지 100평, 건평 30평쯤 되는 일본식 단층집이었다. 이 집을 사는 데 든 450만 환을 만드는 데는 7사단의 연대장들과 포병단장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사단장 정보비가 나오면 참모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자기 가정의 생계에 대해서는 무책임할 정도로 무관심하였다. 참모 중 한 사람이 독일산 사냥개 와이마르너 암컷을 육영수에게 주었다. 육영수는 이 개를 키워 새끼를 낳으면 시장에 내다팔아 생활비에 보탰다. 윤필용 중령이 “저 개가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주세요”라고 미리 부탁을 해놓았는데도 다 팔아버리더라고 한다.
7사단장 시절에도 육영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인제로 와서 남편과 함께 있다가 가곤 했다. 부부 싸움을 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박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이었다. 7사단의 어느 장교 아내가 육영수에게 그동안 있었던 사단장의 여성 편력을 고자질하곤 했다. 어느 날 그 장교집에서 집들이 회식이 있었다. 윤필용 중령이 사단장을 모시러 갔다. 박정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안 가겠어. 그 여편네는 이상한 여자 아냐? 자기 남편 감시나 잘 하지 왜 남의 남편을 감독해!”
1958년 10월 3일 박정희와 첫 부인 김호남 사이의 첫딸 박재옥이 전속 부관 한병기 대위와 결혼식을 올렸다. 종로 동원예식장에서 있었던 결혼식에서 주례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따랐던 元容德(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었다. 박정희는 이날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한 것 같았고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박재옥의 기억).
박재옥은 이부자리 한 채와 백금반지 하나가 婚需(혼수)의 전부였다고 기억한다. 결혼식 의상도 따로 짓지 않고 한복으로 때웠다. 한병기는 반지도 구리로 하자고 했다. 보석으로 만들면 가난으로 팔아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이것만은 박재옥이 반대했다. 신혼부부는 경주로 여행을 갔다. 박재옥은 어머니가 경주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혹시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