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국외자
(행22:30-23:11)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1) 1964년에 국외자들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한 편 상영 되었습니다. 장 뤽 고다르라는 유명한 감독의 영화인데 세 명의 남녀 젊은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영화를 본 적은 없습니다만 이 영화에 대한 어느 리뷰에 실린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을 하나 보게 되었어요. 놀라서 두 손을 벌리고 저지하시는 경비 아저씨를 아랑곳 하지 않고 두 남녀 주인공들이 루브르 박물관 복도를 질주하는 장면입니다. 박물관을 몇 초 안에 주파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충동적으로 달리기 경주를 하는 거예요.
영화의 제목인 국외자들이라는 말과 이 장면이 겹쳐지면서 어렴풋이 감독의 생각이 짐작이 가는 겁니다. 감독의 생각으로는 세계적인 미술 작품들이 양 옆으로 줄지어 전시되어 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복도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국외자들인 거지요. 장난기 어린 달리기 충동 앞에서 고귀하고 값진 작품들이 지니는 미술적 가치는 한 옆으로 내동댕이처지는 겁니다.
국외자라는 단어가 세계 문학계에서 특정한 캐릭터를 지닌 인간상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은 전적으로 19세기 러시아 문학가들 덕택입니다. 주어진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뜻을 펼치지 못한 채 헛되이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정치와 사회의 시스템에서 밀려난 자들이고 아웃사이더가 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고다르 감독의 국외자들은 확연히 그 분위기가 다릅니다. 아웃사이더임에는 다름없어요. 그러나 이 주인공들에게서는 국외자로서의 그들의 처지가 우울함에 지배 되는 대신에 유쾌한 장난기에 의해 뭔지 모를 자유로움으로 승화 되어버립니다. 그들의 장난기 앞에서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보는 산들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국외자가 아니라 스스로 뛰쳐나간 국외자들인 셈이지요. 세상이 정해 놓은 가치들의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국외자들 말입니다.
2) 오늘 본문에 또 다른 유형의 국외자가 등장을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참으로 독특하고 차별화된 의미의 국외자입니다.
분노하여 죽이려 달려드는 유대인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변론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직전의 변론 때와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됩니다. 바울이 입을 열어 한 마디 운을 떼자마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부하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강력한 비난으로 맞섭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분위기가 한 순간 험악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대제사장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라는 저주를 퍼부어 댔으니 안 그렇겠습니까? 곁에 섰던 사람이 바울의 무례함을 꾸짖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람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한 마디 대꾸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어떻게 유대인 중 한 사람으로서 무려 당시 십년 가까이 대제사장직에 있던 사람을 몰라 볼 수가 있었을까요? 사도바울의 세 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의 기간이 모두 합치면 약 십년 정도가 되고 그 기간의 대부분을 이방 땅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매번 선교여행이 끝날 때 마다 선교 보고 차 중간 중간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아니 설령 예루살렘을 전혀 방문하지 않았다 해도 대제사장이 누구인줄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방 지역의 유대인들이 일 년에 최소한 세 번은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절기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어디든지 제일 먼저 방문해서 말씀을 전한 곳이 바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 아니었습니까?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대제사장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말이 주의를 끄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선민 유대사회에서 대제사장이 누구입니까? 그냥 최고의 성직자가 아닙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해 한 기성 교단의 총회장쯤의 위치에 해당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유대사회가 전체로서 존립할 수 있기 위한 시스템의 핵심축입니다. 반복하자면 율법과 모든 종교적 의식과 규범 등으로 조합되어진 전체 선민사회의 시스템의 중심축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고 다시금 그 성전 시스템의 중심축이 바로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이지요.
3)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비아냥거리는 걸까요? 사도바울이 지금 이런 자리에서 그렇게 경박한 마음가짐일 수는 없습니다. 진짜로 몰랐던 겁니다. 왜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유대사회 시스템에서 국외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나라의 시스템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듦으로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의롭다 여겨짐을 통해 하늘로부터 쌓아 둘 곳이 없도록 복을 내려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복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 나가는 길목에 대제사장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 오늘 본문 4절 말씀에도 나와 있잖아요?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아나니아는 바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것을 몰랐고요. 즉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중심축이 되어 이루어져있던 유대사회 시스템에서 사도 바울은 완전한 아웃사이더였던 겁니다.
아까 그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방금 힘차게 달려 통과한 루브르 박물관 복도 벽에 어떤 그림 들이 걸려 있었냐고 묻는다면 뭐라 할 것 같습니까? 단언하건데 단 하나의 그림도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비록 공간적으로는 루브르 안에 있었지만 수없이 많은 예술적 가치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루브르라는 사회에 대해 국외자들이었던 겁니다.
마찬가지예요.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의식해서 조합되어진 유대사회에서 사도바울은 국외자였고 그래서 그 사회의 존립을 위한 중심축이었던 대제사장을 진심으로 몰랐던 겁니다.
4)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럼 말입니다. 대체 왜 사도바울은 유대사회에 대해 국외자가 되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기존 유대사회의 시스템 말고 다른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유일하게 참된 길임을 알아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올인 해버린 거지요. 그 길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사도 바울 안에서 유대사회의 전체 시스템은 이제 완전히 폐기 되어버렸습니다. 그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께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음을 안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의 경우, 국외자는 그 어디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이 차별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시스템에서 방출된 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뛰쳐나간 자도 아니고 시스템 자체의 존재 의미를 폐기 시켜버리는 자니까 말입니다.
러시아 문학 속의 국외자들은 대부분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위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고다르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시스템으로부터 뛰쳐나간 자들이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전체 유대사회의 시스템의 무효화를 증언하는 국외자라는 겁니다. 아니 이렇게만 말하면 의미가 완전히 살지를 못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보자면 국외자의 위치에 역전이 일어난 겁니다. 유대사회의 전체 시스템이 오히려 거꾸로 사도바울 앞에서 국외자가 되어버리는 이해불가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대제사장도 유대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도 본문에 등장하는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도 모두 각각 사도 바울 앞에서 거꾸로 국외자가 되어 버립니다.
5)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뭘까요? 11절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주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밤에 사도바울을 직접 찾아오셔서 들려주신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시고 비밀스러운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시는 상황 자체가 갖는 의미가 큽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대 역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을 시스템으로부터 제거하려는 유대인들을 오히려 시스템 밖에 있는 국외자로 전락시키는 역전이 일어난다는 거지요.
말씀 드렸던 대로 유대사회 전체는 하나님을 향해 조합되어 있는 하나의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이 기능하도록 대제사장은 성전에 머무르며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했습니다. 즉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가고 또한 거꾸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에게로 향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꾀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입니까? 정작 유대사회 시스템 전체가 그토록 간절히 지향하는 그 만남이 그 누구도 아닌 바울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해 조합된 시스템 안에 있는 유대사회가 지금 바울을 그 시스템 밖으로 내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향하고 있는 당사자이신 하나님 자신은 오히려 바울에게 은밀히 찾아 오셔서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섭리를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바울과 은밀하게 만나시는 동안에 산헤드린 공회를 최고 의결 기관으로 하여 조합된 유대사회 시스템 자체를 국외자로 만들어 버리고 계시는 것이지요. 시쳇말을 섞어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대제사장을 축으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좌우 바퀴가 되어 돌아가고 있던 유대사회 전체를 하나님과 사도바울이 깊은 밤에 따로 은밀히 만나면서 왕따를 시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상황만으로 말하자면 유대사회 전체가 시스템을 가동시켜 바울 한 사람을 몰아내려하는 만큼 국외자는 당연히 바울입니다. 그런데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바울을 은밀히 만나시는 순간 전세는 완전히 역전이 되고 맙니다. 바울을 대적하던 모든 자들이 국외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지요.
6) 산헤드린 공회는 결코 사도바울의 인생행로에 털 끝 만큼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힘을 모아 달려들고 있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분노하고 그 어떤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사도바울의 생애의 진행이 그 것들 때문에 달라질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종 사도바울이 함께하는 이 만남의 시스템에 대해 국외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주어진 정치적 상황, 부의 향방과 권력의 실세, 절대적으로 신봉되는 가치들을 심각하게 고려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직접적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 주는 요인들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 대신에 오직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서만 행동의 이유를 찾으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인간 세상에 대해 철저히 국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여기서 역전이 일어납니다. 거꾸로 세상이 국외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만나는 이 한 분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주인을 모르는 모든 인간사회는 그 자체로 국외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강조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삶의 내용을 채워가는 모든 제2 제3의 사도바울 같은 신앙인들은 반드시 이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국외자로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이런 가치들에 의해 구축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렇게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국외자가 될 수 있을 때라야 본문에서처럼 거꾸로 이 세상을 국외자로 전락시키는 대 역전 또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벽에 돈이 걸려있고 권력이 걸려있고 건강이 걸려있고 승진과 성공과 형통 등등 이 인간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모든 가치들이 걸려있는 루브르 박물관 복도에서 우리는 달려야 합니다. 어떤 것일지라도 그것들 중의 하나 앞에 걸음을 멈추고 그 가치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함을 감상하면서 빠져들면 그 즉시 신앙은 포기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한 마디로 갖고 싶은 것들과 좋아할 만한 것들이 가득 가득 소장 되어 있는 박물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앙은 이 박물관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 모든 가치들을 국외자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결코 끼어들어올 수 없는 국외자들이 되게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지요.
7) 세상에 대해 국외자가 되십시다. 세상가치들로 구축되어 있는 이 세상의 시스템에 대해 국외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간세상의 시스템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을 잡아 당겨 세상의 가치들 앞에 묶어두는 원수는 사실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가치들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보이고 있는 그런 정도의 관심이 주어져도 될 만큼 대단한 것들이 아닙니다. 내 내부에 있는 죄 때문에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겁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좋다고 하는 것에 대해 나 홀로 무관심하고 살아도 내 인생 결코 잘못될 일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 다가져도 하나님에게 무관심하면 진짜 망합니다.
하나님과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울에게서 작동되었던 시스템을 우리도 똑 같이 가동시켜야 합니다. 날마다 죽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날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에 대해, 이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복들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라야만 진짜 최고의 가치 되시고 진짜 복중에 복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짜 가치들에 빠져있고 가짜 복들에 묶여 있는 마음으로 어찌 진짜 가치 되시고 진짜 복되시는 하나님을 은밀히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로 날마다 죽어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스템을 가동시키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세상은 단지 무력할 뿐입니다. 로마로 가게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시면 대한민국 시스템을 풀가동해서 막아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나를 막아서는 것이 그 누구라도 그 어떤 사회라도 그 어떤 시스템이라도 결국에는 모두 하나님과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만나게 되는 하늘 시스템의 국외자들임을 스스로 드러낼 뿐입니다.
8) 사도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대제사장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이처럼 오직 돈을 향해 구축된 시스템 안에서 살면서 마음이 돈을 모를 수는 없을까요? 모든 목회 시스템이 오직 부흥을 향해 조합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부흥이라는 말을 모르고 목회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이 세상 시스템에 대한 국외자 한 사람이 정말 그리운 시절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국외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벽에 걸려있는 세상의 아름다운 가치들을 쳐다보지 않고 정면으로 십자가에 달린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좌우로 눈길을 주지 않고 향해 달려가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온전히 죽게 해주셔서 하나님을 은밀하게 만남을 통하여, 오히려 내 앞에서 세상이 국외자가 되는 역전극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아멘 목사님 늘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