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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35-42
잃어버린 것들 / 안양준 목사
본 장은 BC 856년경 아람과 북이스라엘 간의 제 1, 2차 전쟁을 중심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여호와께 불순종한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12절은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아합 왕에게 엄청난 공물과 여자들을 요구한 사실을,
13-15절은 한 선지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아합 왕의 승리를 예언함으로 아합 왕이 출전 준비를 서두르게 된 사실을,
16-21절은 아람에 대한 아합이 1차 승리를,
23-30절은 아람에 대한 아합의 2차 승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34절은 여호와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신 아람 왕 벤하닷을 아합 왕이 협정에 의해 살려준 사실과,
35-43은 이러한 아합 왕의 불순종에 대해 선지자를 통해 심판을 예언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아람은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벤하닷이 왕이 되면서 아람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아람은 근동지역에서 큰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야심으로 가득찬 벤하닷이 주변국가였던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수도 사마리아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사실 당시 아람의 세력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3절에 아람 왕 벤하닷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완전히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학교 다닐 때 “내 것이 내 꺼고 니 것도 내 꺼다”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똑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도 안되는 억지같은 소리를 들어도 힘이 없으면 그냥 당해야 하는 것이 약자의 설움 아닙니까?
아합 왕이 아람 왕 벤하닷에게 뭐라고 합니까?
4절에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실제로 있었던 전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이 없으면 비굴할 수 밖에 없고, 억울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한 국가나 한 개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없는 나라는 힘이 있는 나라에 꼼짝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미국에서 이라크 파병을 위해 동두천에 주둔하는 주한미군 1개여단을 차출해가는 문제를 놓고 TV에서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수준이 이것 밖에 안되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나라가 힘이 없는 까닭 아니겠습니까? 더 슬픈 것은 동두천 주민들이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생계가 곤란하다고 하는 기사입니다.
1. 힘을 길러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게 비굴했던 아합 왕이 아람과의 1차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이겼는가 하면 도저히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이겼습니다.
여기에서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일러준 방법이 너무나 이상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람과의 전쟁에 소년들을 보내라는 겁니다. 그리고 소년들의 수가 230명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람 군대는 왕들의 수만 32명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아람 군대를 크게 이기고 아람 왕은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도망합니다.
그때 22절을 보면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의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돌아오면 아람 왕이 치러 오리이다”
힘이란 무엇입니까? 힘이란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결국 힘이 없으면 생존 능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최소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은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왕은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이 말은 “왜? 힘을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알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1년 후면 아람 왕의 침략이 있을 것이니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그 일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면 결국 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경제에 대한 인식이 정치권에 가장 큰 문제로 부상했는데 많은 이들이‘라틴 아메리카의 실패의 교훈’을 통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이야기합니다.
라틴 아메리카는 80년대 초까지는 유례없는 고속성장을 하였습니다. 브라질의 경우 경제 기적의 모델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고 했지만 외국 자본에 의한 성장은 한순간에 몰락하고, 결국 ‘외채의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왜 힘을 길러야 합니까?
선지자가 아합에게 했던 “왕은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1차 전쟁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아람이 또다시 쳐들어 올 것이고, 그 기한이 1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삶은 하나의 전투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의 전투를 치루고, 그리스도인들 역시 나름대로의 전투를 치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전투가 세상 사람들이 겪는 전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영적인 전투를 치루고 살아간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영적인 준비가 필요한 것은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하고, 늘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아합의 승리
그러면 2차 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1년 동안 열심히 힘을 기르고, 준비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더 큰 원인은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람도 나름대로 자신들이 패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면 아람 측에서 벌어진 작전 회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휘 체제를 개편합니다. 왕 아래 각 도시 국가의 왕들을 두었던 그래서 1차 전쟁 때 벤하닷 아래 32명의 왕이 있었던 체제를 이제는 벤하닷 직속의 군대 장관을 임명함으로 군 지휘 체계를 단일화하고 또 1차 전쟁 때 잃은 군사의 수를 충수하고 말과 병거의 수도 충수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만전에 준비를 갖춘 것입니다.
27절에 두 나라의 전력을 비교할 때 “이스라엘은 염소 새끼의 두 적은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군대는 들판에서 한산하게 풀을 뜯고 있는 염소 새끼들 같았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이 아무리 힘을 기르고 준비를 갖췄어도 아람의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아합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이기에 아람의 침입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24절에 아람 진영에서 1차 전쟁의 패인을 분석할 때 ‘산의 신’인 이스라엘의 신이 도왔기 때문에 만일 평지에서 싸우면 이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아람 군대가 하나님을 ‘산의 신’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이 주로 산에 있었기 때문이고 성경을 봐도 산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람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28절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성경은 하나님이 이 전쟁에 개입하신 이유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일개 지역의 신이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셔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일개 지역신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섭리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아람은 강한 군대요,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일개 지역신으로 알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을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벌하신 것입니다.
3. 아합 왕의 범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게 된 아합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34절에 “아합이 가로되 내가 이 약조로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약조하고 저를 놓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만한 벤하닷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벤하닷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인 아합이 하나님의 뜻대로 벤하닷을 쳐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합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교만한 행동입니다.
본문에 보면 마치 두 편의 연극을 보는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그 내용을 보면 한 선지자가 그 친구에게 여호와의 말씀으로 “너는 나를 치라”고 하는데 그 친구가 치기 싫어하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리고 그 선지자가 말한 대로 “그 사람이 저의 곁을 떠나갈 때에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주 하는 레크레이션 중에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사회자가 말하는 대로 따라하는 게임인데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들어가면 그대로 따라 해야 하고,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따라 하면 벌칙을 받게 됩니다.
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하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본문에도 친구가 와서 자기를 때려달라고 한다고 해서 어떻게 때립니까? 하지만 이 말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그 요구가 잘못된 것이라도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너는 나를 치라”고 한 말은 아합이 벤하닷을 쳤어야 했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는 말은 자기 이해 관계에 끌려 벤하닷을 죽이지 않은 아합의 잘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를 치지 않은 그 동료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 벤하닷을 치지 않은 아합이 대신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용은 선지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 “너는 나를 치라”고 요구합니다. 조금 전에 일어난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선지자를 때려 상처를 입힙니다. 그랬더니 선지자가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으로 변장해서 아합에게 갑니다.
그리고 아합에게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전쟁에서 패한 벤하닷을 상징하며 ‘종’은 아합을 상징합니다.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당시 은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을 만큼 큰 액수였습니다. 그러니 은 한 달란트를 요구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요구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키라고 한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이 비유도 벤하닷을 놓아준 아합이 벤하닷 대신 죽게 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왕에게는 판결권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판결권을 가지고 최종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때 선지자가 변장을 풀고 아합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실제로 성취되어 왕상 22:에 아합이 벤하닷과 벌인 길르앗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결론
여러분! 이 사건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한 순간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승리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아합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같지 않습니까?
사실 인생은 우리 힘으로만 갖고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풍요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천년의 역사 동안 우리 민족은 늘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점을 본문 말씀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우리의 삶에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상관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사람을 지키라”고 명령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포로가 도망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물론 전쟁터기에 여러가지 바쁜 상황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라는 말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요, 이 변명이 자신의 무책임을 덮어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는 너무나 바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날처럼 한가하게 팔장끼고 앉아있을 시간을 생각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습니다.
그저께 제가 일이 있어 고속철도를 타고 부산을 내려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제가 생각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슨 고속철도가 이렇게 늦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라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변장해서 하는 말 “저가 없어졌나이다”
자신도 모르게 이리 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중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저가 없어졌나이다”는 고백이 여기 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잘못 사용한 결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라도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으시기를 원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지혜로운 안산경신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