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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1+1 대신에 0+2>의 줄거리:
마트에서 제공되는 원 플러스 원의 제품들은, 만만치 않은 물가로 마음에 부담을 않고 마트에 들어서는 주부들의 마음에 청량제 같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세상 만사 이렇게 더도 말고 그저 원 플러스 원의 패턴으로만 이루어져도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월급도 원 플러스 원이면 정말 살맛 나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아내를 얻는데 그야말로 원 플러스 원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본래 하나님의 계획은 제로 플러스 투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1+1 대신에 0+2
(창29:1~30)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1+1 대신에 0+2>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1+1대신에 0+2’
제가 아침 식사를 할 때에 주로 토스트 한 조각에 삶은 달걀을 먹습니다.
토스트를 먹을 때에는 커피와 먹고, 삶은 달걀을 먹을 때에는 주스를 먹는데 제가 위산이 역류하는 증상이 좀 있어서 커피도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고, 주스도 오렌지를 먹다가 안 좋아서 자몽 주스를 마십니다. 오렌지와 자몽이 비슷할 것 같은데 성분이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오렌지 주스는 산성인데 자몽 주스는 알칼리성이에요.
집사람이 자몽 주스를 내놓을 때가 있고 안 내놓을 때가 있습니다. 달걀 먹으면서 자몽 주스 좀 달라고 하면 없다고 해요. 이유는 자몽 주스가 1리터가 채 못 되는데 3,000원씩 한대요. 우리나라 회사에서 만드는 것인데, 어떨 때에는 1+1으로 나올 때가 있답니다.
제가 “그러면 1,500원씩 하네.”라고 했더니 “1,500원씩 하는 것이 아니라 1+1로 3,000원 짜리를 하나 사면 3,000원 짜리를 하나 더 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1,500원씩 치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더니 다르다는 거예요.
“마트 입장에서도 1,500원씩 쳐서 팔면 하나씩 사가서 재고 처리가 안 되지만, 3,000원을 그대로 두고 1+1을 하면 재고 처리가 더 빨리 된다.”라고 합니다.
경영학과를 나와서 그런지 아주 빠삭해요.
이 1+1이라는 것이 주부들로 하여금 만만치 않은 물가로 인해 장볼 때 갖는 부담을 덜어주는 청량제와 같은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더도 말고 우리 인생의 진행 패턴이 1+1이면 좋겠어요.
열심히 일해서 한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회사에 지불했습니다. 그러면 1+1으로 월급이 300만원 + 300만원이 나온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실패일 때에는 1+1으로 주어지면 안 되겠지만, 하여간 좋은 것이면 1+1로 주어지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0+2는 무엇이냐?
1+1은 1에 대한 값을 지불할 때 1이 더 붙는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0+2라는 것은 아무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2개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1+1의 삶을 살지 말라는 거예요. 1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해서 1을 더 받지 말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무 것에도 대가를 지불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을 살 동안에 선민이 가장 조심해야 될 것 중의 하나는 무엇이냐?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절대로 대가를 지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가 그냥 주어질 것이므로 2중에 1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1을 더 받지 말고, 아무 대가를 지불하지 말고 2를 다 공짜로 받으라는 이야기예요.
마귀가 이 땅에서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뇌시켜 놓은 가장 보편적인 악랄한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얻고 싶으면 대가를 지불하라는 명제입니다. 이게 마귀의 속임수예요. 이 세상은 원래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짜로 살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는 삶이 도둑놈의 삶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이 가능할까요? 왜 사람들이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까?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을 봅니다.
먼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좋아하거나 이루고 싶거나 갖고 싶거나 성취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 마음속에 들여놓습니다. 마음속에 들여놓은 것을 현실로 성취하고 싶을 때에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것이 노력이든 땀이든 수고든 돈이든 무엇이든 간에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반드시 마음속에 이 땅에서 무언가 얻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 한분에게만 할당되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 것으로 귀속 되어야 될 마음이 다른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도둑질 한 것이고, 이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는데 자기 마음대로 도둑질한 마음속에 지갑을 도둑질하고 그 지갑 속에 넣을 돈까지 도둑질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가를 지불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정직한 삶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에 이 세상 것들 중에서 갖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들이 생겼으면 그 자체가 이미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것인데 내 마음인 것처럼 도둑질을 했고, 마음에 그 어느 것도 담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담았음으로 더블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예를 들어서 내가 성공을 하고 싶으면 어느 분야에서든지 당연히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생각은 못하겠죠.
내가 서울대학을 들어가고 싶다면 저절로 되는 겁니까? 아니죠.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싶은 것이 없어야 돼요.
하고 싶은 것이 없고 이루고 싶은 것이 없으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가 바보같이 사는 거예요.
서울대학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서울대 들어갈 만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럼 대가를 지불한 것 아니냐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공부를 하는 과정도 내가 서울대학을 들어가려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 풀고 영어단어 외우고 국어 공부하고 하는 것이 다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와서 당신의 일을 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장갑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는 장갑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장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창작해서 만든 비유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누가복음 11장 20절에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손을 힘입어’라는 말은 원어를 직역하면 ‘손가락을 힘입는다.’는 말입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셨어요. 분명히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예수님이 쫓아내십니다.
“귀신아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벙어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가락에 힘입어서 쫓아냈다고 하십니다.
중동 땅에 장갑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서 예수님께서 행동하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의 장갑이 되셨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세요.
장갑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끼십니다. 그러면 장갑이 망치를 쥐었다면 장갑이 쥔 것입니까? 분명히 장갑과 망치가 접촉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장갑이 쥐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갑을 낀 주인이 망치를 든 것이죠.
하나님께서 내게 돈을 많이 주셨다. 그런데 내가 장갑이면 장갑은 돈을 쥐지 않습니다.
도둑이 장갑을 끼고 은행에 가서 강도짓을 하며 돈을 자기 자루에 집어넣을 때에 장갑이 돈을 쥐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갑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장갑이 자기 안에 다른 것을 담으면 안 돼요.
사탕을 담든지 밥을 담든지 돈을 담든지 그러면 안 됩니다. 장갑은 주인의 손을 담아야 돼요. 장갑의 사명은 다른 것을 쥐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손을 담는데 있는 것입니다.
일단 주인의 손이 담겨지면 그 다음에 장갑이 쥐는 모든 것들은 장갑이 쥐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쥐는 것이고, 장갑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장갑이 돈을 쥐고 있고 돈과 접촉되어 있지만, 주인이 쥐는 것이라서 장갑으로서는 돈과 접촉되는 것이 공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장갑이 따로 무슨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돈과 접촉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월급을 받을 때에도 월급과 접촉이 일어나는 것은 내 손이지만, 나를 장갑 삼아서 이 회사에서 일하도록 하시고 일하는 동안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나타난 결과니까 공짜로 주어지는 거예요.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처럼 악한 생각, 하나님을 배반하고 등지고 대적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장갑이 된다고 할 때에 장갑으로서의 우리의 사명은, 주인의 손이 들어오는 것만이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기 위해서 이런저런 일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 삼아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지, 내가 그걸 얻기 위해서 대가를 치른 것이 아니에요.
공부에 대해서도 서울대학에 들어갔다면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장갑으로 끼시고 수학 문제 푸시고, 영어단어 외우게 하셔서 서울 대학을 들어가게 됐고, 서울대학을 들어간 것도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들어간 것이지 내가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공짜로 살아야 되고, 우리가 힘써야 될 사명은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사명이 아니고 과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느냐가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손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까?
세상 것이 담겨져 있지 않아야 하나님의 손이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큰 사업을 이루겠다는 꿈을 가졌다면, 그 꿈 때문에 하나님의 손이 못 들어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밖에다 두고 하나님의 손으로 내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꿈을 이루어 달라는 것은 마귀가 제일 원하는 기도입니다.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가 바로 그거예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염두에 둬야 될 유일한 대가는, 단 한 번에 대가를 치루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속량하는 대가로서 주님께서 죽으셨고, 하나님아버지의 손이 나를 장갑 삼는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속에서 세상 것을 좋아해 끌어들였던 것을 내보내기 위해서, 그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오직 이 십자가 사건 하나만이 우리가 일평생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될 대가이고, 이 세상 것을 이루는 것은 다 장갑 된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고, 장갑인 나의 입장에서는 다 공짜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장갑 자신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장갑을 끼신 분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이 아니라 0+2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온지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다들 일을 하니까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라반 외삼촌이 뭐라고 하느냐?
15절에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라고 합니다.
라반도 참 야곱 못지않게 교활한 협상꾼이에요.
하란 땅에서도 일을 하면 그 당시의 하루 품삯이 정해져 있었을 거예요. 그걸 그냥 주면 되는데 그 지역의 물정을 모르는 야곱에게 말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이 품삯을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라반에게 두 딸이 있는데 언니가 레아, 동생이 라헬이에요.
레아는 시력이 안 좋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유대 땅에서 시력이 안 좋다는 어감에는 총기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있어요.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품삯으로 라헬을 달라고 하고 칠년을 일하겠다고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의 삶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20절에 “야곱이 라헬을 위해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라헬을 사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아내 사라도 버리고, 고향 친척 아비집도 버리고, 심지어는 롯과 땅을 나눌 때에 땅도 버리고 이삭도 버립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헬을 사랑해서 칠년 동안 라반을 섬겼지만 며칠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게 자승자박(自繩自縛)인 것입니다.
왜 자승자박이라고 하느냐?
라헬과 레아와 그 여종들 빌하와 실바가 야곱의 아내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느냐?
앞서 본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해주실 때에 자손들이 400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게 될 것임을 하나님께서 예언하십니다.
15: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런데 이 타향살이를 하게 되는 이유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요셉을 의지해서 애굽에 내려갔다가 거기에서 400년을 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셉을 라헬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레아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아느냐?
레아에게서 유다가 태어나는데 그 유다의 혈통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십니다.
그러므로 레아와 라헬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예요.
그러니까 야곱은 품삯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이렇게 했어야 합니다.
‘외삼촌, 내가 이곳 물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이렇게 외삼촌에게 얹혀있는 상황이니 외삼촌이 나의 품삯을 정해주세요’라고 했으면 그 당시에 통용되는 품삯으로 양 몇 마리로 정해줬을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을 것이고 재산이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헬을 품삯으로 달라고 하니 라반이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하는데 19절에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라고 합니다. 라반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야곱이 잘못 생각을 한 것입니다.
라반은 야곱이 왜 왔는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아버지 이삭이 네 외삼촌에게로 가서 아내감을 구하라고 해서 왔고, 어머니인 리브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에서를 피해서 왔다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반의 생각은 자기 딸들을 야곱에게 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누이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가서 사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라반의 생각에는 라헬과 레아를 야곱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품삯으로 라헬을 달라고 했으니 라반은 얼씨구나 좋다고 한 것입니다.
달라고 안 해도 일을 하면 품삯을 줄 것이고 때가 되면 라헬뿐만이 아니라 레아부터 다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대가를 지불할 테니 라헬을 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게 자승자박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주실 것들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의 실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느냐?
내 눈에 라헬이 예뻐서 마음에 담는 것에서부터 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어머니 리브가가 시집온 이야기를 들었을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도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엘리에셀을 보냅니다. 이삭도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아버지의 처분을 따라갑니다. 그 당사자인 엘리에셀도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여호와의 인도를 기다립니다. “우물에 갔을 때에 나뿐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여자가 있다면 여호와께서 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자기의 눈으로 봤을 때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지 않고 여호와의 인도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야곱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눈에 라헬이 예쁘니까 라헬을 마음에 담아버립니다. 그리고 라헬을 얻으려고 대가를 지불합니다. 이건 믿음의 삶도 아니고 선민의 삶도 아니라는 거예요. 어차피 주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비록 라헬이 예쁘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받아들여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짝이 따로 있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해서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내게 필요한 짝을 허락해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늙어 죽을 때까지 총각으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필요 없는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자손의 약속을 너에게 다 이루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면 그 자손의 번성을 위해서 필요한 아내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거저 주시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그 당시의 지참금 제도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겠냐고 이야기해요. 저는 주석에 그런 이야기를 쓴 학자에게 묻고 싶어요.
인류역사상 혼인제도의 역사 속에서 신랑이 지참금을 가져가는 법은 없어요. 신랑이 신부에게 예물을 줄 수는 있지만 지참금이라는 것은 신부가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오해한 거예요.
그래서 리브가를 얻을 때에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도 예물을 주고, 그 집에도 예물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리브가를 신부로 얻기로 결정한 다음에 답례로 주는 것이지, 지금처럼 아예 거래로 주는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라헬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지불할 테니까 라헬을 달라는 것과는 다른 오해입니다.
라헬과 레아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야곱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자기 마음에 집어넣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작정하신 것은 하나님을 모셔 들인 장갑이 되면 저절로 손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을 모셔 들이지 않고 라헬을 끌어들여서 장갑 스스로가 움직여가면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1+1이 된 거예요. 하나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어요. 라헬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는데 속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을 마음에 담고 꼭 이뤄야겠다고 대가를 지불하며 사는 삶 속에는 반드시 이렇게 공허한 속임수가 끼어들게 되어 있는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 당시 어두움 가운데 신부의 방에 들어가니 누가 누군지 알았겠어요?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운 것을 이용해서 자기가 장자인척 속였던 야곱이 아닙니까?
차녀인 라헬을 얻겠다고 칠년을 일했는데 장녀인 레아가 들어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속인대로 속은 것이죠.
이게 바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는 사람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도둑질을 했으니까.
근본적으로 내 마음은 하나님의 것인데 내 것인 것처럼 도둑질을 했고, 넣지 말아야 될 다른 것을 넣는 더블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했어요.
장자의 명분을 팥죽으로 사는 것도 남의 약점을 이용한 속임수이고, 아버지도 속였습니다.
두 번 도둑질을 하고 두 번 속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는 것입니다.
왜 붙잡아요?
내 마음속에 좋게 여겨져서 라헬이 마음속에 들어오듯이 자꾸 들어오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을 얻고 싶어서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좋아할 만한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마음이 비어있으면 하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불교에서 수련하는 식으로 비운다면 마귀가 더 많이 들어갑니다. 십자가 붙잡고 비우니까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의 손이 나를 끼십니다. 그 다음에는 레아도 라헬도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내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었어요. 그걸 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나섭니까?
하나님 대신에 라헬을 집어넣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자승자박의 삶을 살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라반은 깜짝 놀랐을 거예요. 안 그래도 때가 되면 주려고 했는데, 라헬을 달라고 하니까 좋구나 싶어서 레아를 집어넣었어요. 야곱이 알아서 앞서가니 라반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갑니다.
나중에 보면 재산을 모으는 것도 품삯으로 모았으면 될 것을 삼촌을 속이게 됩니다. 또 속이는 거예요. 이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이렇게 살지 맙시다.
이제는 어떻게 하든지 내 마음에 드는 좋은 것들이 들어올 때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하나님의 손이 들어와야 된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 좋은 것들에 대해 다 죽고 하나님의 손이 나를 끼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렘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어요. 그 미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들은 평강이 핵심이 되는 것들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1+1하지 말고, 0+2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기억해야 될 단 하나의 대가인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치러진 대가만을 기억하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장갑이 됨으로 1+1의 삶이 아니라, 0+2의 삶으로 삶을 꽉꽉 채워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궁금한 점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1. 우선, 서울대학을 들어간것도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우리의 앞날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미 결정된 것이냐 예정된 것이냐 하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2. 나를 장갑 삼아서 이 회사에서 일하시도록 하시고 일하는 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나타난 결과니까 공짜로 주어지는 거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은 그저 장갑같은 존재라면 제가 짜장면과 짬뽕 둘중에 제가 짜장면을 먹는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먹게 하신것이라면 인간의 의지, 자유는 무의미 한건가요?
3. 수학문제 풀게 하시고 영어단어도 외우게 하셔셔 서울대학에 들어간것이라면, 서울대학 못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이 수학문제 못 풀게 하시고 영어단어 못 외우게 하셔셔 못 들어간건가요? 그렇다면 인간은 로보트와 같은 존재 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은 무슨뜻인가요? 어차피 하나님이 다 하신건데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는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에는 수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대통령, 의사, 선생님, 청소부, 운전기사, 경찰, 군인등등 그렇다면 직업도 하나님이 너는 이런직업을 가져라, 너는 이런 일을 해라 라고 다 정해주시고(예정된것)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