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강릉행(江陵行) 1948년 8월 25일 발 11월 4일 환(還)
교회 소요사건(騷擾事件)이 있어 갔더니 소요가 아니고 임의 격화되어 규합(糾合)이 곤란하게 되었으니 역시 반대자들의 충동이다. 이사장 강태희 명의로 백여 명이 예배 보는 교회당은 매각하고 예배를 금지하여 주택까지 강탈하였다. 때에 김명성 목사도 1) 상경하고 김웅배 전도사도 2) 상경하여 교회가 공허(空虛)하였으니 차장내하(此將奈何)오.
이때에 나의 할 일은 교당환수(敎堂還收)도 아니오 주택환수(住宅還收)도 아니라 이산(離散)하기 쉬운 교우들을 위안함이 최급무(最急務)라. 교우들을 모아놓고 만류하되 여러분은 저 건물을 믿지 마시오. 여러분이 사랑과 믿음만 있으면 어디가 모이던 교회를 이룰 수 있으니 모이기만 힘쓰라 가르치고 교우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로 혹 강변 혹 해변으로 데리고 다니며 예배하되 한 사람도 물러가지 않고 80여명이 뭉치고 단합하여 재미있게 예배 보았다.
나는 심장병(心臟病)이 발하여 국립검역(國立檢疫) 소장 이경화(배재졸업)씨에게 진찰을 한 결과 주문진(注文津)에 오래 있을 수 없어 중앙(中央)에 김연호씨가 3) 오게 하고 나는 부처(夫妻)가 떠나오는데 직원들이 한사코 가지 못하게 행이(行李)를 갔다 감추며 만류한다. 여러분이 노물(老物)을 만류하는 것은 감사하지만 병으로 해서 가는 것이니 용서하여 달라 말하고 떠났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모두 정별(情別)의 뜻을 노이고 나 역시 유아(乳兒)를 떼어놓은 어미 같이 마음이 아프다.
떠날 때 교회 청년 2인이 암행(暗行)으로 강릉(江陵)까지 동행하였다. 최경록 군은 돌아가고 김덕중(金德仲)군은 같이 밤을 지내었다. 그날이 마침 삼일(三日) 기도회이다. 김군이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는 장로교회에 가서 예배하자고 한다. 아니라 내가 감리교 목사로 이곳 와서 장로교에 예배한다면 감정적 인물이라 지목할 터이라 하고 김군을 데리고 감리교회로 갔다. 뜻밖에 교우가 많이 모였다. 나도 교인에게 묻되 보통 이렇게 모이는가? 아니올시다. 오늘은 손님이 오신다고 특별소집이올시다. 조금 있다. 담임목사 김광현(金光炫)씨가 4) 손님 두 분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한 사람은 강태희(姜泰熙)씨이요 한사람은 선교사(宣敎師) 서인(西人)이다. 목사는 광고하기를 강 감독(監督)은 금번 지방순회(地方巡廻)로 왔는데 명일은 주문진(注文津)에 명일은 삼척(三陟)에 명일은 정선(旌善) 이렇게 광고하고 인하여 강 목사의 설교가 있었다.
딤전 1장을 읽고 문제는 선전(善戰)이다. 선전(善戰)이 셋이 있는데 1. 자기 위하여 싸우고, 2. 교회위하여 싸워 교회 위하여 기도하며 예배하고 전도하여 교회 확장하여야 한다고 장황설교(張皇說敎)가 있고 3. 시간 없어 정지한다고 설교를 마치었다. 옆에 있던 김군이 은근히 말하기를 일어나 말을 좀 할까요. 제가 자기 이름으로 주문진(注文津) 교회당을 매각하고 예배를 금지한 자가 어찌 저렇게 말할까요. 나는 김군을 만지(挽止)하여 조용케 하고 그 이튿날 곧 11월 4일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귀가하니 체구(滯口)이 범(凡) 2개월 10일만이다. 강릉(江陵) 있을 제 소감을 읊은 글 몇 수 여하
(각주 도움 : 정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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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8년 1월 22-23일 동대문교회에서 열린 재건연회에서 중부연회 소속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재건총회를 열어 장석영 목사가 감독이 되어, 복흥파에는 강희태, 재건파에는 장석영 목사가 선출되어 양쪽이 더욱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2) ‘주문진교회 연혁’에 의하면 1946년 11월부터 1948년까지 목회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3) 1948년 12월 김진호 목사 후임으로 재건파 소속으로 주문진에 왔으며, 복흥파 파송을 받은 유창동 전도사 도 주문진교회로 왔다. 그리하여 1949년 4월 통합이 될 때까지 한 교회 두 교역자가 있었다.
4) 당시 강릉교회 담임자는 복흥파 연회 파송을 받은 김흠광(金欽光) 감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