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2막 13장 (1부)
1970년
국민학교 6학년인 13살.
2막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
내년이면 중학교에 입학과 동시 "3막"이 시작되고
국민학교 6학년을 끝으로
"2막"을 내리려 하니 아쉽기만 하다.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 날"을 만들었다면 육영수 여사가 운영하는 "육영재단"의 "어린이 회관"이 남산의 중턱에 자리잡는다.
어린이의 마지막 해가 될지 모를 1970년도에 "어린이 회관"의 탄생은 모든 어린이들을 들뜨게 하였다.
서울의 어린이회관 건립을 필두로 전국에 어린이회관이 건립되니 어린이들은 모두 환호성을 쳤다.
지금은 능동의 어린이대공원 안으로 이전한 어린이회관은 그당시에는 엄두로 못낼 최신식 건물에 도서관과 각종실습실을 겸비한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남산의 케이블카와 더불어 남산의 명물이 탄생된것이다.
육영수 여사는 많은 일을 하였다.
1남2녀를 둔 그는 충북 옥천출신으로 한센병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어린이들의 만화책인 "보물섬"창간과 정수직업 훈련원을 만들어 청소년 직업
보도에 힘을 쓴 것이다
1974년 49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범 문세광이한테
죽음을 당할 정도로 김일성은 육영수 여사를 시기하고 통일의 걸림돌로 간주한 것이다.
육영수 여사는 슬하에 박근혜(추후18대 대통령으로 취임) 박근령과 아들 박지만을 남기고 죽고만다
추후 박지만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후 부모님 모두 총을 맞고 암살당한 것을 한탄하며 마약으로 전전긍긍하다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추후에는 석방되였지만 이를 가엽히 여긴 포항제철의 설립자 박태준의 도움으로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으로 탄생된다.
"박지만"
대통령의 외동아들이자 막내인 그는 나랑 동갑내기 였다.
그래서 박대통령의 세심히 배려에 의해 사교육을 없앤다는 명분아래 중학교.고등학교를 시험도 치르지 않고 진학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박지만 "이 아니였다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철옹성 같던 교육 개혁이 그로 인해 진행된 것이다.
그는" 박정희 " , "육영수"대통령의 자식이자
험한 역경을 같이 지낸 한시대의 동반자 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을 입시지옥에서 탈출시킨 구세주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