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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8-17절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길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라 함은 태어날 때부터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함으로 그렇게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맹인 된 자로서 볼 수 있다는 희망 자체가 전혀 없는 그런 삶을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도 비참한데 더 비참한 문제가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이 자신의 죄든, 아니면 가족의 죄든 죄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살핀 내용에서 확인한 바 있지만 제자들도 그렇고 이후 내용 속에서 바리새인 역시 다르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생각을 종종 접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어떤 고난과 고통,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되어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때, 그래서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걸하는 자로서 삶을 살아간다고 할 때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 저런 말을 듣지만 그들의 말 가운데는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는 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에 나면서부터 맹인으로 있는가? 어쩌면 이런 말들로 인해 맹인 된 자도 결국 죄로 인하여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다르지 않는 생각으로 묻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는 누구의 죄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신입니까? 아니면 부모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하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구걸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도 똑같았습니다. 제자들이 말할 때까지만 해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따르면 고난과 고통, 어려움 혹은 불행한 일의 원인에는 죄가 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고난과 고통, 어려움 등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었는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원인,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의 원인에는 분명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고난과 고통, 어려움의 모든 원인이 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스스로 짓는 자범죄 없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죄와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죄를 고려하지 않고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고 그 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난과 고통, 어려움 등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주의 말씀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죄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일도 모른 채 함부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죄가 뚜렷이 드러나기까지는 마태복음 7장에 있는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데, 마태복음 7장 3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과 관련하여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시 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기 위함이고, 이 일은 제자 된 너희에게도 맡겨진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란 어둠 가운에 있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요, 그 빛을 통해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살려 내는 일,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영적으로 볼 때 다 맹인 된 자로 태어나지만, 그런 자들의 눈을 뜨게 만들고, 그래서 죽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만드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지금 맹인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맹인 됨이 죄와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를 날 때부터 맹인으로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자가 눈이 밝아져 볼 수 있는 자로 왔을 때 오늘 본문은 그를 알던 사람들이 그가 우리가 알고 있던 맹인이 맞는지를 묻고 답하게 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8절과 9절을 보시면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본래 그를 알던 이웃 사람들, 그리고 자주 동일한 길을 왔다 갔다 할 때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이 사람이 맹인인 줄 압니다. 좀 더 깊이 아는 사람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 그가 눈을 떠서 온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맹인이 아니라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웃 사람들, 전에 그가 맹인 된 자요 걸인으로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 맹인 된 자로서 보게 된 자가 그들의 말을 듣고서는 내가 그가 맞다고 고백합니다. 그 말은 본래 맹인으로 있었지만 이제는 보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10절을 보시면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32절에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라는 말씀도 있듯이 맹인 된 자가 눈을 뜬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 너무나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경험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닙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맹인으로 있다는 사실, 그가 날 때부터 맹인으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눈을 뜬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그래서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사람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11절을 보시면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지난주 살핀 6절과 7절에 근거하자면 지금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사람의 이 말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고치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신 일과 그가 명하신 일에 대하여 그대로 순종하자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대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라고 묻는 자들에게 답변이 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답변만으로는 이해가 되지도 않고, 납득이 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묻고 답을 듣습니다. 12절에 보시면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지금 이들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자보다 그를 고치신 예수께 직접 듣고자 합니다. 그라면 그의 눈이 어떻게 떠졌는지 속 시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난 뒤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보게 된 자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요, 그가 고치심으로 맹인이었던 자가 보게 되었지만 눈을 뜨고 난 뒤 왔을 때는 그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는데, 지금 예수님은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신 것으로 영적 교훈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9장의 핵심은 39절에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즉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지도자로 있는 바리새인들의 실상이 눈 뜬 자가 아니라 사실은 맹인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며,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인 것입니다.
반면 실제 맹인은 자신의 눈을 뜸과 동시에 영적인 눈도 떴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서서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9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시되, 단지 육신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이 사람을 통해 나타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요, 구원의 복까지 얻은 자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8절 이하 12절 내용을 보시면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사람으로는 결코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능력이 기적으로 나타나는 일에 대해서만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의 역사로 나타난다고 할 때 이 영적 은혜 역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을 다 이해하고 있습니까? 나를 구원하신 것에 대하여 납득이 되십니까?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본성으로 하자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는 자들이었습니다(롬1:23).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기는커녕 우리 자신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게 하셨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게 하셨고, 믿음을 주심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얼마나 이해를 하고 계십니까? 얼마나 납득하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원죄가 있고,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끊임없이 짓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자범죄가 아니라 우리는 원죄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신 성자를 우리와 같은 몸과 영혼을 취하게 하심으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흙으로 창조되었을 뿐입니다. 원문에 좀 더 가깝게 설명하자면 먼지요 티끌로 만들어진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가치 있다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 투자를 합니다.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를 합니다. 그럼 하나님도 우리의 그런 면을 보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지금,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께 보탬이 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내 안에 있는 것을 다 열어놓는다면 우리는 부끄러워할만한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무슨 미래 가치가 있습니까?
아무리 따져 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을 따라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원인 때문에 사랑하기로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뜻의 의논대로 작정하시되 누구는 선택하기로 하시고 선택하기로 하신 사람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무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이 사랑이 이해가 되십니까? 납득이 되십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이렇게 신비롭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말할 수 있습니다. 맹인 된 자가 11절을 통해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또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결국 완성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원의 신비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가? 납득시킬 수 있는가? 사실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말하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뭔가 속이 시원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지만, 그래서 말해 주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지 않는 이상 구원의 신비를 알 길은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을 때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너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예수님과 관련해 22절에 보시면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은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는 누구인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까지 한 상태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맹인으로 있던 자가 보게 된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할 때 그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뜬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절하게 됩니다(요9:38). 오늘 본문에서는 선지자란 고백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눈 뜬 자의 이웃 사람들,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분으로 말미암아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때 바리새인들을 찾아갑니다. 13절을 보시면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임을 나타내시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 편에 서 있는가? 바리새인 편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이 일에 대한 바리새인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 그것으로 예수님이란 분에 대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 바리새인을 찾아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 그들의 판단을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 자체가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둠인 것을 모르는 어둠이 백성에게는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 편에 서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은 14절에서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덧붙여 설명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로 인하여 논쟁한 사실이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다고 할 때 ‘그들’이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다는 것은 결코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 편에 서 있는 자들인가? 바리새인 편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에게로 간 것입니다.
결국 이후 모든 내용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들으면서도 그것으로 유익을 삼지 않는 자들이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라는 것이며, 그들은 더더욱 강퍅한 마음으로 주를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 맹인 된 자의 시력이 회복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 기적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지의 여부를 조사해야 했고, 조사하는 동안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증오는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고 저울질 할 뿐이었습니다. 그만큼 강퍅하면서도 교만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따르는 당시 유대인들은 어떠합니까? 그들도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스스로 어둠 가운데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어둠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본다고 생각하지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그의 능력으로 나타내셨고, 실제로 나타난 증거를 보고 있지만 그를 데리고 누구에게로 갔느냐 하면 바리새인에게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증거 하십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만드시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마13:12). 특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는 기록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은 안식일에 저들이 모이기 때문이요 그 안식일에 저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적은 그의 가르침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안식일에 긍휼을 베푸는 행위조차 불법으로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 병든 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보이셨다고 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요한복음 5장에서 밝히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는 측면, 다시 말해 그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내용들은 결국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증명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 스스로는 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영적으로 맹인인데 맹인이 아닌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로 갔을 때 바리새인 역시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1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유대인들이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자를 데리고 오기 전 바리새인들도 이 사건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소문은 빨리 퍼지게 되어 있고 또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행적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문을 부풀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실에 대하여 알고자 당사자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가?” 맹인의 대답은 동일합니다.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진술에 대하여 어떤 바리새인들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가지기도 하지만, 어떤 바리새인들 중에서는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다른 문제로 시선을 돌립니다. 16절을 보시면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성경에 보면 안식일과 관련해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뜻이 무엇이지를 밝히셨습니다. 안식일에 쉬라는 것은 사람의 일에 관해서지 하나님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경건의 의무는 해야 하고, 자비의 의무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의 잣대가 아니라, 자신이 이해한 율법의 잣대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들의 잣대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마다, 주의 말씀을 증거 하는 목회자마다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영광을 말할지라도 같은 영광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리새인의 율법 이해가 예수님의 율법 이해와 다른 것처럼, 동일하게 영광을 말할지라도 하나님 지식,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영광인지, 무엇이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영광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말씀으로부터 배우고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배워야 합니다. 계속해서 보고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스스로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일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자이신 하나님은 오로지 성부 하나님만 나타나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영광이요,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쨌든 지금 바리새인 안에서도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다, 아니다는 논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라고 말함으로 그가 죄인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면 안식일을 지킬 것이고, 그렇다면 결코 죄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라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할 수 없으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잣대가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너희들의 율법 해석이 틀렸다. 너희들의 잣대가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번도 주의 잣대로 자신의 잣대를 옮겨오지 않습니다. 이런데 무슨 올바른 판단이 그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어떤 오류입니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정죄한 것처럼, 그것도 자신들은 죄인이 아닌 자라는 전제 아래 정죄한 것처럼, 이들 역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둠인데 어둠이 전혀 없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 판단하고 정죄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죄와 전혀 상관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이다, 아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니 이것보다 심각한 신성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부 바리새인들의 말처럼 나면서부터 맹인인 자가 보게 되었다면 결코 죄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말씀을 염두 해 둔다면 그의 기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예언 된 메시아와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논쟁할 뿐 확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기보다는 논쟁을 통하여 더 흐려져 갈 뿐입니다. 본래 논쟁이라 함은 더욱 분명하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바리새인들의 논쟁은 분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흐리게 만들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시지만 그들은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으로 있기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판단이 정확할 수 없는 겁니다.
이런 논쟁 속에서 다시금 묻게 됩니다. 17절을 보시면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간단히 말하면 지금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다가 보게 된 사람보다 못한 자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죄인이다, 아니다로 논쟁하고 있지만, 맹인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바리새인들이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종교지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맹인 되었다가 눈 뜬 자가 답을 주고 있는 형태입니다. 가르치는 자 쪽에서는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인 반면 가르침 받는 자 쪽에서 도리어 답을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요한복음 9장 22절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에 대하여 출교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자의 고백은 굉장히 담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임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면 바리새인들도 예수라는 분에 대하여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마음이 있는가? 없습니다. 논쟁은 하지만 논쟁을 통해 죄인으로서는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더 분명한 자리로 나아가지 못해서 다시금 물을 정도이니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다음 주에 보게 될 18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무엇까지 부정하느냐?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조차 부정합니다. 논쟁은 하지만 그 논쟁을 통해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쪽으로만 나아갈 뿐인 겁니다. 이런 내용은 결국 요한복음 9장 39절을 더욱 확증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도 이 맹인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보는 자들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본래 우리는 어둠에 속한 자들입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는 자로 있습니다. 맹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요,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의 역사를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11:33-35) 이것이 신비입니다. 11장에 앞서서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 구원의 은혜의 극치인 예정에 대하여 말한 후 지금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을 헤아릴 수도 없고, 그의 지혜와 지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보고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로마서 11장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의 구원에 적용해 보자면 구원의 시작과 과정, 끝이 다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단 1%라도 우리의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100% 하나님의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의 과정을 지나면서 겪게 될 것이고, 이미 성경을 통해 알리신바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람이 받아야 할 영광이 없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단 1%의 영광만이라도 돌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로 맹인에서 눈을 떴다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자들이라면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줄 알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돌리는 척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분만 드러나고, 그분만 높아지고, 그분에게만 다 돌리고 나는 사라져도 괜찮다고 여기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