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인다
최은지
금성여자 팽이 돌아 바람을 일으키고
화성남자 자전하여 그 바람 마주 잡네
춤추는 봄바람 먹고 사랑 익는 열매들
가슴에 열이 쌓여 북극 얼음 녹여온다
전어 떼 바람맞힌 더위 먹은 파도소리
찐득한 삼베 이불 속 산바람이 불어오고
귀뚜라미 시조時調 노래 갈바람 일고 있다
이명을 떨치려니 책 속에 바람인다
뜸해진 가솔들 소식 바람 일어 당긴 정
남북을 오르내린 카눈*에게 묻는다
북에 둔 그리운 길 나 오길 기다리던?
된바람 나르는 편에 동백꽃을 보낼까
⁕사상 첫 한반도 종단 태풍
치자 꽃 산고
양수가 터지고도 고함 한번 못 지르다
입술 꽉 깨물고서 피워 올린 꽃봉오리
뼈마디 녹아나던 아픔 잊히고 또 벙근다
나뭇가지가 잎을 놓을 때
아직은 머물러도 괜찮을 푸른 시간
가랑잎 차창 틈새 소롯이 앉아 있네
달리는 바람결 따라 춤출 날을 꿈꾸며
샛바람 싱싱 불어 푸른 잎 출렁인다
숨 막힌 한더위도 다독인 너른 품새
아이들 자라는 소리 새벽 공기 드맑다
색색이 차려입고 제 갈 길 가려 하네
쓰린 맘 눌러놓고 물목을 챙겨 본다
새봄을 기다리면서 긴 아픔을 놓는다
골목 어귀
가로등 불빛 찾아
낮달이 허둥댄다
반가운 사람들이
눈시울 붉히는 곳
노을도 멈칫거리며
두리두리 살핀다
꽃도 운다
밤새 쓴 밍밍한 시詩 소금 간 해보다가
쫄깃한 맛을 찾아 살바람 맞아본다
머릿속 쥐가 날 만큼 꽃 생각만 가득 차
하늘도 검게 우는 겨울비 내리는 날
떠돌던 마음들을 그대에게 묶어놓고
교감한 눈빛만으로 그리움을 재운다
흔들린 인생처럼 흔들리는 완행열차
중독된 머릿속은 끝없는 미로인데
그대가 있어 주었네 나를 품고 있었네
꿈이 생기니
가을비 숨어오는
해질녘 적막한 집
늘어지던 근육들이
제 일을 시작하고
머릿속 졸던 해마에
젊음이 통째 온다
사치였다 생각은
아스팔트 녹아 붙은 신발이 끌려온다
땀 비 젖은 대머리는 땡볕에 검게 타고
뱃가죽 눌어붙어서 숨소리도 잦아진
끌고 간 폐지 수레 몇 끼 값 받으려나
한때는 사장이던 양복도 근사했네
안개 낀 머릿속 허기 사치였나 생각이
백기 들다
야시비 날고뛰다
쨍한 볕에 숨 고른다
날세운 곁눈질로
칼 금 그은 자리다툼
온 식구 명줄이 달린
한 뼘 땅도 숨차다
할머니 쪽파 이고
삼십여 년 지킨 자리
코로나 기침소리
경계선 무너지네
꿈에도 웅얼대는가
어렵단다 어려워
깡통 가슴
이 방 저 방 때구루루 적막을 휘젓는다
잠자던 시어들이 스멀스멀 깨어나고
보름달 환한 얼굴에 소지燒紙 한 장 올린다
갈 길 몰라 구르던 맘 뿌리내려 터를 잡고
눅진 때 씻어 가는 맑게 울린 봄비 소리
쏘옥 쏙 새싹 돋는 소리 시집 가득 채운다
샐비어
햇살이 물고 있는
가슬가슬 하얀 빨래
뒤틀린 쪽 마루도
해 등쌀에 늘어지고
달큼한 청포도 알이
몸 부풀려 부른다
아파트 이마 위에
예쁜 얼굴 올린 달아
샐비어 타는 밤에
갈바람은 언제 오나
청량한 새벽 공기로
지친 해마 씻는다
시작 노트
추석 무렵 엄마가 돌아가셔서 일까. 추석이 가까이 오면 불어대는 써늘한 새벽바람을 싫어한다. 그 바람은 마음 전부를 흔들면서 가슴을 펑 뚫어놓고 쓸쓸함과 서글픔을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에는 신바람이 불어야 일할 맛이 나니...
지금 우리가 당면한 인구 소멸, 지구온난화, 1인 가구, 남북통일 등의 현실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서 우리 모두가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
아들이 선물한 진한 치자 꽃향기를 맡으며 세대의 번성을 기원하고 싶었던 날.
나뭇가지가 잎을 놓듯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픔도 놓을 줄 알아야했다.
골목 어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보내는 곳. 눈물 짠해지는 희망이 어리는 곳이다. 나는 항상 골목 어귀를 서성인다.
쓰고 싶은 글들이 표현되지 않을 때, 그리움이 너무 진해서 이길 수가 없을 때, 시조가 항상 곁에서 나를 품고 있어서 위로가 된다.
꿈이 있으면 사는 게 즐겁고 밥이 해결되어야 사랑도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까.
붉게 타오르는 샐비어를 좋아한다. 꽃은 다 좋아하지만 특히 여름에 피는 꽃들을 좋아한다. 정열적인 붉은 샐비어를 보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나올 것 같다.
-2023. 《 좋은시조 》 겨울호. 신작시조 소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