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에 이러한 자의적 연주에 대한 반동과 반성이 일어난다. 사실19세기 전반의 이러한 연주는 작품을 청중에게 현실화해 주는 매개의 역할은 없어져 버리고,작품과 연주 사이는 단절이 되어 버렸던 셈이다.이것이 반성이 되었던 것이다.그래서 연주는 작곡-작품-연주라는 일련의 연속성을 갖는 음악활동 중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따라서 연주는 작품에 충실해야 하며 자의적인 이탈은 자유가 아니라 방만과 오만이라는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연주란 작곡가의 표현 의도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낭만주의가 전성을 이루던 19세기 전반에는 그 낭만주의의 정신이 배경이 되어 낭만적인 연주,추창조가 강조되고 연주자의 자기주장이 전면에 부각되는 주관적(主觀的)인 연주가 지배를 하던 시대였다.하지만19세기 말에는 작품의 원 창조 정신에 출실하고,추체험에 중점이 두어지는,원 창작자의 창조정신을 존중하는 객관적(客觀的)연주의 자세로 돌아왔다. 이렇게 추체험과 추창조로 대립되는 두 가지 측면을 함축하는 연주라는 독특한 방식과,역사적으로도 대립되는 두 개의 연주 타입이 결국 오늘날의 주관적 연주,객관적 연주라는 두 가지 연주 유형으로 자리 잡는 배경이 된다.
그런데 서로 대립되는 주관적 연주와 객관적 연주라는 두 가지 연주타입의 배경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연주라는 것은 작품을 현실화하는 행위인데, ‘연주 이전에 음악작품은 이미 완성된 존재로 연주자에게 주어졌을까,아니면 그 음악작품이 연주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완결되는 것일까’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연주되기 이전에 이미 완결된 작품으로 연주자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연주는 추체험에 중점이 두어져 있는 객관적 연주가 될 것이며,반대로 음악작품은 작곡가의 손에서100%완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빈 여백이 남겨진 채로 있다가 연주가의 연주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연주는 추창조에 중점을 둔 주관적 연주가 되는 것이다. <출처:김승일,‘클래식의 오해와 편견’,pp.198~1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