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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평안은 에비앙 생수가 아니다>의 줄거리:
매월 3천만 개의 페트병에 담겨 전 세계로 수출되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에비앙에서 솟는 지하수는 알프스 만년설이 녹아 지하로 침투된 뒤 무려 15년 동안 지하를 흘러 에비앙에서 솟아오른 물이랍니다. 마음의 유쾌함과 시원함을 유지시켜 마음 속 갈증을 근본적으로 없애주는 평안은 이렇게 에비앙의 생수일 필요는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지금 당장에 누리는 대신 굳이 지하로 흐르게 하여 무려 15년이나 뒤로 미루는 것일까요?
평안은 에비앙 생수가 아니다
(예레미야 52:1~34)
31.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32. 그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그의 자리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자리보다 높이고
33. 그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혔고 그의 평생 동안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34. 그가 날마다 쓸 것을 바벨론의 왕에게서 받는 정량이 있었고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평안은 에비앙 생수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평안은 에비앙 생수가 아니다’
평안은 마음의 시원함이고 유쾌함이며 어떤 갈증이나 불안과 염려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평안이 에비앙 생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에비앙 생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생수입니다. 또 19세기말부터 공식판매허가를 받은 세계 최초의 생수이기도 합니다. 봉이 김선달이 한강 물을 팔아먹은 것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공식적으로는 에비앙이 최초입니다.
에비앙 생수가 유명해진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의 어떤 후작이 신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에비앙 지방에 와서 광천수를 마시며 병이 나았고 그 때부터 에비앙 생수가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명해진 에비앙 생수는 지금도 매월 3,000만 병이 수출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페트병에는 산 모양의 로고가 그려져 있습니다. 에비앙 마을은 레만 호수를 끼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호수로부터 만들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에비앙 생수는 레만 호수와는 관계없는 지하수라고 합니다. 알프스 산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서 스위스 땅을 거쳐 프랑스 남부에 있는 에비앙 마을까지 와서 솟아오르는 샘물입니다. 그래서 페트병에 알프스 산을 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알프스 산꼭대기에 있는 만년설이 녹아서 스며든 물이 에비앙에서 솟아오르기까지는 무려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고 하니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긴 세월 동안 각종 미네랄이 녹아들게 되고 독특한 생수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마지막으로 바벨론의 멸망이 예언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로써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예언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예언을 받아 적었던 서기관 바룩이 작성한 부록입니다. 그런데 이 부록이 어제 51장을 통해 본 “십자가 방식의 삶과 바벨론 방식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열왕기하 24~25장에 기록된 내용들을 발췌하여 십자가 방식의 삶과 바벨론 방식의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룩이 보는 예레미야서 전체의 총괄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방식의 삶과 바벨론 방식의 삶’의 구분은 하나님과 우리 마음의 거리로 구분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제일 먼저 붙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 방식의 삶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이 세상의 대상이나 사건이나 사람을 먼저 붙잡은 상태에서 유지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벨론 방식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바벨론 방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벨론이 성전을 파괴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안치된 곳이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밀착시키게 하는 상번제가 이루어지던 곳이었습니다.
상번제(常燔祭)는 말 그대로 일상에서 생활화되는 번제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접촉하는 대상에 대해 상번제의 어린양을 통해 죽은 자가 되었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첫 번째로 모실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구약에서도 십자가 방식의 삶이 예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상번제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마음은 자연히 세상과 밀착하게 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마찬가지로 세상에 좌우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벨론 방식의 삶이고 하나님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집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 되면 생각과 감정도 의지도 따라옵니다. 돈이 없으면 불안하고 걱정과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의지적으로 돈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하나님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의 가치들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평안은 지하로 침투되어 사라집니다.
마치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15년이 지나서야 프랑스의 에비앙 마을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이 내가 사는 동안 지하수로 흐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솟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또 참 평안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밖에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 정말로 문제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평안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은 지하로 침투되고 찾아볼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먹고 마시고 누림으로써 근심이나 두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실제로 이런 평안을 맛보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세상을 첫 번째 대상으로 접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선민들에게는 성전이 허락되었고 우리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바로 이 성전을 파괴시켰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어 상번제도 드려지지 않게 되었으니 선민들은 마음이 세상과 접촉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선민들이 바벨론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셈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21절에서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와 접촉할 수 있도록 십자가 사건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바룩에 의해 편집된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러한 ‘십자가 방식의 삶과 바벨론 방식의 삶’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끝난 후에 덧붙여진 부록입니다. 서기관이었던 바룩의 시점에서 본 예레미야서의 총괄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룩은 무엇을 목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덧붙이게 되었던 것일까요?
앞서 51장까지는 예레미야에 의해 바벨론의 멸망까지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룩이 본문을 기록한 것은 이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때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를 회상하며 본서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BC.587에 포위를 당하고 BC.586년에 망하게 됩니다.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예루살렘의 왕궁과 성전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들을 불살랐습니다. 또 성전의 각종 기물들이 약탈당했으며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참고로 여기서 언급되는 포로 사건은 잘 알려진 세 차례에 걸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대규모 포로 사건은 시대적으로 BC.605년, 597년, 586년에 3차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8~30절에서 나타나는 포로는 예루살렘 멸망 전후를 기점으로 해서 소규모로 이루어진 별개의 세 차례의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한편 본문 마지막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이어 에윌므로닥이 왕이 되고 나서 유다의 여호야긴 왕을 감옥에서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총애하여 좋게 대우하였음이 드러납니다. 피정복국가의 왕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유독 여호야긴 왕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에윌므로닥 왕이 여호야긴 왕을 총애했던 것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배후사정이 있습니다. 에윌므로닥은 아버지 느부갓네살의 재위 도중 감옥에 갇히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감옥에서 여호야긴을 만나 친해졌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이한 점이 또 있습니다. 이후의 바벨론은 네리글리살이 에윌므로닥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윌므로닥의 측근이었던 여호야긴은 여전히 총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룩이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 이유는 여호야긴 왕에 대한 회복과 특혜가 하나님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긴 왕은 남 왕국 유다가 망하기 전에 고작 3개월간 왕위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선민들의 대표격이 된 상징적 인물입니다. 여호야긴 왕은 포로로 잡혀온 선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룩은 이러한 내용을 덧붙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 중에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온 지 37년이나 되었음이 강조됩니다. 이 37년 동안에 유다에서는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바벨론에 18개월 동안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다가 함락당합니다. 시드기야는 도망 중에 잡혀서 두 눈을 잃고 놋 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왕궁과 성전과 고관들의 집들은 불타게 됩니다. 이런 불행한 이야기들이 여호야긴의 37년간의 포로생활 중에 일어났음이 강조되고, 이 모든 일이 마쳐진 후에야 여호야긴 왕에게 특혜가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룩은 이를 하나님이 선민에게 주시려는 평안이 임한 것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기까지 무려 37년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마치 알프스 산의 만년설이 녹아서 지표로 스며들었다가 15년이 지난 후에 프랑스 남부의 에비앙에서 솟아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으며 남겨진 가난한 자들에게는 포도원이 상속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룩은 선민들이 대체 무슨 이유에서 하나님의 평안을 즉각적으로 얻지 못하고 37년이나 고생한 끝에야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 29장 11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가지고 계시는 모든 생각은 결코 재앙이 아닙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루하루를 주관해 나가실 때에 주어지는 모든 일들은 평안을 위해 주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도넛을 만드는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똑같은 반죽으로 동그란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별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만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삶이 어떤 사건을 만나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지 그 모든 내용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유쾌하고 시원하며 갈증이 없고 염려와 근심도 없는 평안이 바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쓰시는 반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평안이라는 반죽을 가지고 우리 삶에서 이런 저런 모양을 만들어 가십니다.
문제는 이 평안이 에비앙 생수처럼 지하로 스며들어서 우리 삶에서 즉각적으로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붙잡혀갔다가 37년 만에 평안을 누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평안이 스며들어버리는 것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은 우리 삶 전체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의 재료이고 모든 섭리의 재료이고 모든 상황의 재료입니다. 극단적으로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의 현장조차도 하나님이 평안을 재료로 만드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 만난 배에서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도 이 풍랑이라는 사건 속에 하나님의 평안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혔을 때에 오히려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파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님의 평안을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즉각적 평안을 예수님이나 제자들처럼 왜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선민들은 왜 3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평안을 허락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삶을 시작할 때에 마음으로 접촉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접촉하는 동안에는 결코 하나님의 평안을 즉각적으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바룩은 여호야긴을 선민의 대표로 삼아 예레미야서 전체의 의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11절까지는 여호야긴 왕이 잡혀간 직후에 왕이 되었던 시드기야 왕의 최후가 언급됩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18개월 동안 포위됩니다. 6절을 보면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는 말을 통해서 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당했음이 드러납니다. 시드기야는 이러한 상황에서 밤을 이용해 무너진 성벽의 틈사이로 도주하다가 붙잡히게 되고 느부갓네살 앞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눈앞에서 아들들과 신하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또한 두 눈이 뽑히고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둬집니다.
바룩이 이미 열왕기하에서 일어난 일들을 부록으로 기록한 이유는 마음이 육체로 접하는 일들과 싸워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선민들에게는 성전의 상번제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십자가 생활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마음의 싸움을 하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에 담으면 그것이 첫 번째 대상이 되어서 접촉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은 지하로 스며들게 되고 마음에는 걱정과 근심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접촉하게 되는 대표적인 대상이 자녀들입니다. 이는 시드기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드기야에게는 이후 죽음을 당하게 되는 아들들뿐만이 아니라 딸도 많았을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아버지로써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번영하기를 바랐고 그 과정에서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게 됩니다. 또 바벨론의 침공을 받게 되자 자녀들이 다스릴 나라를 내 손으로 지키겠다고 나라에 마음을 붙이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의 지층을 이루어 하나님의 평안을 가두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층이 쌓이면 쌓일수록 하나님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평안은 다 지하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루어진 평강이 나라가 멸망하고 37년 후에나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또 12~23절까지는 왕궁과 성전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들이 불타는 장면이 언급됩니다. 왕궁과 집은 당연히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으며, 성전조차도 이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 상번제가 의미를 잃고 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선민들의 마음이 접촉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풍요와 다산이었습니다. 성전의 기물조차 약탈당함을 통하여 선민들이 상번제가 드려지는 성전을 활용하지 못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기 위해서 성전의 상번제를 활용해야만 했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과 마음으로 접촉하기 위해 십자가 생활화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시드기야의 두 눈이 뽑힌 것이 상징하듯이 우리의 마음은 눈으로 보는 것을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왕궁과 변질된 성전과 집들이 불타오르는 것이 상징하는 것처럼 마음으로 풍요와 다산을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그러한 내가 죽은 자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상번제를 잃었고 결국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호야긴 왕이 받았던 특혜가 상징하는 대로 지하로 스며든 하나님의 평안은 37년이나 지난 바벨론 땅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생각은 엄청나게 다양합니다. 매일매일 다른 사건이 생기고 모든 인간관계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안을 재료로 모든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이 평안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선민의 삶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넛 모양이 어떻든 하나의 재료로 만들어졌듯이 그 속에는 똑같은 하나님의 평안이 있습니다. 설령 스데반 집사님처럼 순교할 때에도 평안할 수 있으며, 다윗처럼 왕이 되더라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왕이 된다고 해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왕이 되어도 평안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활성화되는 장소입니다. 회사에 나가서 할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접촉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갖기 위해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회사에서 할 일을 생각하고 마음이 첫 번째로 접촉하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거리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느낌이 생기고 느껴지는 대로 의지를 발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더 많은 층이 생겨납니다. 혹시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더라도 그 때에 생겨나는 평안은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우리가 평생에 걸쳐 경험해 온 바입니다. 세상으로 인해 생겨난 평안은 삼일도 못 갑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바벨론 방식의 삶을 버리고 십자가 방식의 삶을 유지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평안은 15년간을 지하에서 흐르는 에비앙 생수처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야긴 왕과 선민들처럼 온갖 고통을 겪고 37년이나 기다린 후에야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활용해서 지금 당장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끊임없이 세상을 붙잡게 되는 바벨론 방식의 삶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은 15년간, 37년간 기다려서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마실 수 있는 시원한 생수입니다. 걱정과 염려를 없애고 이 세상에 대한 욕망과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주는 평안을 마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안은 에비앙 생수일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바벨론 방식을 근절시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평안이 지하수로 들어가 15년 혹은 37년이나 지나야 나오게 되는 어리석고 안타까운 삶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