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박사, 냉전을 종식한 레이건의 정책과 안보
1.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중국은 러시아를 협력하고,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 들은 러시아에 대하여 금융의 핵폭탄이라는 시프트에 동참할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무기를 지원하고 있어서 신 냉전시대가 되는 모양새이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너 침공을 똑같이 보고 이재명 후보는 2017. 8. 5. 언급 하였던 “이긴 전쟁보다 더러운 평화가 낫다 아무리 비싸고 더럽고 자존심 상해도 전쟁보다 평화가 낫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윤석열 후보는 상대가 공격하는 것이 확실히 될 때 선제타격을 주장하고, 힘을 길러서 평화를 지켜야한다는 취지로 주장하여 전혀 다른 안보관을 보여 주고 있다.
- 정치성향을 떠나서 어느 후보의 주장이 옳은지에 대해서 판단 해야 할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답을 찾다가 냉전시대를 종식한 레이건에게서 해답이 있다고 정리하였다. 레이건을 정리한 후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두 후보와 비슷한 주장을 한 사례를 제시하여 대안을 찾고자 한다.
2. 레이건의 성공
- 로널드 윌슨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북부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1932년에 유레카대학교(Eureke College)를 졸업한 후, 1937년에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한 뒤에는, 배우가 되어 대작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는 영화배우 노동조합(Screen Actors Guild) 위원장으로 두 번 선출되었는데,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뿌리 뽑기 위해 노력했다.
- 1966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어 적자 재정을 흑자로 전환하는 능력을 보여 재선에 성공한다. 1980년의 세 번째 도전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어,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를 누르고 40대 대통령 당선되었다. 당시에는 냉전이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이었고, 경제적으로는 경제불황 속에서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행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빠져 있었다.
- 레이건은 20세기 최고의 대통령 중 한 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위대한 대통령이다. 레이건 당시와 현대는 환경이 다르고 변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반추할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① 레이건이 미국인에게 미국 일류주의의 신념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베트남 전쟁(Vietnam War), 워터게이트 스캔들, 지미 카터의 재임 하에 엉망이 된 각종 지표로 인해 낙담해있던 미국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주었다.
②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의 영향을 받아서,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세율을 인하하였고, 규제를 완화하였으며, 정부 지출을 줄이자 민간경제가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1980년대 동안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4.6 퍼센트에 달해서 국민총생산이 거의 두 배로 증대될 수 있었고, 새롭게 창출된 일자리면 1,700만 여개에 육박하였다.
③ 냉전에서 승리를 거머쥐며 종전을 실현하였다. 레이건은 아이젠하워의 주장을 궤를 같이 하여 “힘에 의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를 선택하였다. 경제안정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확충하여 레이건 독트린이 시행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동구권 및 중부유럽에 있어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몰락하기 시작하여, 20년이 되는 시점에서는 악의 왕국인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다.
정리하면, 정신적인 가치부여와 작은정부를 지향하여 민간경제를 활성화하였고 신뢰성 있는 외교와 효과있는 안보 정책으로 전쟁 없이 기나긴 공산주의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3. 우리 역사에서 상반된 사례
①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10만양병설’에 대한 기록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당쟁은 마침내 상대 당파를 원수럼 인식하고 있을 때 이이는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김장생의 율곡 행장에서 처음 기록된 십만양병설은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가의 기세가 부진한 것이 극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땅이 붕괴하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군사들에게 호세(戶稅)를 면해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고, 6개월에 나누어 번갈아 도성을 수비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는 10만을 합하여 지키게 하는 등 완급의 대비를 삼아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하루 아침에 사변이 일어나 백성들을 몰아내어 싸우게 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큰 일이 실패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유성룡은 불가하다면서 ‘무사한 때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기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경연의 신하들도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결국 ‘십만양병설’은 구체적인 진실공방을 떠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서인들의 ‘동인 때리기’로 사용되고 사장되었다.
[한국역사학회, (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583년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그 진실공방, 신병주]
② 이재명 후보는 2017.8.5. “이긴 전쟁보다 더러운 평화가 낫다 아무리 비싸고 더럽고 자존심 상해도 전쟁보다 평화가 낫다.” 고 했던 말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의 말은 친일파 이완용의 “비판하는 주장은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이게 다 조선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틀리다는 주장도 있다.
- 1905년 11월 16일 오후 4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인 이완용, 한규설, 이하영, 이지용, 이근택, 민영기, 권중현을 불러 을사늑약 체결을 압박하면서 이완용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고 하여 이재명 후보의 주장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 러시아까지 격파한 일본에게 대항해봐야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취지의 노력은 조국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결국 일본놈들의 강점을 불러오게 하였다. 3. 1. 독립만세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저항,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건을 생각하면 울분이 터져 나온다.
3. 사 견
- 힘을 기르고 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과는 굴종이 아니라 협력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답이다. 북한의 김정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의 침공을 보면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핵 포기를 요구하면서 체재보장과 경제지원으로 시간을 끌다가 북한은 사실상 핵보국이 되었고, 핵탄두의 소형화를 이루고 세계적 수준의 미사일을 개발하여 실험발사하고 있다.
- 북한의 핵무기 폐기없이 UN군과 미군 철수는 주장하지 아니하기로 하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하더라도, 그것은 종이쪽지로 생각하고 광화문에서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시위는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 레이건은 작은정부로 경제를 안정을 기반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계속되었던 냉전시대를 종식시켰다. 이이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미리 준비했다면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우크라이나는 나토에 가입하여 동맹관계를 맺었다면 강대국앞에 저참하게 침공당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 결론은 독자 여러분이∼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XMlls8b4P6g&t=34s
멋진 자이브 음악과 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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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바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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