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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오래 된 볶음김치
(하박국 3장 16~19)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은 오래 된 볶음김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된 볶음김치’
저희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니던 학교에서 달마다 학부모들이 여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 달에 생일을 맞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생일파티를 해주었던 것입니다. 주로 오후 시간을 이용해서 했는데 어느 날 생일파티에 참석했던 집사람과 아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녁때가 돼서야 연락이 왔는데 마술사가 와서 공연을 하는데 길어져서 모든 일정이 늦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 저녁을 혼자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음식을 시켜먹기 싫었습니다. 부엌을 뒤져보니 밥은 있는데 반찬이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발코니에 있는 김치냉장고를 열어보니 젓갈 김치 고추장 오이지가 있었는데 당장 오이지를 꺼내서 밥을 먹기에는 또 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냉장고의 맨 밑바닥까지 뒤져본 결과 반찬통 하나가 깔려있기에 보았더니 칙칙한 색깔의 오래 된 볶음김치였습니다. 이렇게 잊혀 있던 반찬들은 몇 달에 한번 냉장고를 대청소 할 때에나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이 볶음김치가 너무 오래 된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한 조각 먹었더니 의외로 맛이 괜찮았습니다. 그 오래 된 볶음김치를 가져다 놓고 밥을 뜨고 냉수를 놓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박하게 먹으려고 하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도시락에 들어있는 볶음김치는 맛있는 반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살다가 다른 반찬 없이 오랜만에 먹게 된 볶음김치는 정말 맛있습니다.
볶았기 때문에 고소하고 김치 특유의 짭조름한 맛과 개운함도 있습니다. 간장게장이나 잘 삭은 젓갈만 밥도둑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된 볶음김치 하나만 놓고 먹는데 저녁 한 끼 식사를 뚝딱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이것을 종종 신앙과 연결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김치냉장고 맨 밑바닥에 있는 오래 된 볶음김치를 찾아서 먹는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맛있는 반찬이 함께 올라온 밥상이라면 볶음김치는 초라하고 눈에 띄지 않는 반찬입니다. 혹시 명절이나 잔칫날 밥상에 며느리가 볶음김치를 올려놓는다면 야단맞을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제사상을 차리며 조상귀신들에게 복을 빌기 위해 으레 큰 조기나 문어도 올려놓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볶음김치를 올렸다면 아마 귀신도 우습게 여기고는 노발대발 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실제로 조상귀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볶음김치가 천대받는 반찬이라는 뜻입니다.
저 또한 먹을 만한 반찬을 찾고 찾다가 김치냉장고 맨 밑바닥에서 발견한 것이 오래 된 볶음김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 반찬이 없을 때에는 볶음김치 하나가 밥 한 그릇을 해치우는 최고의 반찬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소름이 돋고 무섭고 끔찍한 상황이 연상됩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라고 하였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창자가 흔들릴 만큼 놀랐다는 것일까요? 이어서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여있는 상황을 예언하기 위해 이렇게 끔찍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절에서는 ‘없음’이라는 표현이 계속해서 반복됨으로써 실제상황이 얼마나 참혹하고 처절한지가 묘사됩니다. 다시 말해 필요한 무엇인가가 없기 때문에 창자가 흔들리고 뼈를 썩게 할 정도로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분위기가 반전되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요?
먼저 본문에서 ‘없음’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를 한 번 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않으며(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여섯 번이나 ‘없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라는 말이 성립이 될까요? 너무나 감정의 전환이 극적이라서 의미를 쫓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섭고 떨리는 상황에서 갑자기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는 말이 반전으로 나타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문을 살펴보면 좋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은 ‘이러한 것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겠노라’는 분위기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살펴보면 분위기가 조금 다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유다가 멸망하기 전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예언들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죽는 것을 목격한 후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포로로 잡혀 갑니다. 이렇게 나라가 멸망하는 상황에 대해 하박국 선지자는 오늘 본문과 같은 예언을 받고 또한 이루어 질 것을 믿었습니다. 조국의 멸망이 너무나도 끔찍하였기에 창자가 흔들리고 뼈가 썩는 것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던 대로 18절에서는 이러한 감정이 완전히 반전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설교에서 이 말씀이 인용되면 ‘비록 사업이 안 됐을지라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건강이 안 좋을지라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해석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원문에서 드러나는 ‘없음’은 ‘없을지라도’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제3자가 볼 때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돈도 없고 건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네.’라는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기뻐하고 건강이 좋아야 기뻐하고 사업이 잘되어야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없음’은 ‘없기 때문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함은 나의 선택이 아닌 필연적 결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박국 선지자는 ‘선민이 망하면 반드시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망했기 때문에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 오래 된 볶음김치의 비유와 맞아떨어지는 이유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만한 반찬들이 있었더라면 김치냉장고 밑바닥에 깔려있던 오래 된 볶음김치에 눈길과 손길이 닿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반찬이 있었다면 굳이 그 밑바닥을 찾아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곁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선민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인격적으로 먹으라고 제시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하나님 먹기를 꺼려하며 살아갑니다. 대신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많아지기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먹을거리들이 포진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래 된 볶음김치 같은 하나님 먹을 생각이 들 수가 없습니다. 사업이라는 포도나무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외양간에 소가 있고 우리에 양들이 가득한 상황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런 맛들 때문에 하나님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마음으로 먹을 것이 없는 완전한 패망의 상황이 올 것을 알고 비참하고 참담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없게 되리라는 것을 여섯 번의 ‘없음’을 반복하며 강조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도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서 온 나라가 황폐해지면 밭에 소출도 없을 것이고 소나 양도 모두 약탈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되자 김치냉장고의 바닥까지 뒤지는 저의 모습처럼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마음의 먹을거리가 하나님임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을 먹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결코 맛이 없는 먹거리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 하나님을 먹었더니 모든 슬픔과 공포를 압도합니다. 마치 사슴이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는 것처럼 마음이 떠올라서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박국 선지가가 그래 보입니다. 벌벌 떨고 있다가 갑자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평강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바로 믿음의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이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은 감람나무 열매도 아니고 무화과 열매나 포도나무 열매도 아니었습니다. 밭에 소출이나 소나 양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을 동원해야 주실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도 허락하신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밭의 소출이 많아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면 가짜이고 인단 중의 이단입니다. 밭의 소출이나 포도나무 열매 혹은 외양간의 소나 우리의 양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의 상징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서 먹고 싶고 갖고 싶어서 침을 흘리는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면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없어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슬픔과 괴로움을 이기고도 남는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절대 하나님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추석 상에 올라온 오래 된 볶음김치 취급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서 볶음김치처럼 하찮은 취급을 받고 계십니다.
연말이 되면 연예계에서는 곳곳에서 시상식이 이루어집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트로피를 들고 감격해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언제나 저런 감격스러운 순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봄직도 합니다. 또 뉴스를 보면 경기가 어려운데도 어떤 대기업들은 1000%가 넘는 상여금을 준다고 합니다. 또 TV광고에서는 갖고 싶은 것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내 처지는 대기업에 속해있지도 않고 광고에 나오는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돈도 없습니다. 보면 볼수록 상실감만 커질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여섯 번이나 없다는 고백을 하듯이 나도 그 정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이나 없어도 일곱 번째 하나님은 반드시 내 곁에 계십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김치냉장고 밑바닥의 오래 된 볶음김치처럼 취급하며 잊고 살아왔을 뿐입니다. 연말에 시상식도 있고 남들은 상여금 잔치를 벌이고 TV에서는 광고가 넘치지만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꺼내먹을 때가 된 것입니다.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저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3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일 수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이것저것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찬이 없기 때문에 딱 하나 남은 오래 된 볶음김치가 눈에 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된 볶음김치는 맛없는 반찬이 아닙니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만드는 기가 막힌 반찬입니다. 이 세상 가치들이 내게 주어져서 그 맛이 마음에서 남아돌고 있다면 하나님 맛은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포도주를 시음하는 소믈리에를 생각해보세요. 포도주를 시음하고 나면 반드시 맹물로 입을 헹구어 뱉습니다. 그래야만 다른 포도주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리대회의 심사위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요리사의 음식을 먹고 나면 반드시 입을 헹구고 나서야 다음 요리를 먹습니다. 그렇게 입 안에 남겨진 맛을 없애야만 정확한 심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맛, 형통의 맛, 성공의 맛, 인기의 맛, 승진의 맛, 명품의 맛, 취미의 맛, 예술의 맛, 인간관계의 맛, 돈 맛, 컴퓨터 게임하는 맛 등이 마음에서 도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님을 맛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먹을 것으로 찾지도 않고 먹어도 하나님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예화에서 이러한 신앙적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이 예화의 부자에게서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에 들어갈 만한 죄는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니까 자색 옷을 입고 매일 호화롭게 즐겼을 뿐입니다. 즐기지 않을 바에는 돈을 벌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간 이유도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헌데가 나서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밥 먹을 때에 빵으로 손을 닦고 버리면 그것을 주워 먹고 살았고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목이 말라서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통해 물 한 방울 줄 것을 간구하지만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다’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부자는 세상에서 살 때에 마음으로 맛있게 먹을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김치냉장고 바닥에 깔려있던 오래 된 볶음김치처럼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꺼내서 먹을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생애를 산 것이 죄였던 것입니다. 반면 나사로는 특별한 선행을 해서 천국에 갔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이름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을 먹는 삶을 산 결과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없다는 말을 여섯 번이나 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맛있어 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굶주린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먹으라고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나사로의 이름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거지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거지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만 김치냉장고 밑바닥에 있는 오래 된 볶음김치와 같은 하나님을 꺼내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가치들의 맛을 느끼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님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살려두신 이유는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먹고 하나님 맛을 알고 즐기라는 것입니다.
전라도 지방에서 잔치가 열리면 홍어회가 올라옵니다. 암모니아 냄새가 뒷골을 탁 치는데 처음 먹는 사람은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음식을 먹는 건지 폭탄을 먹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홍어회의 참 맛을 모르는 제가 다른 반찬만 기웃거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저를 불쌍하게 봅니다. 이 상태는 제대로 잔치에 참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천국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대체 무엇을 할까요?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 마음으로 즐겁고 배불러 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을 때에 산 아래에서 추구하던 모든 가치들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 계속 함께 있기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맛을 보고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되면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그 어떤 것들의 맛도 생각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먹는 것은 영원토록 질리지 않으며 기쁨이 사그라지지 않는 날마다 새로운 배부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돈 맛, 성공의 맛, 형통의 맛, 여행의 맛, 컴퓨터 게임 맛, 건강해서 오래 사는 맛 등에 적응해서 살아간다면, 제가 처음 전라도 밥상을 받았을 때에 홍어회를 못 먹었던 것처럼 하나님 맛에 적응을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천국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홍어도 못 먹으면서 뭣 하러 왔느냐는 시선을 보내시던 전라도 어르신들처럼, 이 세상사는 동안에 하나님 맛을 느낄 줄 모르고 하나님으로 배 부르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가도 할 게 없습니다. 천국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을 먹고 배부르고 즐겁고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도 사업을 하시겠습니까?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지고 무슨 시도를 해보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즐기던 문학이나 음악이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천국에 음악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는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귀로 듣는 의미의 음악은 아닙니다. 천사들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모습에 사로잡혀서 내지르는 탄성을 음악으로 비유한 것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멜로디와 가사가 아닌 것입니다. 감탄사의 찬송일 뿐입니다.
천국에는 장사꾼도 없고 공부도 없고 사업가도 없으며 대통령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있을 뿐입니다. 천국에는 이 기쁨과 즐거움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어도 즐거운 곳입니다. 그 천국잔치에 초대 받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맛을 알아야만 합니다. 홍어 맛을 아는 사람이 전라도 잔치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맛을 아는 사람이 천국잔치에 초대받고 천국에 가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주님의 보혈을 통해 이제까지 입 안에 남아있는 이 세상의 가치들의 맛을 헹궈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나사로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내게서 버릴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돈도 별로 없고 건강도 보잘 것 없습니다. 자녀를 봐도 형통하지가 않고 배우자를 봐도 만족이 없습니다. 애초에 버릴 것이 없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없다는 말을 여섯 번 반복한 끝에 일곱 번째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일곱 번째 김치냉장고 밑바닥에서 오래 된 볶음김치를 찾아 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내세울만한 자랑거리가 없다면 이제 하나님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이 세상에서 모든 기쁨을 뛰어넘는 하나님 먹는 기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고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너무 하나님을 잘못 배워왔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요리사가 아니라 음식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요리사처럼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십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내가 일대일의 관계를 맺는 상황으로 국한시켜 본다면, 하나님은 내게 사업이라는 요리를 맛있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또한 건강과 장수라는 요리를 맛있게 만들어서 잘 먹으라고 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형통이나 성공이라는 요리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 마음의 음식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요리사로 배웠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잘 해주시는 요리사로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리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가치라는 요리를 향하고 있는 동안에 때로는 그것들이 주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하나님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은 하박국 선지자의 여섯 번의 ‘없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소믈리에나 요리대회 심사위원이 맛을 없애기 위해 맹물로 입을 헹구고 뱉듯이, 우리는 세상의 맛을 십자가 보혈로 헹궈서 뱉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라는 말씀이 바로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천국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맛을 알아야만 합니다.
부자는 이미 돈 맛을 알았습니다. 돈을 쓰는 맛이 좋다고 하지만 버는 맛도 무시하지 못 합니다. 돈을 벌면 세상사람 모두가 다 부러워하는데 그 우월감이라는 맛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방법이 없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쌓아둔 돈에 대해 죽는 것이고, 그 돈 전체를 하나님의 계획 앞으로 내밀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교회에 돈을 바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돈을 헌금으로 내고 구제를 위해 쓰라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돈을 쓰시는 용도 안에는 여러분의 옷값도 있을 수 있고 자동차를 사기 위한 돈도 있고, 휴가를 가야할 돈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대로 물건을 사고 휴가를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돈에 대해서 죽고 온전히 하나님의 맛으로 충만해지면 됩니다.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오래 된 볶음김치 하나로 밥 한 그릇을 해치울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배부른 상태를 만들면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여행을 가도 마음으로 침 흘려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을 사도 마음으로 원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른 상태에서 사라고 하시는 것을 사게 되고, 가라고 하시는 곳에 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 잔치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홍어 맛을 알아야 전라도 잔치에 참가해서 즐거울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맛을 아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없다는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했지만, 우리의 삶에서 어떤 사람은 조금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더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없음을 만들어 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맛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에, 돈이 보이면 돈에 대해서 죽을 수 있고 건강이 보이면 건강에 대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맛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하나님 맛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못 배웠기 때문에 처음부터 잘못 배웠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맛있어 하는 것을 만들어 주시는 요리사가 아니십니다.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기에 요리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음식으로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배운 예가 모압 여인 룻입니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기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때에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는 동안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하여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첫째 며느리는 오르바였고 둘째 며느리는 룻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론과 기룐까지 죽고 이 집안에는 세 명의 과부들만 남게 되었고 남은 재산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에는 양식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이제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에 두 며느리가 따라오다가 나오미의 만류로 오르바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릅니다.
룻기 1장 16~18절을 보면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룻은 시집와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날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며 사는데 남편이 죽었고 아들 둘도 죽었습니다. 손자 손녀도 없고 재산도 하나도 안 남았습니다. 거지 상태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보니 나오미는 아무것도 안 남기고 가져가신 그 하나님을 여전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룻은 이러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진실을 배웠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다 가져가시고 살아 갈 이유가 없는데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붙잡고도 살아갈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받아들입니다. 이방나라에 만연해 있던 신들은 모두 풍요와 다산을 약속해주는 우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나오미의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풍요와 다산을 주시기는커녕 있는 것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룻이 시집와서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그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룻도 그 하나님을 붙잡기를 선택합니다.
나오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배운 룻은 하나님께 무엇도 바랄 수가 없었습니다. 나오미에게서 남편도 두 아들도 재산도 모두 가져가시고 거지꼴로 만드신 하나님께 대체 무엇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오미는 괴로움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룻은 풍요와 다산보다도 하나님이 더 좋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부부생활에서도 발견됩니다. 아내가 매일 남편에게 돈 못 벌어온다고 타박을 합니다. 그 때에 남편이 정색을 하면서 그럼 이혼하자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자 억울하고 괴롭습니다. 돈 없어서 힘들다고 불평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부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을 잃고 두 아들까지 잃었으니 괴로움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절대로 하나님을 놓지 못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서 풍요와 다산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갖고 싶어 하는 가치들이 없어도 놓을 수 없는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룻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오니 추수 때였습니다. 빈민층들이 남의 밭에서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 먹고 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무슨 욕심이나 야심을 가지고 기어코 성공하고 말리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빈민층 사람들이 하는 대로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어다가 시어머니와 함께 연명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이윽고 다윗의 증조할머니로써 다윗 왕가에 입적이 됩니다. 그러나 룻은 다윗의 혈통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런 영화로운 일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를 주시는 하나님이 아닌 가져가시는 하나님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 마음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져가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생활화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치냉장고 밑바닥에 깔려서 결코 손길도 눈길도 주지 않았던 오래 된 볶음김치인 하나님을 먹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세상이라는 부엌의 모든 반찬을 십자가로 치워버리시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맛을 알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고 그래야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연말이 되어 돌아보니 어떤 분은 전셋집에 살다가 월세가 되신 분도 있으실 것이고 내 집에 살다가 전세로 바뀌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돈은 없고 빚만 커진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자녀들은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목사님들은 목회현장에 대체 누가 올까 막막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 어디서 누굴 데려와야 이 공간을 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한심하고 막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먹고 하나님 맛을 보라고 없애고 계신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빈민으로 살아갈지라도 룻처럼 하나님 한 분을 맛보는 것으로 삶을 살아가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보아스 남편을 준비하셨듯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맛에 충실하면 됩니다.
연말에 좀 흑자가 생기셨습니까? 건강이 안 좋았는데 병원 다니다보니 좋아지셨습니까? 그럴지라도 십자가에서 있는 것들에 대해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없는 자들은 없는 아쉬움과 염려를 십자가에서 죽여야 하고, 있는 자들은 세상의 맛을 느끼는 것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합니다. 그래서 김치냉장고 밑바닥에 넣어둔 오래 된 볶음김치처럼 취급해온 하나님을 이제는 꺼내야 할 것입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하나님 먹고 배부른 시간들을 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를 시작해서 룻의 남편감으로 보아스를 준비하신 것과 같은 일들이 우리에게 벌어지더라도 앞으로 세상이 주는 맛에는 길들여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맛에 충실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김치냉장고 밑바닥에 오래 된 볶음김치로 취급 받아 오셨습니다. 이제는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보다도 내 마음에서 맛있고 기쁨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 시도 십자가를 놓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에 대해 날마다 죽어서, 오래 된 볶음김치로 취급하는 하나님으로 배부르시기를 바랍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여섯 번이나 없음을 고백한 후에 일곱 번째에 하나님을 먹고 모든 괴로움을 극복하고 사슴이 높은 곳을 뛰어오르는 것처럼 평강을 누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 하나님을 날마다 배터지게 드시면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하박국 선지자의 여섯 번 없음을 날마다 재현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없다면 아쉬움에 대해 죽게 하시고, 있다면 있음에 대해 죽게 해주셔서 아무도 찾지 않는 김치냉장고 밑바닥에 오래 된 볶음김치와 같은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진정으로 기쁨과 만족의 배부름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