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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한 사람이 귀합니다 (스 2:1-70)
성경을 읽다가 오늘과 같은 본문이 나오면 우리는 그냥 지나쳐 버리기가 쉽습니다. 지루하기만 하고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의 이름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사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읽는다 할지라도 성경말씀이니까, 그냥 의무감으로 읽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도 할 수 없이 이 장을 살펴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전에 제가 수요예배 시간에 에스라서를 강해할 때에는 2장을 뛰어넘어갔습니다. 1장에서 3장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에스라서를 살펴보면서, 저는 이 말씀을 꼭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기록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그 숫자는 그냥 지나쳐 버리리거나 무시될 수 없는 이름이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뉴스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들을 듣습니다. 어디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디에서는 화재가 나서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비행기가 추락해서 수십명 또는 수백명이 죽었다는 소식도 듣습니다. 어디에서는 자살테러가 일어나서 수십명이 죽고 또 보복으로 미사일을 쏴서 수십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별 느낌을 주지 못합니다. 그냥 죽었나보다 하는 정도입니다. 만약에 뉴스 시간에 교통사고로 한 사람이 죽고 몇 사람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안됐다는 생각보다는 ‘뭐 그 정도를 가지고 무슨 뉴스에서 보도를 하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도 수십 명 이상은 되어야 뉴스감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무디어졌을까요? 하도 많은 사건과 사고 소식들을 접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나와 관계가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나,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뉴스에서 나온다면 귀가 번쩍 뜨일 것입니다. 수백명의 명단이 나와도 일일이 그 명단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 수십, 수백명이 죽는 것보다 내 자식이 감기에 걸린 것이 더 큰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에 무관심한 것은 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 어디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의 명단’이라 하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아마도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내 가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또는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유심히 살피게 될 것입니다.
해마다 교인수첩이 나오면 여기저기에서 이름이 틀렸다는 둥, 주소가 잘못나왔다는 둥 전화번호가 틀렸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굉장히 신경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또 많은 오류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틀림없이 수정을 했다고 생각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오류가 나와서 살펴보았더니 수정해 놓은 것을 인쇄소로 보낸 것이 아니고 수정되지 않은 것을 인쇄소로 보낸 것입니다.
남들은 별 관심없이 보게 될 교인수첩의 명단이나, 주소 전화번호들을 우리는 자세히 살피게 됩니다. 나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자식 이름만 조금 잘못 나와도 속이 상합니다. 주소가 잘못 나오고 전화번호가 틀려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에 내 이름이 빠졌으면, 목사가 나에게는 관심도 없나보다 하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 숫자, 그것은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베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에스라서에서 가장 관심있는 장이 몇 장일 것 같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2장일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내 이름이나 내 가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가슴이 뛸 것입니다. 그 숫자가 정확하게 내 가정의 숫자와 일치할 때, 나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할 것입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그 숫자가 잘못되었으면, 어째서 한 사람이 누락되었느냐고 따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사람들의 이름이 자세하게 나오고 그 숫자가 자세하게 나오는 것을 지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심해서 한 사람 한 사람 그 이름을 기록하거나, 또는 그 숫자를 일일이 헤아려서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그냥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 또는 구원받은 무리들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숫자가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자식을 한 두명 밖에 낳지 않지만, 예전에는 주시는대로 능력껏 나았습니다. 그래서 한 가정에 열명 이상의 자녀를 가진 가정도 꽤 많았습니다. 아마 줄줄이 열명 정도 자식을 낳으면 누가 누군지도 헷갈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을 자기 배아파서 나은 부모는 그냥 내 자식들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인격체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느 자식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자식도 빼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의 숫자를 보십시오. 대충 몇 명 정도라고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마지막 단자리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몇 절만 보십시오. (3-6)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다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성전을 짓겠다고 다시 본토로 돌아온 사람들의 총 숫자는 64절에 보면, 42,360명입니다. 그 외에도 노비가 7337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이요, 말이 736마리 노새가 245마리 약대가 435마리, 나귀가 6,720마리입니다. 노비의 숫자뿐만 아니라, 함께 돌아온 짐승 숫자까지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왜 오늘 제가 이처럼 숫자 노름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한 사람의 중요성을 알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 한 사람의 중요성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 예수 믿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회중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자리에 혼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마 혼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예배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예배 드릴 사람이 나 혼자밖에 없는데도 예배 시간에 늦게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저 뒤에 앉아서 그냥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예배드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수만명이 나와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 한 사람이 한 사람과 일대일로 관계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전체 회중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체 회중 가운데 한 사람정도는 무시하고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첫성 여리고를 함락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그 성의 것들을 하나도 취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을 다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모든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가르쳐주시는 명령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아이성이라는 작은 성의 전투에서 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범죄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것을 색출해 내어서 그 한 사람의 죄를 물으신 이후에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나 한 사람쯤이 하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계십니까? 백명이 넘게 예배를 드리는데, 나 하나 빠진다고 문제가 있겠는가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 한 사람만이 이 교회의 성도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목사가 일주일 내내 말씀을 전할려고 말씀을 준비하고 예배를 준비했는데, 하나 뿐인 성도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예배는 꼭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쉽게 빠지는 것은 내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억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세상 모든 만물들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풀 한 포기부터 셀 수 없는 저 우주의 별들까지 다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바쁘고 정신이 없으니까, 나 한 사람 어떻게 살아가는지 까지는 별로 신경 쓰시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은 내 기준으로 하는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에 나 한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여러분은 혼자 예배 드리는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도 부르는 둥 마는 둥 불러서는 안됩니다. 혼자 예배를 드리는데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성도가 나 한 사람인데, 교회의 일이 있는데 내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빠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대충 ‘어디 지역에 사는 사람들 오너라’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나를 기억하시고 내 이름을 아시며 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흘리실 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그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그 피를 다 쏟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할 사람이 전부 50억명이라고 했을 때에, 나는 그 50억명 중에 하나이니까, 나를 위해서 흘리신 피는 1/50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그 모든 고난과 흘리신 모든 보혈이 바로 나 한 사람을 위해서 받고 흘리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사람이 모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 돌아왔습니다. 성령은 그렇게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가 아니라, 누구 누구가 돌아왔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일어서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라고 했으므로 모두 일어나니까, 나 한 사람쯤이야 빠져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모두 해 버리면 아무도 일어서지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 모두라는 말 대신에 우리는 오늘 본문처럼 그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면서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모두 일어섭시다. 하고 말할 때에 듣는 여러분들은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신동만 장로님은 ‘신동만 장로님이 일어서야 합니다.’로 들어야 합니다. 김영근 장로님은 ‘김영근 장로님이 일어서야 합니다.’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모두 다 일어납시다. 이제는 자다가 깰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다 일어서야 합니다.
‘신동만 장로님 일어서야 합니다. 김영근 장로님 일어서야 합니다. 박상태 집사님 일어서야 합니다. 황윤식 집사님 일어서야 합니다, 권회광 집사님 일어서야 합니다. 이동기 집사님 일어서야 합니다. .....................’
한 사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무리 속에 묻힐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가기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묻히기 좋기 때문입니다. 수천명 가운데 있으면 내가 안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나오는지 교회에 봉사를 하는지, 그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익명성이 편한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 것이 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일대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나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대안교회 성도들, 동산교회 성도들, 제일교회 성도들, 순복음 교회 성도들 이렇게 기록해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62절에 보면, 제사장의 무리 가운데서 아무리 찾아도 그 이름이 없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결국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나오기 전까지 부정하게 여겨지게 되었고, 제사장 직분을 행치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성물도 먹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계시록 20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불못에 던지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 석자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못 하나가 빠져서 성전이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벽돌 한 장이 없어서 완성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잘못된 부르심이나, 쓸데없는 부르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꼭 필요한 존재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남음도 부족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나 혼자 빠져나갈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빠짐으로 인해서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우리의 몸으로 비유합니다. 몸의 기능 중에 어디 한 곳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몸 전체가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모두는 일어서야 합니다. 이대로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모든 부분들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섬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권세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제외되는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회복이 곧 교회의 회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회복되지 않음으로 교회가 회복되지 못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일어서지 않음으로 교회가 일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기도를 회복하십시오. 말씀을 회복하십시오. 섬김을 회복하십시오.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박상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