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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53
마태복음 6장 5-13절 [제98-99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8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유익들을 전하시는 외적 수단들은 무엇인가 했을 때 외적이며 보편적인 수단들로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이 중 말씀에 대해서는 89문과 90문으로, 성례에 대해서는 91문부터 97문까지 설명하고 오늘부터 보게 되는 98문 이하 107문까지가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선 기도의 정의부터 살펴보면 98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98문.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요16:23)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시32:5-6, 단9:4) 하나님의 긍휼을 감사드리며(빌4:6)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요일5:14) 우리의 바램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시62:8).
기도의 참된 대상은 믿음의 유일한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종교에도 보면 기도하는 일이 있고,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위급한 일을 당하면 알지 못하는 어떤 대상에게 기도하는 일이 있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다 거짓 된 신이라고 할 때 기도의 참된 대상 그리고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9문에서는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합니까?”란 질문이 있는데, 이렇게 답변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마음을 살피시고(왕상8:39, 행1:24, 롬8:27), 요구를 들으시고(시65:2), 죄를 사하시고(미7:18), 모든 소원을 이루실 수 있고(시145:18,19); 유일하게 믿을 분이시고(롬10:14), 경건한 예배로 경배 받으실 분입니다(마4:10). 예배의 특별 부분인 기도는(고전1:2) 모든 사람에 의해 다른 그 누구도 아닌(롬10:14)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시50:15).” 달리 표현하면 세상이 말하는 신들의 경우 마음을 살필 수도 없고, 요구를 들을 수도 없고, 죄를 사하지도 못하며, 모든 소원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역사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만이 살아 역사하느냐? 하나님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한 기도의 대상이라고 할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요리문답 180문에서는 좀 더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의 약속을 확신하고, 그를 위해 긍휼을 구하되(요14:13,14, 16:24, 단9:17), 단순하게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마7:21)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로부터 기도할 용기와 기도할 때의 담대함과 힘과 응답의 소망을 얻어(히4:14-16, 요일5:13-15)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그의 이름만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령에는 순종하고, 그의 약속에는 확신을 가짐으로써 부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긍휼을 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를 통해 베푸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를 통해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또한 기도할 때 담대함과 힘과 응답에 있어 소망을 얻어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이어 대요리문답 181문에서는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하는데,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 죄악 되서,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하나님과의 거리가 너무 커서 우리는 중보자 없이 하나님의 존전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요14:6, 사59:2, 엡3:12). 오직 그리스도 외에 저 영광스런 사역으로 정해졌거나 그 사역을 위해 적합한 자는 하늘이나 땅에 전혀 없습니다(요6:27, 히7:25-27, 딤전2:5).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골3:17, 히13:15).” 인간이 얼마나 죄악 된지, 그리고 그 죄악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지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은총을 입었지만 점과 흠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깨끗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부패함이 있고 그 부패함이 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무엇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가? 무엇만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까지 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에서 가르치는바 천사의 이름이나 성모 마리아의 이름, 그 외 다른 성자들의 이름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가증스런 것입니다. 토마스 빈센트는 그의 소요리문답 해설에서 이것과 관련해 몇 가지를 언급하는데,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떤 피조물에게 우리의 기도가 드려진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기도와 다른 모든 종교적 예배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더군다나 어떤 성도들에게 기도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과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천사에게, 그리고 그 외 어떤 피조물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헛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둘째 천국에서 무리를 위하여 오직 한 중보자와 도고자가 있을 뿐이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칩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일서 2장 1절에서는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중보자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도고자로서 어떤 천사나 성자들의 이름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짓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약 성도들의 경우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할 수 있는가? 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 자체는 없을 수 있지만 적어도 약속하신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예표적 제사를 드렸다면, 또한 그런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의 예배와 기도를 받으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 맨 처음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곧바로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3장 15절 말씀, 소위 원복음이라는 말씀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 이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오는데,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가? 창세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기 때문이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기 때문인가?(창4:3-4) 소위 제물 자체 때문인가? 물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11:4)고 말함으로 제물과 관련해서 생각하도록 하고 있지만, 제물 자체보다 믿음으로 드렸는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때 믿음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제물이란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가,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와 관련된 것입니다.
결국 구약 처음부터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고는 예배도, 기도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성으로 취하신 것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으시는 겁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대요리문답 182문에 보면 이런 문항도 있습니다. “어떻게 성령이 우리로 기도하도록 도우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지만 그런 기도에 대하여 누가 우리를 도우시는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가?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이 우리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 그리고 어떻게 기도할지 모두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심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때에 동일한 분량으로 하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사 기도의 의무의 바른 실행을 위해 필요한 이해들과 애정들과 은혜들을 소생시킴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롬8:26,27, 시10:17, 슥12:10).”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무지하고 또한 기도하는 데 있어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더라도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위선적으로 기도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또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나아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리셔서 우리를 도우시는데, 이때 신비적인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시는 안 되고 계시된 말씀의 깨닫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대요리문답의 경우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서 183문에서는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184문에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185문에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선 대요리문답 183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전체 교회(엡6:18, 시28:9); 위정자들(딤전2:1,2), 말씀 사역자들(골4:3); 우리 자신(창32:11), 우리의 형제들(약5:16), 우리의 원수들(마5:44); 살아 있거나, 앞으로 살 모든 부류의 사람들(딤전2:1,2, 요17:20, 삼하7:29)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삼하12:21-23)이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으로 알려진 자들(요일5:16)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대요리문답 184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모든 것들(마6:9), 교회의 안녕(시51:18, 122:6),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선(마7:11, 시125:4)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법적인 것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요일5:14).”
대요리문답 185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경외심 가득한 이해(전5:1),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창18:27, 32:10) 궁핍과(눅15:17-19) 죄들에(눅18:13,14) 대한 깊은 감각; 회개와(시51:17) 감사와(빌4:6) 넓은 마음(삼상1:15, 2:1); 이해와(고전14:15) 믿음과(막11:24, 약1:6) 진실과(시145:18, 17:1) 열성과(약5:16) 사랑과(딤전2:8) 인내를(엡6:18) 가지고, 그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마26:39) 그를 섬기며(미7:7)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내용으로 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할 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우리의 바램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죄에 대한 고백,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 그리고 우리의 바램들을 간구하는 것인데, 마지막 내용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으로 우리의 바램들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바램은 무엇과 일치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바램, 소위 계시된 말씀과 상관없는 바램은 간구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9문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바램이 무엇인가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합니다.
제99문. 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해 우리를 지도하시기 위해 주신 규범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전체 말씀은 기도에 대해 우리를 지도하시기에 유용합니다(요일5:14). 그러나 특별한 지도 규범은 보통 주기도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그 형식입니다(마6:9-13, 눅11:2-4).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할 때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도의 규범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개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회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면 그 긍휼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내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한 예로 주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 6장에서는 다음의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5-33)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면서 하나님께 이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시며,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를 누구와 비교하시느냐?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와 비교하십니다. 그렇게 화려한 솔로몬의 영광도 이 꽃 하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런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보다 더 귀한 대상이 누구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겁니다. 그런 너희를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때문에 너희는 무엇을 먼저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란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관련해 특별한 지도 규범으로 주신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으로 읽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 이하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 서문이 있고, 기도의 내용으로 여섯 가지의 간구 내용이 있고, 마지막으로 결말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 주부터 하나씩 살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부분은 마태복음 6장 5절부터의 내용인데, 5절 이하 8절은 기도의 자세와 관련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선 5절을 보시면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절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2절에서 4절은 구제의 예로 들고 있고, 5절에서 8절은 기도의 예를 들고 있는 부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할 때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무와 같은 자인 줄 아는 것, 그런 우리를 채우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 외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죄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죄는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무엇으로 채우시는가?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용서하시고 난 뒤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채우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 앞에 어떻게 우리가 마치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기도를 통해서도 자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이 누가복음 18장 11절과 12절에 나오는데,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심지어 감사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겸손이 아니라 자신을 자랑하는 것으로 기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 자세에 대하여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6절을 보시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절이 기도에 대한 잘못된 자세라면 6절은 올바른 자세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공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런 기도까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적인 기도든, 사적인 기도든 기도는 사람을 의식하면서 사람의 칭찬을 바라면서 기도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님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앞서 대요리문답 185문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경외심 가득한 이해를 가지는 것, 나아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궁핍과 죄들에 대해 깊이 감각하는 것, 그래서 회개하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뜻에 대해서 겸손히 복종함으로 그를 섬기겠다는 그런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7절도 보시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이란 필요 없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늘어놓는 말인데, 왜 이런 기도를 하느냐? 하나님은 적은 기도보다는 많은 기도를 해야 더 들어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방인과 같은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방인과 같은 기도라고 하시는가? 사실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입니다. 그런데 다른 신들이 실제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상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전능하신 능력의 신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상으로 고안해 낸 신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를 들을 수도 없고, 들을 수 없다 보니 응답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여기에는 기도의 양이 사람의 지극정성과 맞물려 있습니다. 소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자세가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열심, 사람의 정성, 사람의 노력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따라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소위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15년 생명 연장을 받은 것에 대하여 기도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의 기도에 하나님이 감명 받아서 15년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논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이방인들처럼 듣지도 못하는 이방신, 그리고 응답할 수도 없는 이방신이 아니라, 들으시고 응답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러나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주님께서는 이 말씀 이후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실 때 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느냐?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란 겁니다. 그러나 아시기 때문에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니라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말로 기도해야지만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기도로 하나님께 기도하든, 아니면 적은 기도로 하나님께 기도하든 자녀의 기도를 언제나 들으시는 분이란 겁니다.
이런 하나님께 기도할 때 9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는 겁니다. 특히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따라서 역사하신다고 할 때 우리 뜻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하는 그런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것이 우리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런 저런 이유로 내 뜻을 기도하지만, 우리의 모든 기도는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이 가장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