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주인공은 토네이도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감동적인 휴먼드라마도, 주인공들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악전고투도, 대단히 인간적인 교훈도 딱히 이 영화 속에는 없습니다. 있어도 아주 소소하죠.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단지 토네이도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기만 할 뿐이에요. 즉, 토네이도와 관객 사이의 만남을 중개하고만 있을 뿐이죠.
이러한 접근은 마찬가지로 2014년도에 개봉한 <고질라(Godzilla)>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고질라입니다. 고질라와 다른 괴수와의 싸움이 주요한 전개를 형성하며, 인간은 그저 주변인으로 남을 뿐이죠. 고질라의 활약을 지켜보는 주변인의 시선으로서만요.
1990년대 말에 만들어졌던 여타의 재난영화들과 비교해보면 이와 같은 현상은 사뭇 의미있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마겟돈(Armageddon, 1998)> 같은 경우에도 똑같이 인간이 조우하게 되는 거대한 자연의 재난을 다루고는 있지만, 분명 거기에서는 주인공의 자리에 인간이 놓인다는 것은 분명했거든요. 또한 재난 자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권도 행사할 수 있었고요.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재난에 대한 인간의 모든 권리는 묵살당합니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토네이도라는 자연현상은 그야말로 예측불허, 불가해, 통제불능의 3박자를 다 갖추고 있죠.
토네이도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압도적인 위용에 놀라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통제권을 놓은 채 다만 관찰하는 것뿐이죠. 지금 여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요.
바로 그렇게, 토네이도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정확한 확인은, 인간이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에만 초점을 맞춰주게 됩니다. 그리고 보통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토네이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방식으로요.
미국의 실존주의 심리학의 기틀을 다졌던 롤로 메이의 제자인, 그리고 그 자신도 명망높은 실존상담자로 활동하고 있는 커크 슈나이더는 우리에게 '경외(awe)'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그건 인간이 불가해한 현상을 만났을 때, 그 앞에서 보이게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슈나이더는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를 인용하며, 경외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종교심의 시작이라고 얘기하죠. 경외가 없다면 거기에는 종교적인 탐구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경외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명백히 확인하는 순간이며, 그 한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그어진 경계선의 안팎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경계선을 만나게 될 때, 자신이 놓인 경계선 안으로부터 그 경계선 밖의 미지를 향한 탐구심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모든 종교 탐구의 역사를 이룬 원동력이죠.
그런데 현대인은 이 경외의 감각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주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이 거의 모든 세상을 기획하고, 조직하며,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기 확신의 과잉입니다.
두 번째는, 무수한 정보의 소비로 인해 이제 인간이 세상에 대한 모든 정답을, 하다못해 종교적 차원에 대한 정답까지도 확보하게 되었다는 지적 확신의 과잉입니다.
물론 이 둘 다 착각의 소산입니다. 그 착각은 어떠한 현대적 주체가 만들어낸 결과인데, 그 주체는 다름아닌, 삼라만상의 관리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인간은 어느새 자연에 대한, 마음에 대한, 타자에 대한,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관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도구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신념이 인간의 태도에 뿌리깊게 스며들게 되었죠. 오늘날, 무수한 자기개발서들, 자기치유서들, 자기수행서들의 범람이 이를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외의 실종은 필연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죠. 바로 그, 인간의 자기팽창적 현실을 지시하기 위해서요.
근래에 출현한 재난영화들은 모두 다 인간보다 훨씬 거대한 위협을 인간 앞에 직면시킵니다. 그게 크툴루신화적인 악신의 형태든, 자연현상이든, 외계인이든 간에요. 그리고 그 위협은 인간이 결코 관리할 수 없는 무력한 한계성으로 설정됩니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한계를 노출하고, 경외의 감각을 재조명하기 위한 의도죠.
그리고 그 의도는 동시에 '인간이란 게 정말로 무엇인가?'에 대한 인간의 가치를 되묻습니다.
우리가 알게된 바, 적어도 이 영화들 속에서 인간은 관리자가 아닙니다. 도구적 이성의 해석으로 자신과 세상을 통제해나가는, 그러한 관리자적 정체성은 철저하게 붕괴됩니다.
그럼 인간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정확하게 탐구자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기에, 신이 되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관리하려는 불가능한 기획을 꿈꾸지 않고, 늘 자기라는 경계선 밖에 있는 신비로운 미지를 겨냥하여 여행하는 탐구자입니다.
한계는 우리에게 경외를 불러일으킵니다. 경외는 우리를 탐구자로 만듭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세상이 지루한 건, 인간이 관리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관리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뻔한 것을 하기에 늘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탐구자의 현실은 다릅니다. 탐구자에게는 늘 모르는 것 투성입니다. 그래서 배움의 즐거움이 허락되는 건 늘 탐구자뿐입니다.
우주의 모든 정답을 소유한 관리자가 되는가, 혹은 우주의 모든 미지를 통해 배우는 탐구자가 되는가, 이 선택은 우리의 모든 삶의 질감을 확연하게 뒤바꿉니다. 늘 지루함이냐, 늘 생생함이냐죠.
이 영화를 보시려면 꼭 4DX 상영관에서 봐보세요. 좌석 흔들흔들, 빗물 추적추적, 바람 쌔앵쌔앵, 번개 번쩍번쩍, 첨단도구들을 통해 토네이도와의 친밀감을 더욱 잘 형성할 수 있습니다. 도구란 정말로 이럴 때 쓰는 것이죠. 오직 미지를 향해, 그리고 인간의 재발견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