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탄핵 집회 참가차 아침 일찍 전철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오후 늦게 집회가 열려 오전엔 구로역에서 내려 인천행 전철을 타고 다시 온수역으로 이동 궁동의 권협, 권대임, 정선옹주 묘역을 찾았다
이 묘역은 우리 수촌 오시수 공의 장인인 권진 다시 말하면 저암공 오상유공의 외조인 권진, 외증조인 권대임, 외증조모인 정선옹주 묘가 있기 때문이다
묘역 앞에 도착하니 권대임 조부인 충정공 권협의 신도비가 먼저 반겼다
권협은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으로 할아버지는 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 권진(權振)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권상(權常)이며, 어머니는 나운걸(羅云傑)의 딸이다. 이관(李琯)의 문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사예·승문원·춘추관 등의 벼슬을 거쳐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신도비문의 찬은 조경, 전서는 허목, 글씨는 조위명으로 당대 후손이 남인으로 활동을 한 흔적이 보인다
1589년 각 도에 괴질이 발생하자 함경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돌보고 제사를 올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장령으로서 서울을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6년에 교리·시강관을 거쳐 이듬해 응교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태의 시급함을 알리고 원병을 청하였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 이정(李楨)이 우리나라의 지세를 알고자 하므로,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보병과 수군을 얻고 군량을 조달하게 하였다. 돌아와서 예조참판·호조참판이 되었으며,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604년 대사헌이 되었고, 특명을 받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으며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가 되었으나, 광해군 때에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권협의 묘에서 바라보는 궁동의 모습이다
구로구 궁동에 있는 이 묘역은 조선 후기 정선옹주가 출가했던 안동권씨의 묘역이다. 정선옹주는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7녀로, 세도가인 안동권씨 집안의 권대임과 결혼해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 일대에서 살았다.
궁동이라는 명칭도 그들이 궁궐 같은 기와집에서 살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정선옹주 묘역에는 정선옹주 남편 권대임의 묘를 비롯해 여러 기의 안동권씨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묘역은 흔히 풍수가에 의해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위 사진은 이 묘역의 수구처이다 지금은 시민들의 산책로로 쓰인다
이들의 묘는 조선 공신 묘역 조성 방식의 귀중한 사례가 되고 있으며, 묘역의 신도비와 묘비는 당시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권협의 아들이자 권대임의 아버지는 권신중인데 이곳에 그의 묘는 아들의 묘인 이곳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조부인 권협 바로 아래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묘가 있다 왕실의 며느리라 그런지 정선옹주가 20세에 일찍 죽어 먼저 묘를 쓰인 상태이기에 그런지 모르겠다
권대임은 당시 부평부(현 궁동 일대)에 살고 있었는데, 선조는 이곳으로 시집을 가는 정선옹주에게 해당 지역 인근의 땅을 하사하였다.
당시 권대임과 옹주의 집이 매우 크고 으리으리한 궁(宮)과 같다 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궁동(宮洞)이라는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그러나 정선옹주는 1614년(광해군 6년) 음력 8월 1일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사후 궁동에 있는 시댁 식구들의 묘역에 묻혔으며, 1645년(인조 23년) 남편 권대임도 이곳에 같이 묻혔다
정선옹주의 어머니 정빈 민씨는 성격이 어질고 예절을 잘 지켰는데, 옹주도 이러한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항상 근신하고 부덕을 잘 지켰다고 한다
권대임은 조선중후기 문관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홍보(弘輔)이다
예조판서 권협(權悏)의 손자이자 권신중(權信中)의 아들로 어머니는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7세손인 전주이씨이다.
1604년 정선옹주와 혼인해 길성위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나 장인어른인 선조로부터 총애를 받았으며, 1618년에는 한효순,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할 때 함께 정청에 나아갔다.
인조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능양군을 호종하였다. 1635년(인조 13년) 선무공신 3등이었던 권협의 적손이라는 이유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는 어가를 수행하였다.
그밖에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고, 1645년 12월 13일(인조 23년 음력 10월 26일) 향년 51세를 일기로 죽었다.
아들인 권대임 묘 아래에 있는 권신중의 묘이다
당대 이 안동 권씨는 길성위 권대임 말고도 선조 사위로 또 한명이 간택된다 바로 권대항이다
권대항의 자는 응정(應貞). 할아버지는 도승지 권희(權憘-권협 형제)이고 아버지는 권익중이다.
1630년(인조 8) 선조의 13여 정화옹주(貞和翁主)와 혼인, 이듬해 동창위(東昌尉)에 봉하여졌다.
권대임에게 선조의 막내딸 정화옹주의 남편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은 재종동생이 되는 것이다.
권대임 재종동생으로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대운도 있다
우리 동복오씨하고는 상당히 친해서인지 당시 인척관계로 얽혀 있다 이미 거론한 수촌공 장인으로 권대임 아들 권진이 있고 권신중 동생 권정중의 증손 권응경은 채제공의 장인인 오필운 공과 인연을 맺여 오필운 장인이 권응경이다
다시 말하면 정조때 정승 채제공의 처 외조가 안동권씨가 되는 것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권신중 묘갈을 허목이 전서한 것으로 보인다 비문이 마모되어 누구 글씨인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이 가문도 남인으로 정치색을 갖게 되어 결국 조선후기 송시열의 나라에서 폐족이 되게 된 것 같다
비문에 우리 수촌공 오시수와 저암공 오상유 내용이 나온다
역시 수촌공과 같이 권진의 사위인 풍산 홍씨 홍만조의 비문이 보인다
이 묘가 바로 권대임 아들이자 정선옹주의 아들 돈녕부봉사 권진의 묘이다
정선옹주가 일찍 요절해서 아들 하나밖에 두질 못했는데 다행히 그 아들 권진은 아들 2, 딸 2을 두게 된다
큰딸 권정일(權靜一)의 남편이 우리 수촌공 오시수이고 둘째아들 권이경, 세째아들 권수경, 그리고 네째 딸 권정순(權靜順)의 남편이 바로 홍만조 공인 것이다
이 묘가 조성될 즈음엔 우리 수촌공 오시수 공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의 무고에 의해 사사되고 역시 권이경, 권수경 형제들도 서인들의 탄핵에 정신적 고초가 컸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묘비를 조성한 이는 그나마 서인 중진인 홍만용(홍주원과 정명공주의 아들)을 재종 형제로 둔 정익공 홍만조의 찬으로 이루어지게 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홍만조 공도 남인이었지만 홍만용과의 연고로 서인의 남인 공격 때 그나마 살아남게 되는 몇 안 되는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글씨는 당시 글씨를 잘 쓴 인물로 대표되는 우리 동사공 오정위 공의 장인인 박유공(함양박씨, 박대립 손자)의 후손 박경후가 썼다 박경후는 우리 수촌공의 신도비문도 기사환국 이후 쓴 인물이다
역시 후손들에 대한 비문이 나타난다 권신중 비문에선 보지 못하는 홍만조의 자손 홍중형, 홍중휴, 홍중인, 홍중흠이 쓰인 것으로보아 확실히 한 세대 아래 비문으로 보인다
돈녕부봉사 권진의 묘 옆으로 권대임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가 일정하게 있지 않고 이곳 저곳에 산재해 있는 모습이다 후에 옮긴 이의 잘못인지 무언가 뜻이 있어 그 자리에 세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권대임 신도비 맞은 편으로 궁동 생태공원이 보이고
권대임 신도비문은 허목 찬 이징구 서 권규 전으로 되어 있다
이 비문엔 저암공 오상유 외 진사공 오상부까지 각인되었고 좌랑 홍중휴, 교리 홍중인, 문과 홍중징으로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돈녕부봉사 권진의 묘에서 약간 아래쪽으로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묘가 있는데 묘비는 없이 상석으로 되어 있다
아들 권이경의 묘이다 문인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벼슬을 한 듯 한데 묘비가 없다는 것은 그 후손들이 몰락했음을 반증해준다
다음은 정익공 홍만조의 시이다
1월 5일 밤에 죽은 벗 권사정(권이경)의 꿈을 꾸다 절구 2수
正月初五夜夢亡友權士正 二絶
창가에서 손 잡던 밤 握手虛窓夜
병든 모습 예전 그대로였네 依然病裡容
몇 차례 울음소리 그치지 않다가 數聲啼不盡
새벽 종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네 殘夢破晨鍾
꿈 꾸었으니 영혼이 감응한 것인데 有夢應相感
말 없었으니 무슨 마음이었나 無言亦底心
저승과 이승의 사람 일이 다르니 幽明人事異
슬픈 눈물이 절로 옷깃을 적시네 哀淚自沾襟
홍만조 공과 권이경 공은 나잇대가 비슷해 가까운 친구로 지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처남 손아래 매부간이긴 하지만...
권이경 묘 앞에 있는 또 다른 묘. 상석 글씨도 없어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묘이다
혹시 권이경이 아들 권세항을 두었는데 그의 묘인가?
권세항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구(汝久). 권대임(權大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진(權瑱)이고, 아버지는 정랑 권이경(權以經)이며, 어머니는 도승지 정륜(鄭錀)의 딸이다.
1693년(숙종 19)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5년 남구만(南九萬)이 6품으로 올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사헌부로부터 한원(翰苑)의 피천인(被薦人)으로서 사소(邪疏)에 참여하고 인망이 없으므로 삭천(削薦)되어야 한다고 탄핵을 받았다.
1701년 사서(司書)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주 유학(幼學) 최세일(崔世鎰)이 알성시의 부정을 상소한 가운데 알성시에 급제한 홍만우(洪萬遇)가 권세항의 사촌으로 급제하였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1705년 장령이 되고, 이듬해 필선·수찬·헌납 등을 지냈으며,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71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여 승지가 되었다.
1722년(경종 2)에 경주부윤이 되어 경주에 있는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을 철거하도록 하고, 이를 반대하는 선비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 일로 사후에 관작이 환수되었다.
그렇게 오늘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묘역 탐방을 마쳤다
보통 다른 곳에선 이정도 묘역이면 보통 사람 접근을 엄격히 통제하느라 탐방하기 쉽지 않은데 그래도 남인 계통이라 볼 수 있어서 상당히 기뻤다 애써 서울까지 왔는데 못 보고 가면 여간 아쉬운게 아니다
그렇다고 문중 관계자에게 양해 구하기도 쉽지 않은 탐방인데 말이다
정선옹주묘역 옆에는 궁동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생태탐방로, 산책로, 쉼터정자, 운동기구 등이 있어 산책하기 좋으며 25,000여 본의 다양한 꽃과 나무가 식재되어 있고 100여 마리의 비단잉어들이 저수지에 노닐고 있는 등 서울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풍광과 생태 환경을 자랑한다.
정선옹주묘역과 함께 연계하여 방문해 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