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무문관발문(無門關 跋文)
역(譯)
위로부터 부처님과 조사님들께서 들어 보이신 기연은 관(款)에 의해서 안을 매듭을 진 것이다.
처음부터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나 머리에 덮인 것들을 들어 벗겨서 맑은 눈을 들어내어 주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로 순응하여 다른 이를 쫓아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통방의 상사라면 잠깐 들어 보임을 듣고 곧 문득 그 뜻한 바를 알아 마침내 무문의 집에 들어서 또한 계급이 없는데 오른다. 활개치며 관문을 건너도 관리들이 묻지 않으리라. 보지 않았던가? 현사선사께서 문 없음이 해탈의 문이며, 뜻 없음이 도인의 뜻이니라, 하셨으며, 또 백운선사께서 밝고 밝게 아는 도가 다만 이놈이라 하였거늘 어째서 꿰뚫어서 지나지 못하는가? 이런 말들도 또한 이 붉은 흙투성이 된 소의 조는 꼴이라, 만약 무문관을 꿰뚫어 얻었다고 하면 일찍이 무문을 어리석게 베푼것이며, 만약 무문관을 꿰뚫어 얻지 못했다 해도 또한 허물을 지게 되리니, 소위 열반심을 깨닫기 쉽거니와 차별지는 밝히기 어렵다 한다. 차별지를 밝혀 얻으면 국가가 스스로 안녕하리라. 때는 소정개원원년 해제 5일전 양기 8대손 무문 비구 혜개 삼가 올림. 무문관 끝. 從上 佛祖垂示機緣 據款結案 初無剩語 揭翻腦蓋 露出眼睛 肯要諸人直下乘當 不從佗覓 若是通方上士 纔聞擧著 便知落處 了無門戶可入 亦無階級可升 掉臂度關 不問關吏 豈不見 玄沙道 無門解脫之門 無意道人之意 又白雲道 明明知道 只是者箇 爲甚麽透不過 恁麽說話 也是赤土搽牛嬭 若透得無門關 早是鈍置無門 若透不得無門關 亦乃 辜負自己 所謂涅槃心易曉 差別智難明 明得差別智 家國自安寧 時紹定改元 解制前五日 揚岐八世孫 無門比丘慧開勤識 無門關 終,
사족(蛇足)
무문관(無門關) 발문(跋文)는 무문관(無門關)을 저술(著述)한 무문선사(無門禪師)가 쓴 것이다. 서문(序文)은 책 맨 앞에 쓰는 글이고, 발문(跋文)은 책 맨 뒤에 쓴 것을 말한다. 무문관을 쓰게된 자의(自意)를 밝히고 있다. 사십팔칙(四十八則)을 끝내고 서말문(書末文)인 발문(拔文)이다. 위로부터 부처님이나 조사님들의 수시(垂示) 교훈(敎訓) 또는 제시(提示)를 열거해 놓았지만, 이것이 마치 법정에서 피의자의 진술(款)을 필기한 것 같다고 하면서 그러나 조금도 헛된말(剩語)이 없다는 말씀이다. 사십팔칙(四十八則) 칙칙(則則)마다 심혈(心血)을 기울려서 쓴 진실지어(眞實至語)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고칙공안(古則公案)을 보는 사람들은 공안(公案)에만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자기내면(自己內面) 자심(自心)을 반조(返照) 내관(內觀)하라는 말씀이다. 왜냐? 하면 진리(眞理)는 결국 마음 하나로 귀결(歸結)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 일칙(一則)인 조주무자(趙州無字)를 깨치면 사십팔칙(四十八則)을 다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 칙 한칙 다 보는 까닭은 각칙마다 원리원칙(原理原則)은 같으나 그것을 활용(活用)하는데는 다른 점이 있어서이다. 하나를 알면 자기낙처(自己落處) 화살이 떨어지는 곳, 갈 곳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사사비(玄沙師備) 선사께서도 말하기를 해탈(解脫)의 문(門)에서는 문(門)이 없다고 하셨다. 백운수단(白雲守端) 선사께서도 도(道)란, 대도(大道) 이놈이다, 라고 말했다. 본래(本來)가 청정(淸淨) 깨끗한데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해서, 깨닫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갈팡질팡 하게 하는 것이 우습지 않는가? 이다. 선(禪)이란?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원만(圓滿)하게 하기 위함이니, 무문혜개선사가 무문관을 쓸때는 깨치지 못한 사람들이 참고가 될가 해서 쓴 것이니, 각자 스스로 태평성세를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