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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
본문<요5:41~47>
지난주에는 요5:39-40절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율법대로 살기 위해 힘쓰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 율법이 바로 ‘예수 자신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었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갈3:24).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수단에 불과한데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생명으로 삼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과 예수님은 소통이 불가능 했고 언제나 충돌과 대립만 있었을 뿐입니다.
거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일로 촉발된 논쟁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 41절/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나는 사람들의 평가에 일절 관심이 없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앞 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가 성경을 왜 보는데? 영생을 얻고자 함이잖아, 그런데 정작 나를 영접하여 믿지를 않는구나, 이 한심한 놈들아~,..’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방금 읽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너희들을 억지로 설득해서 믿게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음으로만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나올 리가 만무합니다. 이러한 그들을 자신에게 나오게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에 불과 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각종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면 박수갈채를 보내며 예수님을 줄줄이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를 않았지요.
마26:53-54절을 보면 십자가 전날 밤에, 예수를 체포하러 온 군대에 맞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열두 군단의 천사를 명하여 언제든 로마 제국을 한 순간에 멸망시킬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에게서 영광을 취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힘을 사용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것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한 목표에 마음에 두시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ㅎ님의 뜻을 이루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들의 유일한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마귀가 예수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미혹 합니다. 즉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그리스도로 일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을 수 있다고 속삭인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취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일에만 마음을 두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예수님과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려는 본능에 붙들려 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이 ‘나는 예수님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예수님을 본받자’라고 해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아는 것은 죄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면 전 세계를 정복하고 최강자로 등장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들에게 엎드려 절하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는 처벌을 받게 했습니다(단3:1-6).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쥔 느부갓네살왕은 부러울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업적을 모든 인간이 알아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금 신상을 지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 엎드려 절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같이 인간의 자기영광 챙기는 욕망은 밑바닥이 뚫린 무저갱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삼상15장을 보면 사울왕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물론 ㅎ님이 도우셔서 승리한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의 지략과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인 양 자기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울 왕은 육적인 사람의 상징입니다. 자기 자랑, 자기 확장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높임을 받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죄인의 대표주자였던 것입니다. 그런 자는 항상 자기 기념비를 세우기에 여념이 없지요. 그래서 결국 ㅎ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숨겨진 악한 모습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죄에 붙들린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 하나님의 형상은 없습니다. 오직 자기 사랑, 자기 성취, 자기 영광의 욕망만 가득할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인간의 죄를 들춰내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릎을 꿇게 하시는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예수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예수와 단 한 순간도 함께 있질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었던 것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려는 욕망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에게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설교를 잘 해야지’ 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목회자의 설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될 수 없습니다(요1:23). 설교에 목회자의 사심이 담겨 있을 때 ‘광야의 소리인 십자가 복음’은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 설교는 사탄의 설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설교자가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설교자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설교자입니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바라보는 설교자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자입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설교자는 신자의 가능성을 부추겨서 사람의 열심과 정성으로 ㅎ님을 섬기면 그에 따른 보상이 온다고 가르치는 자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갈1장에서 사람을 좋게 하는 거짓 종이라고 말합니다.
<갈 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일찍이 갈라디아 지역에 전도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IX의 십자가의 피로서만 된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출몰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말씀도 지켜야 한다는 성화론자들이 교인들을 미혹한 겁니다.
교묘하게 믿음뿐 아니라 인간의 행함에도 의(義)가 있다고 섞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에 사람들이 혹 하고 쏠리고 만 것입니다. 쏠리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인간을 빼 버리는데 반해서 성화는 인간의 기쁘게 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엔 내 자랑거리가 없지만 성화엔 자기 자랑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뭔가 자기가 했다는 것이 있으면 자긍심을 갖게 되지요. 예수님이 다 하십니다.라고 하면 시큰둥해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도우십시오! 라고 하면 좋아 합니다.
하나님 일을 자기가 도운다고 해 보세요.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 내가 하나님의 일을 돕고 있다니, 거기에 얼마나 뿌듯하고 자긍심이 생기고 행복하겠습니까? 꼭 자원봉사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과 같아요.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의 말을 들어 보면 봉사하는 게 힘들어도 보람을 느껴서 좋다고 합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사상이 난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것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쫓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내가 만약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전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단호한 말은 복음 속에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요소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인간의 죄를 폭로하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도저히 ㅎ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는 무능함을 고발함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해체시킵니다.
반면에,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란? 이런 인간이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인간은 부정합니다.
복음은 인간 너희는 썩은 송장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무슨 의가 나올 수 있느냔 말입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거룩해 지고 의롭게 되려는 것은 다 썩은 배설물이니까,
그런 것 들고 나오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피만 앞세우고 나오란 말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안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을 다 기각시키니까 복음을 싫어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힘과 노력을 통해 구원을 쟁취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 주기 때문에 좋아 합니다. 칭찬 듣고 자긍심을 높이는 본성을 가진 자들이 인간인데, 교회에서 하나님을 도와서 일을 하라고 하면 얼마나 신이 나겠어요.
우리의 열심과 정성으로 구원도 받고 복도 받고 상급도 받으니까 힘을 냅시다 하면, 얼마나 신이 납니까? 그래서 마일리지 쌓듯이 행함의 바벨탑을 쌓아가는 게 사람의 성정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 자랑스럽고 자기가 변화된 모습이 자랑스러워지면 복음은 퇴색되게 됩니다.
예수님 피가 고맙지가 않아요. 자기 스스로 영광을 취하는 존재들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 시대에도 복음을 모르는 육적인 목사, 거짓 종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제쳐놓고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영광을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미 영광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뭔가 끊임없이 영광 돌릴 일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영광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빛이라 합니다. 그럼 예수 밖은 전부 어둠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빛을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빛으로 삽니다. 빛에 거한 사람은 자체적으로 빛을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형편과 상관없이 빛입니다.
예수 안에선 강도도 빛이고, 세리 같은 도적놈도 빛이고, 창기도 빛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빛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빛이 되는 것이 아니고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빛의 아들인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빛이 되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빛 된 삶을 사십시오! 라고 하는 것도 사기입니다. 빛 된 삶이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빛 된 삶이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빛이 되는 것도, 빛 된 삶도, 인간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참 빛이신 예수 안에 있으면 빛이고 그 안에서 살면 빛 된 삶입니다.
예수 밖은 무조건 어둠이고 어둠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행함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으니, 어찌 참 빛으로 들어 올 수가 있겠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들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증인된 선지자, 예수님, 사도들 모두 세상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아버지의 영광만을 취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42절/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유대인들은 누가 봐도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성과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성경을 사랑하여 치열하게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닿는 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이 영생의 길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해 놓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성경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생의 길로 마련해 놓으신 어린 양의 실체로 등장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앞세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하고, ㅎ님 말씀의 초점은 IX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이며 ㅎ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유행하고 있는 성경통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는 취지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통독이라는 방법을 통해 100번 1000번을 성경을 읽어도 그리스도는 볼 수 없다면 성경통독이 아닌 성경통곡일 뿐입니다. 오히려 ‘내가 몇 번 읽었다’라는 자기자랑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면 자기 행위가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행위를 자랑하는 자로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 43-44절/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가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소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던 유대인들의 실상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었다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44절에서 유일하신 ㅎ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란 바로 IX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유일하다는 것은 이것뿐이란 말입니다. 예수님 것만 아버지가 받는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받는 영광은 예수님의 영광 말고 다른 영광이 없어요.
아버지께로 오는 영광을 구한다는 말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자, 곧 예수님의 영광만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영접하는 예수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다른 예수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실 뿐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마1:21). 그러나 죄를 알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를 소망할 뿐입니다.
인간이 소망하는 예수는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형통을 가져다주는 신통방통한 예수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믿고 있는 예수가 바로 이 예수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해석되지 않은 성경은 사탄의 성경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 때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는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소망에 응답하시는 하나님만을 소망했습니다. 이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보낸 자들이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들이 외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올 것을 외쳤지만 이러한 선지자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대신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거짓 선지자들을 영접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고 꿈에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독교를 그냥 겉모습만 보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 없이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을 보지 못하는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요즘 신천지가 기승을 부립니다. 마산 부산 전주 등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목회자만 천여명 참석, 신도들 참여 수가 거의 2만 여명..인산인해..) 에전엔 신천지란 이름을 비밀에 붙였는데, 코로나 이후엔 당당하게 ‘우리가 신천지다’ 자랑하며 신분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일반 기독교 목사들이 거기로 회심해서 많이들 들어간다네요..(저도 거기 목사 장로들과 논쟁도 함).. 얼마나 성경을 모르면 이단을 분별하지 못해서 마귀 소굴로 들어 가겠는가요? 그럼 일반 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신천지 교세가 날로 커지는 겁니다. 작금의 기독교를 옹호하려고 말라는 것입니다(이미 거의 다 부패한 종교 집단으로 전락된 상태임)
내 영혼을 귀하게 여긴다면 복음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어선 안됩니다.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망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를 알아보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들이 영접하고 있는 예수는 다른 예수입니다. 기독교 어휘, 성경 어휘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휘는 거의 모두 왜곡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하나님, 성령님, 거듭남, 회심, 회개, 기도, 천국 모두 완전히 왜곡된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들입니다.
고후11:4절을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에게 이미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침투해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가 전한 복음을 알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다른 예수에 마음이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초대교회 때 이미 이러하다면 지금은 어떨까요?..말이 필요 없다.)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라는 주님의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이름으로 온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이 없이 등장한 다른 예수라는 말입니다.
• 45-47절/ 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이란 말은 ‘율법의 의도를 알고 있었더라면’ 이란 뜻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율법의 목적은 IX게로 안내하는 몽학선생 노릇입니다. 율법을 통해 죄인됨을 알게 되면 죄를 사해주시는 IX께로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모세를 믿었다는 말은 모세가 준 율법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영접 했어야 된다는 말이고, 지금처럼 너희들이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준 것은 흠 없는 짐승으로 예표된 십자가 지신 예수를 영접하라고 준 것 입니다. 제사를 통해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영접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 되고,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신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서신서들 역시 ‘하라, 하지마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과 동일한 맥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행할 수 없는 죄인임을 발견해서 그리스도께 나오라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신약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어떤 말씀을 본다고 하여도 끝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곧,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요5:23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할 때 가장 기뻐하시고 아들을 외면할 때 가장 화를 내십니다.
(오늘 말씀 마무리~)
예수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가 가짜입니다.
예수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패역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같은 무지랭이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그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제일 좋은 신앙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IX만 높이고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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