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현진 한때 회사 가까이에 있는 도서관을 통해 비루한 현실에서 잠깐씩 고개 돌려 인생의 희망을 곱씹곤 했다. 회사가 이사한 뒤에는 도통 도서관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니 OECD 국가 중 독서율 꼴찌는 당연한 것 아닌가. | 대학 졸업 직후 생각지도 않았던 취직을 하게 되어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는 정말 막막했다. 짜장면 배달을 해서라도 내 생계비를 벌어 창작의 길에 매진하리라는 야무진 꿈이 있었는데, 의외로 내 발목을 잡은 것은 한국의 가족주의였다. 식구 빚이 발등에 떨어져 매달 일정한 액수의 돈이 필요했고, 1년만 죽은 듯 지내려고 맘먹었지만 사무용 책상과 의자는 아무래도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회사는 중소기업의 많은 병폐를 고루 가진 곳이었다. 직원의 얼굴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었고, 급기야 절반 이상이 교체되었을 때는 신입사원의 이름을 외우려는 노력 따위는 포기하고 말았다. 남은 사람 사이에서는 갈 데가 없어서 다닌다는 비애감이 흑사병처럼 번졌다. 그 자괴감을 견뎌내는 일이 하루 업무 중 가장 힘겨웠다.
그때 논현도서관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뎠을지 모르겠다. 들어오기만 하면 줄줄이 퇴사하는 상사를 몇 명이나 보내며 일을 스스로 찾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온몸에 끈끈하게 감겨드는 자괴감을 이겨내기 위해 어디론가 도망쳐야만 했다. 그렇지만 회사원 주제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다행히 10분 거리에 논현도서관이 있었다. 그들은 한 번에 두 권씩만 책을 빌려주어서 나는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책과 읽고 싶은 책 한 권씩을 신중하게 집었다. 또래들은 학부 때 다 떼는 리영희·서준식 선생과 <난쏘공> 같은 책을 부끄럽게도 그때서야 만났다. 말이 도서관이지 동네 만화방처럼 자그마한 그곳에서, 나는 툭하면 덮쳐오는 자괴감을 덜어냈고, 비루한 현실에서 잠깐 고개를 돌렸으며, 여자의 모든 것은 20대에 결정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얻었다. 또한 순간에 불과한 ‘스펙’보다 기나긴 인생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새삼스러운 질문을 진지하게 곱씹게 되었다. 여전히 빚은 좀 남았고 아직도 그 회사를 다니고 있고 회사도 나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때 도서관과 책들은, 망망대해에서 난파된 사람이 붙드는 판자 노릇을 톡톡히 해주었다. 목숨이 보장되진 않을지라도 붙들고 있으면 적어도 희망은 되는, 바로 그것.
독서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순수한 위로이자 쾌락
|
 |
|
난 나 그림 | 그러나 책이 마음의 양식이고 독서가 경쟁력이라고 사방에서 떠들지만 근로자가 쉽게 책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의외로 많지 않다. 회사가 이전한 뒤, 나는 가장 먼저 도서관을 찾아 헤맸지만 코빼기도 보지 못해 서울시 민원 120에 전화를 걸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서초구에는 대출 가능한 도서관이 없습니다.”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마다 휘날리는 현수막에 써 있는 ‘교육 서초, 명품 서초’라는 구호는 ‘좋은 사교육으로 일류대에 진학한 뒤 명품을 마음껏 살 수 있는 서초구민이 되자’는 다짐이었나. 도서관에서 격리된 나는 시무룩해졌다. 퇴근 후에 우리 동네 도서관에 가려 해도 보통 오전 9시에 열어 오후 6시에 닫으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간혹 주말에도 여는 곳이 있고 야간 개관을 시행하는 곳도 있지만 일단 도서관 수가 너무 적다. 한 권에 1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책을 일일이 다 사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책을 읽을 곳은 도통 없으니 OECD 가입 국가 중 독서율이 꼴찌라는 것도 당연한 결과 아닌가.
우리에게는 더 많은 도서관이 필요하다. 독서율 꼴찌라는 식의 초조함이나 ‘독서가 경쟁력’이라는 공병호 스타일의 구호를 넘어, 독서는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순수한 위로이자 쾌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돈을 엄청 들인 것이 아니면 진짜 즐거움이 아닌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책은, 그 오해를 바꿔줄 힘을 갖고 있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시사IN>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