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낙천(敬身樂天)-자신을 공경할 줄 알아야 천명을 즐길 수 있다. 이상호(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1) 천복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 모든 인간은 태어나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 실체도 불분명한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또 누군가에 대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가끔 신문 등에 각 나라의 국민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 행복은 매우 주관적인 것임과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람은 사는 동안 가장 원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모두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발휘되게 마련이다. 사회적 관계성을 떠난 개인의 삶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개인의 행복도 사회적 관계성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바라는 행복은 사회적 관계성과 관련한 자기 관리와 자기성취에 상당 부분이 좌우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각 나라의 행복지수를 보면 기이하게도 행복은 문명국의 순위가 아니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문명국은 그만큼 복잡하여 사회적으로 관계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며 그 과정에서 집착과 상처, 경쟁과 투쟁 등이 많아지고, 그에 의한 스트레스 또한 많아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몇 살까지 살 것인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무리 뛰어난 예언가라 하더라도 그것만은 정확하게 맞출 수 없다. 건강하게 100세까지 살 것이라고 장담하던 사람도 한순간에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지난 삶을 매우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과학은 탄생과 죽음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탄생과 죽음, 길흉화복은 그 누구도 정확하게 가름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영역이다. 그래서 인간의 목숨을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하여 천명(天命)이라 하였고, 행복을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 하여 천복(天福)이라 하였던 것 같다. 어쨌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하늘이 부여한 명(命)인 천명(天命)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천명을 다하는 날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천명을 다하여 행복을 누린 사람을 우린 천복(天福)을 누린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류의 선각자들은 천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지만 천복을 누리는 것에는 각자의 삶의 의지와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거기에 자기 관리와 사회적 관계성의 중요성이 언급되어 왔다. 모든 사람은 한 개체로 태어나 부모와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얽히며 살아간다. 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설정하고 가꾸어 가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아주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일찍 병마에 시달리다가 요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강을 자신하며 방만하게 살다가 자기 몸을 망쳐 일찍 죽거나 평생을 병마와 싸우다가 가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태어날 때나 어린 시절 아주 병약했지만, 자기 관리를 잘하여 오랫동안 건강을 지키며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우연찮은 사건으로 건강한 몸을 망치거나 죽음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욕망만을 추구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죄를 저지르고 오랜 세월 감옥생활을 하거나 사형을 당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은 개인의 삶이 결코 혼자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 준다. 따라서 태어나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의미 있게 죽기를 바란다면, 즉 천명을 다하여 복되게 살다가 복되게 죽기를 바란다면 적어도 사회적 관계 속의 자신을 잘 가꾸고 다스려 가야 한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경 즉 경신(敬身)이다. 힘든 역경의 생활에서도 자신에 대한 공경심을 채워가는 사람은 긍정적 에너지가 발휘되어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천명으로 주어진 삶을 즐겁게 가꾸는 낙천(樂天)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본질일 것이다. 2. 공자가 말하는 경신낙천(敬身樂天) 앞서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천명(天命)을 다하여 즐겁게 살다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 어떤 이는 사고로 죽고, 어떤 이는 건강관리를 잘못하여 질병으로 죽고, 어떤 이는 정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잘못 엮어져 죽는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재난으로 죽는다. 이런 경우의 수를 모두 제하고 나면 실제로 천명을 다하여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천명을 다하여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며 예로부터 그런 세상을 태평성세(太平盛世)라고 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복지 사회, 복지국가이다. 그런데 그 천명을 다하여 복락을 누리는 삶에는 정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불가역적인 것도 있지만, 설령 그 불가역적인 상황이 닥치더라도 평소에 경신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모면하고 자기 삶을 지키고 가꾸어 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자는 낙천(樂天) 즉 천명(天命)으로 주어진 삶을 즐겁게 누릴 수 있기 위해 경신(敬身) 즉 자기 공경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던 것 같다.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 자기의 몸을 공경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군자(爲政者)가 잘못된 말을 하더라도 백성은 법으로 여기고,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백성은 법칙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군자의 말이 바른말에서 벗어나지 않고 행동이 바른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백성들은 군자를 공경하여 명령을 따르게 됩니다. 이와같이 하면 능히 자신의 몸을 공경하고, 어버이의 명예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애공이 물었다. “成親(어버이의 명예를 이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다시 공자가 대답하였다. “군자란 사람이 지어준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백성이 그에게 이름을 부여하여 군자라고 하면, 그것이 곧 그 어버이의 명예를 이루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임금이 임금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됨과 동시에 그 자식도 위하는 것이 됩니다.” 공자가 이어서 말하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능히 그 자신의 몸을 이룰 수 없고, 자신의 몸을 이룰 수 없으면 능히 그 땅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없고, 그 땅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없으면 능히 천명을 즐겁게 누릴 수 없습니다.” 公曰 敢問何謂敬身이니잇고 孔子對曰 君子過言이라고 則民作辭하고, 過行이라고 則民作則하나니, 言不過辭하고 動不過則이면 百姓恭敬以從命이라. 若是면 則可謂能敬其身이요 則能成其親矣리이다 公曰 何謂成其親이니잇고 孔子對曰 君子者也는 人之成名也니 百姓與名하여 謂之君子면 則是成其親爲君而爲其子也이다 孔子遂言曰 愛政而不能愛人이면 則不能成其身이요 不能成其身이면 則不能安其土요 不能安其土면 則不能樂天이니이다 -<공자가어 대혼해>- 위의 애공과 공자의 대화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군자 즉 임금의 자기 관리 즉 경신(敬身)이다. 임금이 자기 공경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믿음을 잃어 존중받지 못하거나 쫓겨날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맹자도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한 임금을 백성의 이름으로 쫓아내고 새로운 군주를 세우는 것을 역성혁명이라 하여 정당화시켰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였듯이 백성의 믿음을 저버린 임금은 이미 천심을 잃은 것이니 군주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군주는 갈아치워야 한다. 중국 고대에 탕왕이 걸왕을 축출한 일이나 조선 시대 연산군을 축출한 중종반정 등이 정당화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애공의 첫 번째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에서 군자는 모든 군주를 통칭한다. 군주는 경신(敬身)을 잘하여야 한다는 당위의 원칙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군주란 그의 말이 곧 법이요, 원칙에 될 수 있어 그의 명령이 잘못되더라도 백성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주의 잘못된 말과 행동, 이치에 맞지 않는 법과 명령은 시간이 지나면 백성의 신뢰를 잃어 군주로서의 위엄을 잃게 한다. 그러면 백성은 군주에게 등을 돌리고 저항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군주는 법과 명령을 내리기 전에 자기의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할 줄 알며, 그 법과 명령이 이치에 합당한지를 살펴야 한다. 그것이 곧 자기를 공경하는 일이며 자기 부모를 빛내는 일(則可謂能敬其身 則能成其親矣)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한 국가의 지도자인 대통령이 자신의 말과 행동, 정치적 행위가 바르지 못하면 국민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신뢰를 잃는다. 얼마 전에 자리에서 물러난 영국의 존슨 총리도 그런 경우의 한 예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지난날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것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것도 대통령의 말과 행동, 정치적 행위 등이 이치에 합당하지 못하여 국민이 저항한 것이다. 국민은 늘 대통령의 말과 행동, 정치적 행위 모두를 살피는 관찰자이며 감시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대통령이 스스로 경신(敬身)하는 노력이다. 이것은 대통령뿐 아니라 모든 지방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 등 모든 의원, 나아가 모든 회사나 공공기관의 장, 심지어는 한 가정의 부모와 가장에게도 해당된다. 여기서 경신(敬身)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대화의 두 번째 내용인 성친(成親)은 무엇을 의미할까? 위의 대화에서 공자가 말한 것은 성친(成親)의 친(親)은 부모를 지칭한다. 여기서 대화의 대상이 애공이라는 제나라의 군주이니 가까이는 선왕이요 멀게는 왕조를 이룬 선대 모두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成)은 이룬다는 것이니 부왕을 포함한 선대 왕들의 업적을 빛나게 한다는 것이 된다. 이를테면 왕조를 더욱 빛나게 함으로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뒤에 이어진 공자의 설명에서 군자란 사람이 지어준 명예로운 이름(君子者也 人之成名也)이라는 것은 군자는 자기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 사람 즉 신하와 백성들이 지어준 이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군자는 덕을 쌓은 군주를 지칭한다고 보면 좋겠다. 만인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아야만 군자가 될 수 있지 스스로 아무리 자기를 높여도 군자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이 군주에게 군자라고 이름하여 부르게 되면(百姓與名 謂之君子) 만인이 존경하게 되어 그 명예는 그 어버이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군주가 군자의 덕으로 정치를 잘하면 부왕을 넘어 왕조를 일으킨 선왕의 업적을 기리고 칭송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세종대왕은 성군(聖君)으로 치적을 쌓았기에 백성들은 칭송하였으며 용비어천가를 통해 선조들의 업적을 칭송할 수 있었다. 만약 군주가 덕이 없고 잔악한데 선조들의 업적을 칭송하였다면 그것은 한갓 조롱거리가 되고 뒷날 누군가는 그 칭송을 허물고 말 것이다. 이어진 공자의 설명에서 군주가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군자로 칭송을 받으면 임금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그 자식도 위하는 것이 된다(則是成其親爲君而爲其子也)고 하였다. 임금 자신을 위하는 것은 임금이 신하와 백성의 칭송을 받으니 정사가 안정되고 나라가 융성하며 백성들은 임금과 여민동락(與民同樂)하기에 임금은 근심 걱정 없이 천명을 다할 수 있게 된다. 그 자식을 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왕조 융성의 기반이 튼튼해져 자손 대까지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맹자가 역성혁명을 지지한 것처럼 왕이 말과 행동이 거칠고, 정치가 바르지 못하며 패륜을 저지르면 신하와 백성들은 등을 돌리게 되고 결국엔 그 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왕도 삶이 온전하지 못하며 선조들의 업적도 허물어지고 자손들도 죄인이 되고 만다. 후한 말기의 왕들은 십상시들의 농단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바르게 하지 못했기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으며 최후는 처참하게 맞이했다. 모든 왕조의 몰락에는 반드시 말과 행동, 정치적 역량이 바르지 못한 왕들이 중심에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과도 일맥상통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대통령으로 당선된 자와 여당이 말과 행동, 정치가 이치에 맞지 않으면 국민은 등을 돌리고, 다음 선거에서 그 정당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지 않는다. 정권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은 바로 대통령과 그가 속한 정당 사람들의 언행과 정치적 행위에 의한 것이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난 후 미국의 보수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 거의 맥을 못 추었으며, 우리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건 이후 보수정당은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 촛불 혁명을 발판으로 내세우며 집권한 문재인 정부 역시 말과 행동, 정치적 행위에서 국민의 신뢰를 잃었기에 정치 신인인 윤석열에게 대통령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 모든 중심에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과 집권당의 말과 행동, 정치적 행위가 어떠했는가의 문제가 도사린다. 공자가 마지막까지 이어서 설명하는 말은 경신(敬身)과 낙천(樂天)의 관계이다. 우선 공자의 설명에서 군주가 하여야 할 경신(敬身)의 으뜸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고 사람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다. 위에서 공자가 말한 “사람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愛政而不能愛人)”는 것은 정치의 본질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政)인데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不能愛人)은 정치의 본질에서 어긋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군주의 말과 행동 및 정치적 행위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그 몸을 이룰 수 없다(則不能成其身) 그 몸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군주가 군주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능히 그 땅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없고(不能安其土), 그 땅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없으면(不能安其土) 능히 천명을 즐겁게 누릴 수 없음(不能樂天)은 당연한 것이 된다. 결국, 군주가 경신(敬身)하지 않으면 성기신(成其身)할 수 없고, 성기친(成其親)할 수도, 위기자(爲其子)할 수도 없다. 역성혁명이 일어나거나 정권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왕위에서 쫓겨나 그 땅에서 살 수 없다. 역대의 모든 반정이나 역성혁명으로 쫓겨난 왕들의 최후는 죽음이었으며 그 가족과 자손들 역시 처참했다. 그러니 천명을 즐겁게 누릴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사의 경우도 전직 대통령은 정권이 바뀌고 나서 모두 감옥생활을 했다. 그것 역시 그 몸을 이루지 못한 것(不能成其身)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경신(敬身)하지 못한 자신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공자의 말이 꼭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에게만 적용될까?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하나의 회사도 최고경영자가 덕과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으면 발전한다. 한 집안도 가장이 덕과 능력으로 성실하면 번창한다. 그러면 그 구성원들은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경신하지 못하면 왕조뿐 아니라 회사도 집안도 무너진다. 세상 모든 사람은 자기 몸을 공경하지 못함으로 자기를 스스로 해치고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며 비난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고 가족과 자손을 수렁에 빠뜨린다. 그래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천명을 다하도록 즐거움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의 중심에는 항상 경신(敬身)의 문제가 도사린다. 3. 경신(敬身)하는 삶을 위하여 경신(敬身)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경(敬)은 ‘공경하다. 훈계하다’는 뜻을 지닌다. 신(身)은 ‘몸’이며 ‘나 자신’이다. 이를테면 나 자신을 공경하고 훈계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경신(敬身)하는 것일까? 가볍게 생각하면 자기의 마음을 수양하고 몸을 튼튼하게 한다는 것으로 국한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경신(敬身)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이다. 여기서 경신은 개인적 관계성의 차원을 넘어 정치 사회적인 관계성의 차원까지 포함한다. 앞에서 공자의 말을 살펴보았듯이 자기 자신을 수양하는 것을 넘어 애인(愛人-사람을 사랑하는 것) 애정(愛政-정치를 사랑하는 것)하는 것이며 애인애정(愛人愛政)한다는 것은 정치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사람을 사랑하며 말과 행동이 바르고 이치에 맞는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이치에 맞는 정치는 꼭 정치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자기를 다스리는 일부터 가정을 관리하고 세상과 관계하며 수행하는 모든 일을 포함할 수도 있다. 경신(敬身)하기 위해서는 학문에 매진해야 한다. 여기서 학문은 두 가지로 구별된다. 하나는 자기 수양의 학문이다. 둘째는 세상에 나아가기 위한 학문이다. 유학에서는 자기 수양의 학문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하고 세상에 나아가기 위한 학문을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 한다. 여기서 모든 학문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없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며 오히려 세상에 해가 되고 결국 자기 자신도 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 수양의 학문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위해서는 우선 몸과 마음을 정화하여 덕을 쌓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학문과 삶의 기초이다. 이를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성찰하여야 하며, 분노를 다스리고 평정심을 이루며, 잘못된 욕망에 빠지지 않으며 매사를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야말로 인격을 닦는 일이다. 그러면서 사물과 세상을 보는 바른 눈과 판단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더 하여야 할 학문이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격물치지(格物致知)라 일컫는다. 그러면 편견에 빠지지 않고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세상과 바르게 관계할 수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인격 즉 도덕적 품성을 기르는 공부(인성 공부)가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것이다. 인격과 지혜를 기르는 일이다. 군자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 따라서 열심히 운동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여 몸을 튼튼히 하는 일도, 음식을 절제하여 몸을 해롭게 하지 않는 일도 위기지학이요. 명상과 수련을 통해 분노와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일도 위기지학이다. 독서와 성찰을 통해 삶의 지혜와 지식을 닦고, 이치를 궁구하여 세상의 이치를 알고 혜안을 넓히는 일도 위기지학이다. 총체적으로 나의 인격을 품위 있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경신(敬身)의 처음이자 끝이다. 다음으로 위인지학(爲人之學)은 그야말로 세상을 향한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의 전문성과 처세학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분야별 전문성이다. 그것은 순전히 남과 관계되는 학문이다. 이를테면 남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학문이며 출세하기 위한 학문이다.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위한 학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에서의 모든 공부는 여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목적으로서의 학문이라면, 위인지학(爲人之學)은 수단으로서의 학문이다. 그런데 실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 모두가 필요하다. 오늘날 학교 교육으로 말하면 인성교육과 학력 신장 교육이다. 둘의 관계에서 항상 인성교육이 우선이며 기초라는 것은 오늘날도 부정하지 않지만, 실상은 인성교육은 등한시하고 학력 신장 교육에만 매진하는 것 같다. 옛날도 그랬지만 오늘날은 특히 개인의 삶이 정치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위기지학(爲己之學)은 쇠하여 가고 위인지학(爲人之學)은 성하여 간다. 그래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인성교육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문제이다. 그것은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자기를 드러내어 살길을 찾고 권세를 누리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 사회는 더욱 혼란해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각박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여, 모든 정치적 행위에 수신(修身)을 우선할 것을 역설하였고, 맹자는 구방심(求放心-본래의 마음을 구함)하여 명명덕(明明德-밝은 덕을 밝힘)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 같다. 현대라는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전문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문성은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세상에 나아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근본 이유의 85%는 학력이나 지식의 크기 등 전문성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 즉 인성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문성이 뛰어나더라도 인성이 잔악하면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전문성은 뛰어나야 하지만 그것을 더욱 빛나게 하고 지탱하는 것은 인격이다. 그것을 유학적으로 말하면 성공과 실패의 85%를 좌우하는 것은 위인지학이 아니라 위기지학이라는 것이다. 옛날 왕들이 왕위에서 쫓겨난 것도 근본 문제는 주색과 향락, 무모한 정치와 폭력 등의 문제였다. 오늘날 유명한 정치인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것도 성추행이나 부정, 비리 등이며 능력의 부족에서인 경우는 드물다. 한 개인의 삶의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이다. 능력이 뛰어나 많은 돈을 벌고 지위가 높아간 사람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그 삶이 파괴되는 것도 사람들이 실패하고 불행에 빠지고 삶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도 대부분 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격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위기지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위인지학의 문제이다. 능력이 모자라면 비난을 받지만, 인격이 무너지면 삶의 모든 정치 사회적 관계망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 천명을 다하여 즐거움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경신(敬身)에 힘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자가 말하는 경신(敬身)은 오늘날로 말하면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인격을 닦는 일이다. 입지(立志-뜻을 가지는 일, 목표 의식)를 굳게 하고, 매사에 긍정적 에너지로 동기를 충전하는 일이다. 그 인격은 나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남과 조화롭게 지낼 줄 아는 지혜를 연마하는 일이며, 일을 바르게 처리할 줄 아는 태도와 자세를 갖는 일이다. 자신에 충실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정의롭고 올곧게 사는 일이다. 권력과 재물 등 욕망에 집착하거나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고 함부로 분노하지 않는 마음과 행동을 갖는 일이다.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정치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바르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경신(敬身)하면 천도(天道)를 즐기고 천명(天命)을 알기 때문에 근심이 없고, 처하는 곳마다 편함이 깃들며 인덕(仁德)을 돈후(敦厚)하게 지닐 수 있어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樂天知命 故不憂 安土敦乎仁 故能愛)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낙천(樂天)할 수 있다. 낙천(樂天)할 수 있는 삶은 죽는 날까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특히 세상에 나아가 다스리는 행위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비록 군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지라도 공자가 말하는 경신(敬身)을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 경신(敬身)이야말로 자기를 지키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며 서로 대립하지 않고 조화롭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경신(敬身)하여 낙천(樂天)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그것이 곧 태평성세이며 복지 사회, 복지국가일 것이다. 문명국일수록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서 답을 구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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