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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먼저 속이지 않으면 평생 속아 산다>의 줄거리 :
사실은 육체를 입고 있는 존재가 나라는 생각이 사탄에게 속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죄의 상태가 체질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너무나 지독할 정도로 당연하게 그것이 나다. 그러므로 이 죄악의 체질에 맞서 싸우려면 속여야 한다. 염소 새끼의 가죽인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이 나라고 내 죄와 저주받음에 맞서서 계속 속이고 우겨야 한다. 이렇게 먼저 속이지 않으면 죄와 저주가 나를 속이는 상태로 삶을 살게 된다. 그 상황이 어떤지를 본문이 여실히 보여준다.
먼저 속이지 않으면 평생 속아 산다
(창세기 29:1~35)
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야곱은 루스 들판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경험을 한 뒤에 목적지인 하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한 달을 지내게 됩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며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과 결혼을 하고, 레아가 네 명의 아들을 낳은 이야기까지 나오며 내용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먼저 속이지 않으면 평생 속아 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는 요즘 계속해서 ‘속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무척 충격적입니다. 27장 22~24절을 보면 이삭은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라고 하면서 축복을 하기 전에 다시 묻습니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라고 확인을 합니다. 그런데 이 지경이 되어서도 야곱은 우기기를 계속합니다. 저 같았으면 더 이상 우기지 못하리라 생각해서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장자의 명분이 탐나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은 야곱은 끝까지 에서라고 우기며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 자체를 비유로 삼아 전해주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구원을 얻고, 장자의 특권을 누리는 하나님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야곱은 뻔뻔하고 그야말로 염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야곱처럼 뻔뻔하게 내가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는 자임을 우기고 속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과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그동안 마음이 육체의 몸을 입고 살았습니다. 이제 그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입었습니다.’라고 우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길 수 없다면 내 마음이 절대로 하늘로 올라갈 수 없고 하나님을 지켜낼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은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입은 상태가 되면 하나님을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이 믿음의 최종 목적입니다.
한편 야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십자가 효과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십자가 효과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세상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늘로 이어지는 사닥다리가 게시되고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진짜 장자의 특권인 하나님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있는 자기의 미래를 붙잡습니다.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대신 미래를 향한 자기의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사닥다리를 제쳐놓고 자기 인생길을 선택한 선민들은 아직 철이 없고 진리에 대해 둔감한 상태입니다. 죄와 저주가 작동하는 상태에서 하나님 직면하기를 버리고 이 세상을 향한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선민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알려줍니다.
야곱은 하늘길과 인생길이 놓여있는 이정표인 십자가에서 하늘길을 택하지 않고 인생길을 걷기로 합니다. 하늘길을 택하여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고 자기 인생길을 걷기로 한 야곱에게는 앞으로 네 가지 일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속아 넘어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몸을 입고 육체의 몸을 입고 있는 자가 아님을 우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과 나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길 수 없고 속일 수 없다면 오히려 네 가지 형태로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네 가지 형태의 속아 넘어감으로 내 인생을 채우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기고 속여야 한다는 것은 ‘당신들은 육체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다.’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우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내가 에서라고 이삭을 속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장자의 신분임을 우겨야 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고, 내 인생 또한 속아 넘어감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야곱에게서 첫 번째로 나타난 일은 자기 눈에 속은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은 곧바로 라헬의 매력에 빠지고 맙니다. 마음이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 대신 땅에 있는 영광의 라헬을 보게 됩니다. 이제 영광의 라헬을 붙잡게 된 야곱은 인생에서 라헬이 최고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쉽게 말해 라헬을 얻으면 행복하고 라헬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리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그때는 이미 라헬도 죽고 레아도 죽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막벨라 동굴에 묻혔고, 라헬은 에브랏이라 불리던 베들레헴 길가에 묻혔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을 레아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 묻으라고 합니다. 막벨라 동굴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가 묻힌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첫 번째 아내 레아가 묻힌 곳이었습니다. 야곱은 죽게 되어서야 자기 눈에 의해서 마음이 속았던 상황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죽어서 같이 묻힐 아내는 라헬이 아닌 레아라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깨달음이 이토록 늦었던 이유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자기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눈에 의해 속게 됩니다. 눈으로 보며 나쁘다고 합니다. 눈으로 보며 좋다고 합니다. 눈으로 보며 슬프다고 합니다. 눈으로 보며 기쁘다고 합니다. 눈으로 보며 느끼는 좋고 나쁨이나 기쁨과 슬픔은 모두 마음이 속아 넘어가는 중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음이 육체와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눈으로 보는 것을 상대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속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서 두 번째로 나타난 일은 자기 뜻에 속아 넘어감입니다. 마음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영광의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한 자는 자기 뜻에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본문에는 야곱이 하란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 외삼촌 라반의 밑에서 일하게 되는 과정, 레아와 라헬과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읽지 않은 32절 이하를 보면 레아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를 낳았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넷째인 유다는 예수님이 장차 몸을 입고 그리스도로서 오실 통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13절에서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레아를 통해 유다를 낳을 것을 뜻으로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만약 야곱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였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육체를 입은 자로서 자기가 뜻을 세웁니다.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우겼던 것처럼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하나님의 장자의 자리를 고집했다면 이렇게 자기 뜻을 따로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이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뜻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다면 이 사실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고 사업을 직면하고, 건강을 직면하고 있다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정말로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한다면 그런 기도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도 없는 길로 가면서 내 뜻이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야곱은 철저하게 레아를 아내감에서 배제합니다. 야곱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에게서 먼저 아들 넷을 낳게 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중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위한 계보의 근원을 이룰 유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은 마음은 육체를 입고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내 뜻대로 할 수밖에 없고 내가 뜻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내가 뜻을 세우면 세울수록 속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일을 하게 됩니다.
야곱에게서 세 번째로 나타난 일은 기대와 예상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통해 유다를 낳게 하셔서 예수님의 계보를 이어가려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사는 야곱에게 강제적으로 뜻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결국 야곱을 속이심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이 결혼식을 마치고 첫날밤을 보낸 후에 깨어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첫 번째로 자기 눈에 속았습니다. 두 번째로 자기 뜻에 속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내 뜻에 속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직 세상은 하나님의 뜻으로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뜻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속은 것이고, 내 인생을 내 뜻으로 살아야 한다는 느낌 자체가 속은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망아지 같은 선민의 길을 막으십니다. 기대와 예상에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뜻을 가지면 기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대하는 것은 예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을 할 때 뜻을 품고 예상합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항상 좋은 쪽을 향하게 됩니다. 좋은 쪽으로 예상하기에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자기 뜻을 세우고, 기대하고 달려가며 예상하는 결과를 반드시 끊어버리십니다. 그 사람이 선민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십니다.
예상대로 적중했다는 말은 하늘길을 가는 선민에게는 평생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생을 향한 우리의 기대나 예상은 적중할 수 없습니다. 선민이 세상에 대해 기대하고 예상한다면 반드시 그 기대와 예상에 속는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뜻을 세웠으면 기대하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기대와 예상은 꺾입니다. 좌절과 낙담으로 끝나게 됩니다. 나의 기대와 예상에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속지 않는다면 잘못되어서 하나님의 뜻에서 무한히 멀어져 가는 것을 저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획대로 레아에게서 네 아들을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유다를 통해서 예수님의 계보가 되게 하십니다. 외삼촌 라반의 교활함을 이용하여 야곱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라헬 대신 레아를 얻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라헬로 기대하고 예상하는 모든 성공을 없애시고 지금 이 자리에 오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헬로 상징되는 성공에 대한 모든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게 하심으로써 지금 십자가 앞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뜻을 품은 대로 기대와 예상을 다 적중시키며 살았다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 올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 세상에 대해 뜻을 품는 모든 기대와 예상은 나를 속이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잘 되리라 기대하지만 잘 안 됩니다. 멋지게 되리라 예상하지만 멋지지 않습니다. 순조로우리라 기대하고 예상하지만 전혀 순조롭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었기에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야곱에게서 네 번째로 나타난 일은 은혜를 대가로 여김에 속아 넘어감입니다. 마음이 사닥다리를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은 채로, 육체를 입은 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고 삶을 유지해 나갈 때 나타나는 결과는 은혜를 대가로 바꾸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일하고 받는 월급을 노동의 대가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해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은 결과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한 자에게 월급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합당한 대가로 여기는 동안 감사의 마음은 사라집니다. 주어진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감사가 없기에 당연한 것들에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지옥을 살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은혜로만 채워집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날씨가 덥거나 시원해도 은혜이고, 비가 오거나 맑아도 은혜입니다. 사업이 잘돼도 안 돼도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삶에 끼어들어 올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사닥다리로 삼아 하나님을 직면하면 은혜 아닌 것이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노동의 품삯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곱은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아브라함 같았으면 무엇이라 대답을 했을까요? 하나님을 직면하는 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 땅에는 내 뜻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야곱이 루스 들판에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처럼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었다면 하란 땅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란 노동자들의 품삯을 받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었다면 라반의 식솔들은 물론이고 하란 땅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란에서 통용되던 노동자의 품삯 이외의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고 특권의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 대해 특권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칠 년 노동의 품삯으로 라헬을 요구합니다.
라반은 하란으로 온 야곱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때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가 자신을 하란으로 보낸 경위를 이야기합니다. 이삭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며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할 것을 부탁합니다. 당시에는 근친혼이 일반적인 결혼의 형태였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했을 것이고 라반은 매형이 되는 이삭의 부탁을 반갑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칠 년 노동의 대가로 라헬을 요구합니다. 라반으로서는 안 그래도 주려고 했는데 야곱이 칠 년을 거저 일해준다고 하니 대박이라고 여기며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19절을 보면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라고 하였던 것으로부터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납니다. 안 그래도 레아와 라헬이 결혼 적령기였기에 라반은 사윗감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매형인 이삭이 야곱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야곱과 한 달을 지내다 보니 일을 잘하고 괜찮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품삯을 무엇으로 주어야 할지 물어보니 희한하게도 야곱이 칠 년을 일하고 라헬을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이것은 라반이 생각지도 못했던 요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있었기에 야곱이 라헬을 요구하지 않았어도 라반은 두 딸을 야곱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라헬에게서는 요셉이 태어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기근을 해결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야곱은 먼저 레아와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결혼하기 위해 왔음을 이야기했고, 라반도 한 달을 지내면서 딸들을 야곱에게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 움직이는 땅의 상황을 알고 있다면 은혜를 대가로 요구하지 않고 그저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품삯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러한 대답 대신 노동의 대가로 라헬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라헬을 보고 있었기에 마음에서 라헬을 보물로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보물로 가졌다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주권대로 내버려 두면 됩니다. 그랬다면 결혼은 결혼대로 하고 노동의 품삯으로 지참금을 삼을 수도 있었고, 애초에 지참금의 명목으로 노동을 하든 어떤 식이 되었든지 레아와 라헬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은혜로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은혜를 대가로 삼고자 했고 결국 십사 년 노동의 대가로 라헬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브라함과는 대조적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이후로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버렸습니다. 아내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죽인 것입니다. 몸을 입고 사는 남편으로서는 아내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염소 새끼 가죽이 상징하는 대로 예수님 안에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에서는 아내를 지켜야 할 명분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주권이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지키려 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 곁에서 사라가 평생 함께한 것은 아브라함의 노동의 대가나 아내를 지키려 노력한 대가가 아닌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와 함께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이 주권적 은혜로 정해두신 레아와 라헬을 자기의 노력의 대가로 얻으려 합니다. 은혜이자 선물을 받아 사는 것이 아니라 진땀의 대가로 아내를 얻었기에 당연함과 마땅함이 있을지언정 선물을 받은 자로서의 감사는 없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직면하고 하나님 버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다면 그 생애에 다 선물로 주어질 것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것들을 전부 노력의 대가로 얻어야만 하는 속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노력에 대가가 주어진다고 속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은혜입니다. 일하여 품삯을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라반이 먼저 딸들을 주겠다고 나섰을 것입니다. 라반이 ‘너의 아버지 이삭이 결혼 때문에 너를 보냈는데 너는 왜 결혼의 뜻을 보이지 않느냐?’라고 묻고 야곱은 ‘저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기에도 바쁩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라반이 레아를 먼저 아내로 삼으라 하고 은혜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칠 년을 일한 노동의 대가로 아내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뒤의 이야기에서도 이어집니다. 야곱은 양 떼를 자기 재산으로 삼는 과정에서도 또 잔꾀를 부려서 노력의 대가로 삼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면 선물이자 은혜로 허락될 것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노력의 대가로 바꾸었기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야곱이 이러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는 마음이 사닥다리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야곱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내가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임을 우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내가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임을 우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기지 않기에 아무리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도 실제 삶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으려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놓치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내가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임을 우기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육체를 입은 자로 상대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자가 나를 육체 입은 자로 상대한다면 나도 그것에 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예수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해야 한다는 이론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육체를 입고 있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내 속에서도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대로 다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면 삶의 현장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십자가 탈의실에서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라는 것을 기억하여 주장하고 우겨야 합니다. 그럴 때 육체를 입고 있을 때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는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됩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직장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삶이 진행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로만 채워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육체를 입은 자의 태도를 보인다면 장자의 위치에 설 수는 없습니다. 이삭이 아곱의 음성을 듣고 의심했을 때 ‘더는 속이지 못하겠네요. 제가 야곱입니다. 어차피 들킬 것을 알았다면 염소 새끼 가죽은 괜히 입었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제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사람이다.’라고 끝까지 우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가 유지될 때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도 하게 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삭이 염소 새끼 가죽을 입고 나타난 야곱의 음성을 듣고 의심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육체를 입은 모습을 너라고 할 때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 몸을 벗어버리고 ‘나는 육체를 입은 자다.’라고 여긴다면 야곱이 속은 대로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자기 눈에 속습니다. 마음이 자기 뜻에 속습니다. 마음이 자기 기대와 예상에 속습니다. 마음이 자기 노력의 대가에 속아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합니다. 이처럼 속음으로 충만한 삶이 야곱의 인생을 험악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나는 당신들이 보고 있는 내가 아니다. 야곱이 염소 새끼 가죽을 입었듯이,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다. 이삭이 야곱의 음성을 의심했듯이, 당신들은 나를 육체를 입은 자라고 의심하지만, 아니다, 나는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장자다.’라고 우기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우기지 않고 속이지 않는다면 세상의 우김을 받아들이게 되고 세상에 사는 동안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먼저 속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기억하여 육체를 입고 있는 내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는 중에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속이고 우김으로써 그렇지 않았을 때 삶에 충만하게 임할 모든 속임수를 떨쳐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