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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살기’ 아닌 ‘죽기’의 상번제 인생관>의 줄거리 :
십자가 생활화는 '살자!' 인생관이 아니라, '죽자!' 인생관을 실천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죄와 저주에 찌듦을 아는 선민은 감히 살겠다는 생각을 못 합니다. 손대는 모든 대상에 자기 죄가 묻어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체질이 되어버린 죄와 저주의 실제 힘을 아는 자에게 인생은 '죽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등지고 빗나감인데,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셨으니, 이제 부르심을 받고도 하나님을 빗나가려는 자기를 죽이는 일 말고 무엇이 우선적으로 중요하겠습니까?
‘살기’ 아닌 ‘죽기’의 상번제 인생관
(출애굽기 29:38~46)
38.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39.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40. 한 어린 양에 고운 밀가루 십분의 일 에바와 찧은 기름 사분의 일 힌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더할지며
41.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에 한 것처럼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지니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제사장의 위임식에 이어 본격적인 제사장 직무에 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중에서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제시하신 가장 중요한 직무는 상번제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상번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상번제 인생관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38~39절을 보면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양을 바치는 상번제는 성막의 뜰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장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상번제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이는 365일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바치는 상번제를 통해 인생을 보는 상번제 인생관을 가질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상번제 인생관이 정의하는 인생이란 ‘살기’가 아닌 ‘죽기’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에게는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선민에게 주어진 명확한 대답은 죽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민이라면 인생관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나는 인생을 사는 동안 죽기를 하는 것이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돈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 형통하는 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선민의 인생관은 ‘죽기’의 상번제 인생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근거한 논리로 말씀드리자면 선민 또한 죄와 저주에 찌든 채 태어난 사람임은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와 저주에 찌들었기에 내 속에서 죄와 저주는 계속해서 흘러나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마포구청이 있는 성산동과 연남동 사이에 살았습니다. 당시 그 일대는 다 밭이었기에 인분을 모아둔 통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단짝 친구와 함께 놀던 중에 친구가 인분통에 빠졌습니다. 그 친구 집이 멀었기에 저의 집 우물가까지 와서 몸을 씻어야 했는데, 그때의 모습을 보자면 어떤 것과도 접촉이 일어나면 안되는 상태입니다. 어찌나 지독한지 펌프로 물을 퍼서 몇 번이고 물을 붓고 비누로 씻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에 찌든 상황은 이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배설물이 겉에 묻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담겨있는 상황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거부감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더 좋게 여기며 마음에 담으려 하고 먹으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만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것들을 담아서는 안 되고, 담았다면 배설물처럼 여겨 빨리 빼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기를 마음에 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갓난아기조차도 마음에 담는다면 배설물입니다. 마음에 담지만 않는다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만드신 창조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담아야 하는 곳이기에 세상 것을 담는다면 배설물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이 세상 것들로 인해 푹푹 썩은 상태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12절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음이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기 위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자가 없고 다 땅으로 치우쳤습니다. 이어지는 13~18절을 보면 마음이 땅에 치우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에 대해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어를 ‘그’에서 ‘나’로 바꾸면 말씀의 의미가 쉽게 와닿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마음에 자녀를 담을 수 없고 돈 문제나 건강 문제를 담을 수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시간으로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데도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이처럼 죄와 저주의 상태란 배설물을 마음에 담고도 아무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똥칠을 하듯이 죄가 묻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적용해 보자면 죄와 저주의 체질이란 마음에 배설물을 담아도 거부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본래라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의 체질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도 거부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세상 것들은 마음 밖에 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인데 마음 안에 담을 때는 배설물이 됩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살기’가 아닌 ‘죽기’의 상번제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살기’를 기본전제로 하여 인생관을 부풀려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선민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와 저주에 빠져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인분통에 빠진 사람은 겉에 배설물이 묻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의 체질은 마음에 배설물을 담고도 거부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에 배설물을 담은 상태를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대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걱정하고, 마음대로 끌어안고, 마음대로 바라고, 마음대로 계획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선민에게 인생은 ‘죽기’에도 바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만지면 만지는 대로 다 평강이 깨지는 저주임을 알기에 인생의 과제는 오직 ‘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위임하시고 첫 번째 임무로 상번제를 제시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상번제(常燔祭)는 늘 드려지는 일상적인 번제라는 뜻입니다. 상번제로 바쳐지는 어린 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도 죽임당한 어린 양을 중심으로 역사가 진행되어 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상번제 어린 양의 죽음은 바로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상번제에 대한 말씀을 통해 십자가 생활화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상번제에서 암시되고 지시되고 드러난 진리를 언급하며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에서 십자가 생활화는 다양한 말씀을 통해 암시됩니다. 다만 상번제는 십자가 생활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제사장의 위임식에서 두 마리 숫양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번제물의 각을 떴는데 이것은 상번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제사장들은 성막의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아침저녁으로 흠 없는 어린 양을 죽여 각을 뜨고 태워서 재로 만듭니다. 상번제에는 제사장들만 참여할 뿐 백성들은 참여할 수 없습니다. 백성은 아침저녁으로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음과 그 절차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43절을 보면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상번제가 이스라엘 백성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를 상번제가 드려지는 곳으로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상번제가 드려지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과 만남은 실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상번제가 드려지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상번제를 생활화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어버린 종교 행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상번제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이들은 각자의 삶의 현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상번제는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지고 있습니다. 성막의 뜰에서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죽여 각을 떠서 불태우는 번제를 드립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번제가 드려지는 장소로 마음을 보내야 합니다. 이는 곧 죽고 각이 떠져 불타서 재가 되는 어린 양과 자기를 동일시 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위해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로 어린 양에게 안수를 합니다. 백성은 어린 양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함을 통해 상번제에 참여할 수 있고 각자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상번제의 전체 과정을 알고 있기에 상번제가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에는 마음을 성막의 뜰에 있는 번제단으로 보내야 합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기억하며 내가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해 하나님을 실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기억하다 보면 죽는 것 외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상번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실시간으로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자신의 위임식에서 받은 혜택을 모든 백성이 누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상번제의 의미이기에 백성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며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고 제사장들만 모여서 제사를 드리는 식이라면 상번제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자기 할 일은 있습니다. 가정을 돌보고, 장사도 해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상번제가 드려질 때마다 백성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어린 양과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민의 정의이자 선민의 인생관입니다. 선민이란 매일 아침저녁으로 막대한 시간을 들여서 상번제 어린 양과 함께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서 하는 일,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서 죽은 자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번제의 규례를 통해 선민을 정의하십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었다는 점은 선민이든 아니든 똑같습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마음에 배설물을 담았음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마음,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가 없다면 ‘차라리 죽고 말지 마음에 돈이나 건강을 담을 수는 없다.’라고 펄쩍 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죄와 저주에 찌들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 하는 일이 형통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배설물로 여기지 못합니다.
죄와 저주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선민은 이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민의 인생관이란 ‘살기’가 아닌 ‘죽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저주의 힘이란 죽음으로만 제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거창한 위임식 후에 처음으로 한 일이 상번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로 본문을 보면 상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가 함께 언급되었습니다. 41절을 보면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에 한 것처럼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제와 전제는 상번제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은 상번제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고 소제와 전제의 의미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상번제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니엘의 시대를 떠올려 봅니다. 다니엘은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뒤 포로로 잡혀갑니다. 다니엘서 6장을 보면 다리오 왕의 통치 때 왕 이외의 어떤 신도 섬기지 못하게 하는 조서가 내려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잡혀간 상태에서도 상번제 생활화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때는 바벨론의 침략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상번제도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성전에서 늘 드려지던 상번제를 떠올렸고, 상번제에서 죽는 어린 양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상번제의 의미를 마음에서 기억하며 자신이 죽은 자임을 인정하고 고백함을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본 예언 중에는 몇백 년 뒤에 나타날 그리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 왕이 상번제를 없애는 환상을 봅니다. 상번제가 없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택하셨습니다. 다만 선민들 또한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던 것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과 만나 관계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나를 죽여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상번제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아무 거부감 없이 배설물로 여겨야 할 세상 것들을 자연스럽게 마음에 담는 나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이 불타서 재가 되는 상번제와 실시간으로 연결하여 죽은 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번제의 의미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는 죄와 저주가 그만큼 무섭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세상 것이 마음에 담긴다면 그것은 배설물이 됩니다. 그리고 배설물이 담긴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마음에 있으면 안 되고 빨리 빼내야 하기에 배설물입니다. 마음과 격리되어야 하기에 배설물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사장이란 매일 두 번씩 성전에 마음을 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학살하는 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을 조각내 번제단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은 실제로는 마음을 어린 양과 동일시하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번제단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의 역할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어느덧 인생관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인생은 ‘살기’가 아닌 ‘죽기’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돌아가신 사람에 대해 소천(召天)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아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번제에 대해 42절에서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번제 어린 양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늘이 부른다는 소천은 육체가 죽는 순간에만 붙일 수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선민은 날마다 소천하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고 배설물을 전혀 담지 않은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늘로 올라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상번제의 의미입니다.
하루에 두 번씩 어린 양은 재가 될 때까지 불에 탑니다. 양이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두 시간 이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선민이라면 이 시간만이라도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담고 있는 나는 어린 양과 함께 조각조각 불에 타 재가 되었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소천이라는 말대로 사람이 죽으면 하던 일은 다 멈추게 됩니다. 어떤 일도 마무리 지을 수 없습니다. 유서도 유언도 남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상번제는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소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는 소천의 인생관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던 일 다 멈추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관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이 재가 될 때까지 타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실시간으로 어린 양과 나를 동일시하며 내가 죽었음을 고백한다면 무슨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들을 빨리 받아서 그 힘으로 세상을 멋지게 살아보려는 마음이 급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과제는 ‘살기’가 아니고 ‘죽기’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은혜를 받아 세상을 멋지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라면 육체가 죽을 때까지 실시간으로 번제단에서 죽는 어린 양과 나를 동일시하며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민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소제와 전제를 통해서 이야기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소제와 전제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소제와 전제의 의미가 확실하게 이루어지려면 상번제의 인생관이 정착되어야만 합니다. 나는 죽기 위해 사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죄와 저주에 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 죄와 저주의 체질은 근절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제어하고 억누를 수 있을 뿐입니다. 억눌러서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죗값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지급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죄와 저주의 스위치를 끄고 비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억하고 ‘죽기’의 인생관이 유지되는 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 집니다. 그러나 의식에서 십자가를 잊고 ‘살기’로 전환하면 죄와 저주의 체질은 다시 활성화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인생을 ‘죽기’로 전환하는 스위치입니다. 십자가를 의식에서 잊어버릴 때 내 인생은 자동으로 ‘살기’로 전환됩니다. 그럴 때 죄와 저주가 활성화되면서 내 마음속에는 이 세상 것들을 배설물로 가득히 담게 됩니다. 배설물을 담으면서도 조금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세상 것을 마음껏 끌어안고, 마음껏 생각하고, 마음껏 바라고, 마음껏 계획합니다. 인분통에 빠진 것처럼 마음이 세상이라는 배설물 통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살기’가 아닌 ‘죽기’입니다. 다음 시간에 소제와 전제의 의미를 살펴보겠지만 삶은 내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 몸을 통해 사셔야 하고, 나의 인생관은 언제나 ‘죽기’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관을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빨리 죽어서 신비한 은혜를 입어 세상을 멋지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잘못된 인생관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살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죽기’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기’가 상번제의 인생관입니다.
선민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는 상번제의 긴 시간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는 시간으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이의 모든 시간도 죽음을 인정하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번제의 어린 양과 나를 동일시하며 죄와 저주에 찌든 나는 죽었다고 인정하는 삶을 살다 보면 다른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죽기’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책임지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여러분이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관은 어린 양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하는 상번제의 인생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투철하고 확고한 ‘죽기’의 상번제 인생관을 확립하여 이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