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곳곳에서 도시재생 사업이 한창이다. 오래 되고 낡은 지역을 보기 좋고 깨끗하게 정비하는 사업이다. 마을·아파트 단위 재개발·재건축부터 북항재개발 같은 대규모 공사까지 동시에 추진된다. 대체로 싹 철거하고 새로 짓는 방식이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흔적도 지워진다. 새로 짓는 것만이 옳은 해법일까. 요즘 '느린 건축'이 주목 받고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파트가 20~30년만 넘으면 재건축을 생각합니다. 건물 수명을 보통 30년 남짓으로 보는 거지요. 일본의 70~80년, 유럽의 최소 100년과 비교하면 차이가 너무 큽니다. 우리는 조금만 오래되면 폐기하고 새로 짓는 1회성 개념으로 주택을 봅니다. 시간이 남긴 흔적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신도시 개발 방식 답습하기보다
도시 정체성 지키려는 노력 필요
원형 대부분 훼손한 시민공원 조성
100년이라는 시간 갈아엎어 허탈
도개기능 스토리텔링 살린
영도대교 복원은 그런대로 의미 있어
원거주자 쫓겨나는 재개발·재건축
공동체 삶 먼저 생각하고 이뤄져야 김기수(54) 동아대 건축학과 교수를 서구 부민캠퍼스 석당박물관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느린 건축을 지향하고 있다. 작고 낮은 건축, 옛것의 흔적을 남겨 두는 방식의 건축이다. 부산시 문화재 전문위원이기도 한 그는 새로 그림 그리듯이, 무차별적으로 시행하는 도시재생 사업이 불만이다. 재개발·재건축을 하더라도 조금 더 천천히 세세하게 논의하면서,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스토리를 살리면서 재정비를 하라고 강조한다.
"도시재생 사업의 경우 근대적 개발 방식의 대표 격인 신도시 개발 방식을 아직도 답습하고 있습니다. 물론 허허벌판에다 새로 도시를 건설하려면 그래야 되겠지만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진 소중한 역사적 자산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거에, 빨리, 대규모로 추진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김 교수는 최근 10년간 영도대교 복원, 부산시민공원 조성, 북항재개발 등 부산의 대표적 개발 사업에 관여했다. 아쉬웠던 사례로 지난해 5월 개장한 부산시민공원을 들었다. 16만 5천 평에 달하는 부산시민공원은 하야리아 부대와 일본군 보급부대 땅이라는 100년의 역사를 잘 녹여야 세계적 명품 공원이 될 것이라고 조언하고 설계 자문에도 응했지만 추진사업단은 결국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일단 공원을 가로지르는 인위적인 길 5개를 만들고 거대한 잔디광장을 조성하면서 원형 대부분을 훼손했습니다. 보존한 것은 전체 건물의 20%도 채 되지 않을 겁니다. 겨우 막사 3~4개, 초등학교 건물, 공방·역사관 등 30개 정도 남겼습니다. 1세기라는 시간의 스토리를 갈아엎어 허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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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대교 탐방 인문학 프로그램. 김병집 기자 bjk@ |
이에 반해 2013년 개통한 영도대교 복원 공사는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웃는다. 안전 때문에 기존의 상판·교각 등은 다 철거했지만 다리 양끝 석축과 계단은 그대로 남겼으며 가장 중요한 스토리텔링이었던 도개기능을 되살린 것이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빨리 빨리'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시민들의 힘으로 이룩한 결실이었다고 말한다.
"복원 공사 도중 나온 강재·기계 등 구조물, 그리고 원래 도면·사진기록·동영상, 철거 과정 기록물 등이 다 보관되어 있지요. 당시 도개기능이 회복되면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 올테니 인근에 영도대교전시관을 건립해 전시하자고 합의했었는데 결국 무산됐습니다. 영도대교가 지속적인 스토리를 재생산하려면 필요한 공간이지요." 북항에도 최초 개항지로서 근대 토목기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니 꼭 보존하고 재개발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한다.
김 교수는 새것과 옛것의 적절한 조화를 자신이 총괄설계한 석당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건물은 당초 병원 용도로 1923년 짓기 시작, 1925년 완공했다. 그동안 경남도청·부산지법 등 건물로 써 왔는데 동아대서 2002년 구입, 2009년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했다.
"건물 자체가 사무실 공간이라서 박물관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했습니다. 개조가 필요했지만 등록문화재여서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외관은 본래 모습 그대로 남겨 두고 보수만 했습니다. 내부가 관건이었죠. 전시공간에 맞게 깔끔하게 바꾸면 보기에는 좋겠지만 건물이 가진 90년의 스토리가 사라지잖아요. 안전과 관련된 천장과 바닥만 새로 고치고 나머지 벽체는 고스란히 남겼지요. 낡고 오래된 벽돌과 새 벽돌을 조화시켜 원형을 살렸습니다. 조금 덕지덕지했지만 그게 더 멋지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김 교수는 특히 건물 가장자리 굴뚝도 그대로 살려 놓았더니 그 자체가 전시물이 됐다고 설명한다. 벽돌·기와 등 모든 철거물은 3층 전시실에 보관되어 있다. 다시 지으면 2년이면 되는 공사를 이런 방식으로 리모델링하니 5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현재의 재개발·재건축은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근본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느냐는 거죠. 기존 거주자가 다시 들어와 살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거예요. 기존 거주자는 모두 변두리로 쫓겨나는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김 교수는 현대건축의 세계 트렌드는 작고 느리고 지속가능한 건축이라고 강조한다. 삶이 중심이 되는 건축, 지역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건축이 선진국형이라는 것. 김 교수는 어떻게 느린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순전히 내 집을 지어 보려는 욕심에서 1981년 동아대 건축학과에 지원했지요. 88년 서울 '공간'건축사사무소에 들어갔는데 설립자가 김중업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건축의 1세대로 평가 받던 김수근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근대건축에다 한국적인 것을 어떻게 가미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영향으로 9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건축이 추구하는 작고 낮은 건축을 공부하게 됐지요."
김 교수는 가정에서도 스토리가 있는 건축 철학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거주하는 방을 안방·거실·책방이라고 부르는 대신 자신의 희망사항을 담은 '방 이름'으로 고쳐 부르라고 말한다. 이게 공간 디자인의 출발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에 걸맞게 꾸미게 되고 스토리가 생긴다는 것. 김 교수는 "익명성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기능과 경제 관념으로만 보던 집을 인문학적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는 첫 단계"라고 설명한다. 사소했던 삶이 빛나고 풍성해진다고 조언한다.
"하늘(조감도)을 먼저 보고 땅(시간의 흔적)을 보는 기존 건축 방식에서 땅의 삶을 먼저 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공동체의 삶을 먼저 읽고 도시 설계를 한다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창의적인 도시재생 사업이 될 것입니다. 바다와 산과 강이라는 원래 부산이라는 그림이 있는데 새로운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지요. 흉내내는 것으로는 세계적인 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soney97@busan.com
김기수 교수는
1961년 부산 출생. 88년 동아대 건축학과 졸업, 김수근이 설립한 서울 공간건축사사무소 입사. 93~98년 일본 교토공예섬유대학 건축학 석·박사. 99년 동서대 교수를 거쳐 2001년부터 동아대 건축학과 교수 재직. 현재 문화재청 근대분과 문화재 전문위원, 한국근대건축보존회 부산경남지회장. 영도대교 복원·부산시민공원·북항재개발 라운드테이블 운영위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