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이며 별세하신 뒤 순천의 안산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었다.[여지승람] 공이 처음에는 견훤왕(甄萱王)의 사위로서 장군이 되었다.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이 반역하여 왕을 금산사(金山寺)의 불당에 가두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견훤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투항하므로 공(公)이 부인과 함께 견훤에게 편지하여 위로하고 태조에게 화친(和親)을 청하여 내응(內應)할 것을 약속하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사자를 후히 상주고 회보하기를 그대의 은혜를 입어 길에서 막힘이 없게 된다면 장군을 형으로 섬기고 부인을 누님으로 받들어 끝까지 보답하겠으니 천지의 신들이 모두 이 말을 들었오 하였다. 드디어 신검을 토벌(討伐)하고 공을 좌승(佐丞)으로 삼아 밭 일천 경(一千頃)과 말 35필을 하사하고 두 아들에게 관직(官職)을 내려주었다.[고려사본전] 뒤에 공은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계사보(癸巳譜 1713)에 의하면 동몽서고(1童蒙筮告) 를 상고하건데 「기질이 뛰어나게 굳세다」하였다.
○배위(配位)는 백제견씨(百濟甄氏)이며 후백제(後百濟) 견훤의 따님이고 2남3녀를 키웠다. [原文] 高麗開國功臣三重大匡卒爲海龍山神[見輿地勝覽] 公初爲甄萱將軍及萱子神劍作亂萱投于麗太祖公 與夫人致書安慰於萱兼歸款於太祖請爲內應 太祖大喜厚賜其使 旣誅神劍 授公職佐丞賜田千頃官公二子[見麗史本傳] 光山譜 광산보(光山譜) : 계사보(癸巳의 平陽朴氏族譜)를 말함. 이 계사보는 우리 순천박씨 최초 간보(最初刊譜)로써 을사보에서는 광주보(光州譜)라 칭했는데 임술보에서 광산보(光山譜)라 했다. 曰按童蒙筮告氣質剛毅不?云 ○配百濟甄氏後百濟萱女有二子三女 □자 휘부전(諱不傳)3) □자 휘부전(諱不傳) □여 동산원부인(麗太祖 東山院夫人) : (无后) □여 문공왕후(麗定宗 文恭王后) : 문공왕후라 시(諡)하여 안릉(安陵)에 장(葬)하고 정종묘(定宗廟)에 부제(?祭)하였다. 목종(穆宗)5년 4월에 숙절(淑節)을 가(加)하고 현종(顯宗)5년 3월에 효신(孝愼)을 가하고 18년 4월에 경신(景信)을 가하고 뒤에 또 선목순성(宣穆順聖)을 가하였으며 문종(文宗)10년 10월에 정혜(貞惠)를 가하고 고종(高宗) 40년 10월에 안숙(安淑)을 가함.[왕조실록에 의함] □여 문성왕후(麗定宗 文成王后)4) : 1남1녀를 낳아 길렀는데 1남은 경춘원군(慶春院君)이며, 1녀 공주(公主)는 효성태자(孝成太子)에게 출가했다. ※을사보 이하 4?5세 실전(數世 失傳) : 정승공(政丞公) 주(註) 참조 ○대광공(大匡公)을 박씨소원록(朴氏溯源錄)에서 강남대군 언지(彦智)의 아래라 하였으나 선세의 족보에서 ‘황당무계(荒唐無稽)’하여 믿을 것이 못된다 하였다. 이성간보(尼城刊譜 즉 魯城譜)와 상주초보(尙州草譜) 및 선천(宣川) 박용채(朴龍采)의 초보(草譜)와 박씨소원록의 팔대군분봉설 등은 무계하게 조작된 것으로, 근엄(謹嚴)한 보계(譜系)의 혼돈을 막고 정백(精白)한 족보를 확립하기 위하여 일체를 삭제한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