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유 (隨筆)
影圓 김 인 희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이다. 매일 아침에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걸어서 출근하고 종일 한자리에 앉아서 일하고 퇴근한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에 갇혀 뱅뱅 도는 것과 흡사하다. 날마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바람과 하늘은 변화무쌍하다. 감나무에 매달린 열매도 시나브로 굵어지고 있다. 생각의 전환점이 없다면 지루하고 더러는 일탈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 것만 같다.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문하는 날들이 잦다. 잠시라도 여백이 생기면 우울하게 다가오는 질문에 답을 찾느라 허둥지둥 일을 찾는다. 직장에서는 일에 묻혀 시간이 가는 것을 잊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잠시의 여백에도 흔들리는 자신이다. 그때마다 일을 만들어 자신을 일에 묶어둔다. 가정에서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화장실에 갇혀 손빨래를 한다. 일에 쫒기다 보면 활력이 생기고 분주하게 일하다 보면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자신이다.
부모님 슬하에서 마냥 순수하게 성장하던 유년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하늘 같은 아버지와 한 떨기 과꽃을 유난히 사랑했던 아름다운 어머니 곁에서 언제나 별빛 꿈을 꾸었다. 아버지께서 가난한 농부라서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스무 살 시절에는 부천에서 살면서 서울에 있는 전력회사로 출퇴근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1호선 전철은 그 당시 ‘지옥철’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하게 사람을 태웠다. 그 전철을 타고 출근할 때는 흡사 전쟁을 방불케 했다. 인천에서 전철이 도착하면 부천 역에서 빽빽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승차해야 하고 용산역을 지나 남영역에서 하차할 때는 핸드백 끝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어느 날은 구두 리본 장식이 떨어져서 달랑달랑한 채 출근한 적이 있었다. 아침에 새로 신은 스타킹 올이 나가는 것은 다반사였다.
시골에서 상경한 스무 살 사회 초년생은 그렇게 치열하게 삶의 노선에 뛰어들었다. 거무튀튀한 빌딩 숲에서 호흡조차 크게 할 수 없이 의기소침했던 자신이었다. 알프스를 떠났던 하이디가 도시에서 몽유병에 걸려 방황했던 것처럼 무엇인가 찾아 헤매던 시절이었다. 불현듯이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서 수불석권(手不釋卷)하라고 당부했던 말씀을 기억해냈다. 그때부터 자신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기독교서점을 단골로 이용하면서 기독서적을 구입해서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 부천을 떠나 천안으로 이사 올 때 기독교 서점에서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다고 선물을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
천안에서 2년 정도 지내다가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딸과 아들을 낳고 전업주부로 지냈다. 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을 현모양처(賢母良妻)로 정했던 것을 기억하고 철저하게 살림살이했다. 가정 중심으로 지내면서 두 자녀를 잉태했을 때는 태교(胎敎)에 신중했다. 태교에 관한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으면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주의했다. 태중에 있는 아기가 딸이라면 공주처럼 아들이라면 왕자처럼 키우겠다고 다짐했었다.
남매를 양육하면서 생활계획표를 짜서 벽에 걸어두었다. 초등학교 때 방학마다 커다란 대접을 엎어서 스케치북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피자 조각처럼 시간을 나누어서 계획을 세우듯이 자녀들을 양육했다. 가장 밝고 따뜻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고 동화를 들려주었다. 오전과 오후 정해진 시간을 산책하면서 만나는 풀을 만져보게 하고 꽃 이름을 알려주고 따라 부르게 했다. 가게 앞을 지나갈 때 가게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동화책을 읽어줄 때도 책 제목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글자를 짚어 읽어주었다. 자녀들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동화책을 줄줄 읽었다. 지인들은 신동이라고 영재라고 야단이었지만 누군들 그렇게 정성을 들였다면 못했을까. 자연히 실소를 머금는다.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상업학교를 졸업할 후 직장생활을 하느라 대학 공부를 하지 못했던 한이 가슴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큰 딸아이가 다섯 살 되고 둘째 아들아이가 세 살 되었을 때 두 자녀를 안고 공주에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습관을 찾아가서 원서를 접수했다. 대학 졸업장뿐 아니라 공부를 제대로 하겠다고 벼르고 기세 좋게 영어영문학과에 지원했다.
내 삶의 여정에서 그때만큼 치열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두 자녀를 품에 끼고 방송으로 공부를 했다. 지금은 컴퓨터를 통해 온라인으로 학습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지만 그때는 TV로 방송되는 시간에 맞추어 수업을 들었다. 자녀들과 실랑이하면서 제대로 방송을 듣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매 방송마다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 두고 반복해서 수업을 들었다. 중간고사 두 번 학기말 시험 두 번 매년 네 번의 시험을 치르고 점수에 따라 통과하고 점수가 미치지 못하면 과락으로 다음 학기를 재수강해야 했다.
고전분투(孤戰奮鬪)가 따로 없었다. 4학년 되던 해 갑상선 수술을 하게 되었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학교 측에 수술해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되면 어찌해야 하는지 문의했더니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무조건 과락이라고 했다. 어찌나 미련하였는지 목에 거즈를 두른 상태로 시험 보러 가다가 버스 안에서 잠시 혼절했었다. 과락으로 한 학기를 더 연장해서 공부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토록 치열하게 매달렸건만 전공과목 과락이 있어서 영어 영문학사가 되기까지 5년이 걸렸다.
대학을 졸업한 후 2층 집을 구했다. 1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2층은 공부방을 차려서 초등학교 아이들과 방과 후에 공부했다. 방 벽면을 동화책으로 꽉 채우고 면학분위기를 조성했다. 상담 차 방문한 부모들은 망설이지 않고 자녀를 등록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신실하게 뛰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많은 아이들이 ‘사임당 공부방’을 거쳐 갔다. 주말에는 독서논술 지도를 했고 저녁에는 중학생 영어 과외를 지도했다. 더러는 거리가 먼 아파트로 출장 수업도 나갔다.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논산에 있는 건양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부방을 마치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대학원에 가서 교수님과 동료 선생님들과 공부할 때 너무 행복해서 탄성을 질렀다. 교수님과 대면하고 수업을 하는 것이 꿈만 같았다. 자신의 열정적인 수업태도에 지도교수님께서는 ‘K선생님이 학부생이라면 키워주고 싶다.’고 했었다.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답사여행으로 다녀온 나병환자들이 있는 소록도 방문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큰 딸아이가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현모양처 우렁이 각시도 밖으로 나왔다. 자녀들에게 집에 있는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집에서 공부방을 운영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공부방을 할 때 자신의 미래를 계획했었다. 막연한 계획이었지만 자신의 나이 50대에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강의를 하겠다고 했었다. 어느 날 노트에 적어 두었던 미래 플랜을 펼쳐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꿈의 노선에 들어선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시작 노트를 들고 다니던 계집아이는 불혹의 나이에 등단하여 詩人과 隨筆家가 되었다. 등단할 수 있었던 것은 스무 살 시절 앓았던 불치병 활자중독증에 걸렸던 것이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참으로 고단하지만 대견하게 걸어왔다. 독서의 원동력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로 이끌었다. 글을 쓰면서 희열을 느끼는 중년이다.
가정에서는 안주인으로 권세를 누리고 밖에서는 직장인으로 일할 수 있어서 참 좋다. 문학회의 사무국장으로 편집국장으로 맡겨진 일들이 감사하다. 늘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문학회 답사 시 인솔하고 사회 진행하는 일, 편집을 하기 위해 컴퓨터와 마주하고 일하는 시간, 써야 할 글이 숙제처럼 기다리고 있을 때...
자신이 사는 이유를 찾는 소중한 시간이다.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내일은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두근두근 설렌다. -끝 -
첫댓글 글을 읽는 내내
잠시도 쉬지않고 읽었습니다.
소리내어 읽었더라면 숨이 가파올수도 있었을...
그만큼 님의 필력에 압도되어 , 숨쉬는 것조차 아까워 단숨에 읽었습니다.
지금 까지 제가 쓰고 올렸던 제 글이 한없이 초라해지고
우스꽝 으로 느껴집니다.
그 만큼 시와 수필은 아무나 쓰는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군요.
대단 하십니다.
존경합니다~^^
국장님!
저는 반대의견입니다.
국장님 필력에 잔뜩 주늑들었답니다.
국장님의 열정적인 글쓰는 모습에
저도 분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윈윈 하자구요~~~
대 충남신문의 편집국장님이 아니십니까!
한 수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라고 했던가요
저를 놀리는 재미가 솔솔하지요~^^
자가당착에 빠져 시랍시고 쓰고 있는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시각입니다.
솔직히 신문기사 작성하는 건 자신있는데
시나 수필은 정말 힘들게 합니다.
아마도 기초가 없어서 겠지요
진실된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도 더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길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볼까요?
겸손이 아닌 진실입니다.~~~^^
길 가는 사람이 무얼 안다고,,,
ㅋㅋㅋ
그러게요~~~ㅎ 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