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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군수(定平郡守) 등 역임한 정3품 김유수(金裕秀)
성명 | 김유수(金裕秀), 자(字) 내민(乃民) |
사마시 | [진사시]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12위(341/1055), 과목 : 일시(一詩) |
생년 | 기사(己巳) 1869년 (고종 6) |
합격연령 | 26세 |
본관 | 남원(南原) |
거주지 | 함경남도 고원(高原) |
전력 | 유학(幼學) |
부(父) | 성명 : 김낙구(金洛龜), 과거 : 진사(進士) 부모구존 : 중시하(重侍下) |
출전 | 『上之卽祚三十二年甲午式年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
① 승정원일기 3043책 (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2월 8일 을묘 23/23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 甲午二月初八日初更, 上御含元殿。 京外儒生應製科次入侍時, 行都承旨金鶴鎭, 行左承旨李暐, 右承旨尹定求, 左副承旨朴用元, 右副承旨閔商鎬, 同副承旨李圭宰, 假注書洪顯哲·閔廣植, 記事官閔厚植·韓昌洙·徐相勛·李蓍宰, 領議政沈舜澤, 判府事金弘集, 左議政趙秉世, 判府事鄭範朝, 左賓客閔泳駿, 右賓客李承五, 左副賓客鄭基會, 右副賓客閔泳韶, 檢校提學金永壽·尹用求·金奎弘·金宗漢·閔宗植·閔丙承·李埈鎔·趙鼎九, 檢校直閣南奎熙·沈相瓚·兪鎭弼·金商悳, 檢校待敎韓耆東·李垠鎔·吳正根, 檢校輔德沈相薰·趙東冕·閔泳達·金永悳·閔丙承, 行輔德金春熙, 行兼輔德閔宗植, 檢校輔德宋道淳, 檢校弼善金昇奎·閔京鎬·金鶴洙·閔泳琦·沈相瓚·閔丙漢·閔泳琦·金晩秀·閔衡植, 弼善朴昌緖, 兼弼善尹斗炳, 檢校文學尹容植·尹KC02652·閔啓鎬·鄭世源·閔泳瓚, 文學金䄵奎, 兼文學李始榮, 檢校司書李容稙·徐公淳·尹昌燮·趙東潤, 兼司書金有濟, 說書閔泳復, 兼說書吳衡根, 校理金若濟, 副修撰申性均, 以次侍立訖。 上曰, 史官分左右。 仍命考試, 秉世等考試, 少頃, 上入小次。 鶴鎭以司謁口傳入稟曰, 今番則取幾人乎? 上曰, 詩賦表各取八十人。 秉世等考試訖。 上出次, 命書御製曰, 東宮望三旬進宴識喜, 學隨年進又新新, 方知如川茀祿申, 同我群臣嘉會意, 三旬肇啓慶弧辰。 鶴鎭跪書讀奏訖。 仍命參宴時·原任大臣·春坊·賓客·玉堂·承史·閣臣, 內衙門堂上·會宴所堂郞製進。 仍命編次, 秉世等編次。 鶴鎭曰, 讀券何以爲之乎? 上曰, 對讀官讀之。 若濟讀奏詩賦表第一張, 至第五句。 上命止之。 秉世曰, 書等何以爲之乎? 上曰, 詩賦表各三張, 書正三下, 各二十二張, 書草三下, 其餘竝書次上。 秉世書等訖, 春熙曰, 坼封何以爲之乎? 上曰, 承旨坼封也。 鶴鎭等, 坼封讀奏訖。 上命編次中年二十一歲人, 竝特付草三下。 仍命書傳敎曰, 京外儒生應製表居首三下一, 生員洪祐哲, 三下二幼學林埴, 三下三生員李憲榮, 賦居首三下一, 幼學金南齊, 三下二, 幼學姜洙哲, 三下三, 幼學金濟龍, 詩居首三下一, 幼學金學謨, 三下二, 幼學尹夏榮, 三下三, 幼學金容燮, 竝直赴殿試, 表之次草三下, 幼學金大稙·金炳華·金裕秀·朱潤鎬·吳石根·李會九·申性均·尹芝榮·李斗卿·鄭雲漢·吳昌善·崔翰龍·李載龜·洪思說·河昌秀·閔泳南·李鍾聞·金鍾卿·安敎亨·洪秉完, 賦之次草三下, 幼學李能浩·柳澧根·李升世·李孝濟·宋炳喆·趙東春·咸榮植·孫宅羲·趙庸錫·李應世·郭東錫·吳德根·申緻鎬·朴得英·金禧容·鄭曦朝·王性淵·金承恪·姜夢錫·金鼎龍·李時雨·朴宗燮·柳寅達·張利用·安泳倬·吉星天·吳基周·梁在鶴·朴春煥, 詩之次草三下, 幼學金應澤·權燧光·黃在鼎·金永驥·文鏡淑·趙智鴻·申喆淳·李啓煥·李觀稙·韓圭相·閔璣植·李夢苽·鄭龍範·金學獜·蔡俊源·許懃·沈奎爕·朴基鳳·李鶴淳·崔元植·金在淵·朴海龍·周容謨·呂獜鉉·權永熙·金永駿·鄭泰一·李璧鎬·南雲燮, 竝付之進士榜末, 表之次草三下幼學沈普澤等十二人, 賦之次草三下幼學李綱夏等十二人, 詩之次草三下幼學金南煥等十二人, 竝直赴會試, 表之次次上童蒙朴獜陽等十一人, 賦之次次上幼學金龍洛等八人, 詩之次次上幼學金震煥等八人, 竝給二分, 表之次次上幼學徐丙聞等十一人, 賦之次次上幼學尹鎬仁等八人, 詩之次次上幼學崔慶鉉等八人, 竝給一分, 表之次次上幼學徐東煥等十一人, 賦之次次上幼學金獜昊等八人, 詩之次次上幼學金溶騤等八人, 竝付之監試, 初試榜末, 表之次次上幼學安鳴鎬等十二人, 賦之次次上幼學嚴龍爕等十二人, 詩之次次上幼學崔象澧等十二人, 各奎章全韻一件賜給。 又傳曰, 入格儒生, 明日待令。 秉世曰, 今日試券, 有疊呈之擧子, 雖已拔去, 言念士習, 不可無懲, 照法勘處, 何如? 上曰, 今日異於他日, 更無敢如是之意, 申飭于四館所, 可也。 又奏曰, 十二日應製試官, 以今日試官仍用有命矣。 臣以連日慶忭之中, 不敢言私, 而感嗽苦劇, 又難詣公, 冒悚仰達。 上曰, 試官當變通矣。 仍命十二日應製試官, 以檢校文學金永壽爲之。 上命試官先退, 又命退, 承史以次退出。
고종 31년 갑오(1894) 2월 8일(을묘) 맑음
31-02-08[27] 함원전에서 응제를 과차할 때 행 도승지 김학진 등이 입시하였다
○ 초경(初更).
상이 함원전(含元殿)에 나아가 경외(京外)의 유생을 대상으로 한 응제(應製)를 과차(科次)하였다. 이때 입시한 행 도승지 김학진, 행 좌승지 이위, 우승지 윤정구, 좌부승지 박용원, 우부승지 민상호, 동부승지 이규재, 가주서 홍현철ㆍ민광식, 기사관 민후식ㆍ한창수ㆍ서상훈ㆍ이시재, 영의정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 김홍집(金弘集), 좌의정 조병세(趙秉世), 판중추부사 정범조(鄭範朝), 좌빈객 민영준(閔泳駿), 우빈객 이승오(李承五), 좌부빈객 정기회(鄭基會), 우부빈객 민영소(閔泳韶), 검교제학 김영수ㆍ윤용구ㆍ김규홍ㆍ김종한ㆍ민종식ㆍ민병승ㆍ이준용ㆍ조정구, 검교직각 남규희ㆍ심상찬ㆍ유진필ㆍ김상덕, 검교대교 한기동ㆍ이은용ㆍ오정근, 검교보덕 심상훈(沈相薰)ㆍ조동면(趙東冕)ㆍ민영달(閔泳達)ㆍ김영덕(金永悳)ㆍ민병승(閔丙承), 행 보덕 김춘희(金春熙), 행 겸보덕 민종식(閔宗植), 검교보덕 송도순(宋道淳), 검교필선 김승규(金昇奎)ㆍ민경호(閔京鎬)ㆍ김학수(金鶴洙)ㆍ심상찬ㆍ민병한(閔丙漢)ㆍ민영기(閔泳琦)ㆍ김만수(金晚秀)ㆍ민형식(閔衡植), 필선 박창서(朴昌緖), 겸필선 윤두병(尹斗炳), 검교문학 윤용식(尹容植)ㆍ윤헌(尹)ㆍ민계호(閔啓鎬)ㆍ정세원(鄭世源)ㆍ민영찬(閔泳瓚), 문학 김연규(金䄵奎), 겸문학 이시영(李始榮), 검교사서 이용직(李容稙)ㆍ서공순(徐公淳)ㆍ윤창섭(尹昌燮)ㆍ조동윤(趙東潤), 겸사서 김유제(金有濟), 설서 민영복(閔泳復), 겸설서 오형근(吳衡根), 교리 김약제, 부수찬 신성균이 차례로 시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고시(考試)하라고 명하니, 조병세 등이 고시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소차(小次)에 들어갔다. 김학진이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여쭙기를,
“이번에는 몇 사람을 뽑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詩), 부(賦), 표(表)에서 각각 80인을 뽑으라.”
하였다. 조병세 등이 고시하였다. 상이 소차에서 나와 어제(御製)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동궁이 21세가 되었기에 진연(進宴)을 베풀어 기쁨을 표하노라.[東宮望三旬進宴識喜] 학문이 나이 따라 진보하여 새롭고 또 새로워지니, 크나큰 복이 강물마냥 흘러들고 또 흘러들어라. 나의 뭇 신하와 함께 아름다운 연회 베푸는 뜻은, 스물한 살이 된 생일을 축하함이로다.[學隨年進又新新 方知如川茀祿申 同我羣臣嘉會意 三旬肇啓慶弧辰]”
하니, 김학진이 무릎 꿇고 쓴 다음 읽어 아뢰었다. 이어 연회에 참여한 시원임 대신, 춘방, 빈객, 옥당, 승지, 사관, 각신, 내아문 당상, 회연소(會宴所)의 당상과 낭청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어 편차(編次)하라고 명하니, 조병세 등이 편차하였다. 김학진이 아뢰기를,
“시권(試券)을 읽는 것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독관(對讀官)이 읽으라.”
하였다. 김약제가 시, 부, 표의 첫째 장(張)을 읽어 아뢰어 다섯째 구(句)에 이르니, 상이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등차(等次)를 쓰는 일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 부, 표에서 각각 3장은 정삼하(正三下)로 쓰고, 각각 22장은 초삼하(草三下)로 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차상(次上)이라고 쓰라.”
하였다. 조병세가 등차를 썼다. 김춘희가 아뢰기를,
“봉미(封彌)를 뜯는 것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봉미를 뜯으라.”
하였다. 김학진 등이 봉미를 뜯은 다음 읽어 아뢰었다. 편차한 것 중에 나이가 21세 된 사람에게는 모두 특별히 초삼하(草三下)를 주라고 상이 명하였다. 이어서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경외의 유생을 대상으로 한 응제의 표에서 수석으로 삼하일(三下一)을 맞은 생원 홍우석(洪祐晳), 삼하이(三下二)를 맞은 유학 임식(林埴), 삼하삼(三下三)을 맞은 생원 이헌영(李𨯶永)과 부에서 수석으로 삼하일을 맞은 유학 김남제(金南齊), 삼하이를 맞은 유학 강수철(姜洙哲), 삼하삼을 맞은 유학 김제룡(金濟龍)과 시에서 수석으로 삼하일을 맞은 유학 김학모(金學謨), 삼하이를 맞은 유학 윤하영(尹夏榮), 삼하삼을 맞은 유학 김용섭(金容燮)은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하라. 표에서 그 다음 초삼하를 맞은 유학 김대직(金大稙)ㆍ김병화(金炳華)ㆍ김유수(金裕秀)ㆍ주윤호(朱潤鎬)ㆍ오석근(吳石根)ㆍ이회구(李會九)ㆍ신성균(申性均)ㆍ윤지영(尹芝榮)ㆍ이두경(李斗卿)ㆍ정운한(鄭雲漢)ㆍ오창선(吳昌善)ㆍ최한룡(崔翰龍)ㆍ이재귀(李載龜)ㆍ홍사열(洪思說)ㆍ하창수(河昌秀)ㆍ민영남(閔泳南)ㆍ이종문(李鍾聞)ㆍ김종경(金鍾卿)ㆍ안교형(安敎亨)ㆍ홍병완(洪秉完), 부에서 그 다음 초삼하를 맞은 유학 이능호(李能浩)ㆍ유풍근(柳豐根)ㆍ이승세(李升世)ㆍ이효제(李孝濟)ㆍ송병철(宋炳喆)ㆍ조동춘(趙東春)ㆍ함영식(咸榮植)ㆍ손택희(孫宅羲)ㆍ조용석(趙庸錫)ㆍ이응세(李應世)ㆍ곽동석(郭東錫)ㆍ오덕근(吳德根)ㆍ신치호(申緻鎬)ㆍ박득영(朴得英)ㆍ김희용(金禧容)ㆍ정희조(鄭曦朝)ㆍ왕성연(王性淵)ㆍ김승각(金承恪)ㆍ강몽석(姜夢錫)ㆍ김정룡(金鼎龍)ㆍ이시우(李時雨)ㆍ박종섭(朴宗燮)ㆍ유인달(柳寅達)ㆍ장이용(張利用)ㆍ안영탁(安泳倬)ㆍ길성천(吉星天)ㆍ오기주(吳基周)ㆍ양재학(梁在鶴)ㆍ박춘환(朴春煥), 시에서 그 다음 초삼하를 맞은 유학 김응택(金應澤)ㆍ권수광(權燧光)ㆍ황재정(黃在鼎)ㆍ김영기(金永驥)ㆍ문경숙(文鏡淑)ㆍ조지홍(趙智鴻)ㆍ신철순(申喆淳)ㆍ이계환(李啓煥)ㆍ이관직(李觀稙)ㆍ한규상(韓圭相)ㆍ민기식(閔璣植)ㆍ이몽고(李夢苽)ㆍ정용범(鄭龍範)ㆍ김학린(金學麟)ㆍ채준원(蔡俊源)ㆍ허근(許懃)ㆍ심규섭(沈奎燮)ㆍ박기봉(朴基鳳)ㆍ이학순(李鶴淳)ㆍ최원식(崔元植)ㆍ김재연(金在淵)ㆍ박해룡(朴海龍)ㆍ주용모(周容謨)ㆍ여인현(呂麟鉉)ㆍ권영희(權永熙)ㆍ김영준(金永駿)ㆍ정태일(鄭泰一)ㆍ이벽호(李璧鎬)ㆍ남운섭(南雲燮)은 모두 진사시(進士試)의 방목(榜目) 끝에 붙이라. 표에서 그 다음 초삼하를 맞은 유학 심보택(沈普澤) 등 12인, 부에서 그 다음 초삼하를 맞은 유학 이강하(李綱夏) 등 12인, 시에서 그 다음 초삼하를 맞은 유학 김남환(金南煥) 등 12인은 모두 직부회시(直赴會試)하게 하라. 표에서 그 다음 차상(次上)을 맞은 동몽(童蒙) 박인양(朴麟陽) 등 11인, 부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김용락(金龍洛) 등 8인, 시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김진환(金震煥) 등 8인에게는 모두 2분(分)을 주고, 표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서병문(徐丙聞) 등 11인, 부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윤호인(尹鎬仁) 등 8인, 시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최경현(崔慶鉉) 등 8인에게는 모두 1분을 주라. 표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서동환(徐東煥) 등 11인, 부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김인호(金麟昊) 등 8인, 시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김용규(金溶騤) 등 8인에게는 모두 감시(監試) 초시(初試)의 방목 끝에 붙이라. 표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안명호(安鳴鎬) 등 12인, 부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엄용섭(嚴龍燮) 등 12인, 시에서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최상풍(崔象豐) 등 12인에게는 각각 《규장전운(奎章全韻)》 1건(件)을 사급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입격(入格)한 유생은 내일 대령하라.”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오늘 시권을 중첩되게 바친 응시자가 있습니다. 비록 그 시권을 뽑아 버리긴 했지만 선비들의 풍기를 생각할 때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법에 비추어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보통 때와는 다르니, 다시는 감히 이런 일을 저지르지 말도록 사관소(四館所)에 신칙하는 정도로 그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12일 응제의 시관은 오늘 시관을 그대로 쓰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은 연일 경사스런 분위기 속에 감히 사적인 일을 말씀드리지 못했으나, 실은 기침감기가 심하여 공무(公務)를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송구함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관은 변통하겠다.”
하였다. 이어 12일 응제의 시관은 검교문학 김영수(金永壽)로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시관들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② 승정원일기 3043책 (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2월 20일 〈정묘〉 16/31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 又以禮曹言啓曰, 卽接四館所牒呈, 則癸巳八月九日製, 入格幼學金瑞鏞·吳瓆根·明海斗·尹相億·朴洛熙·金夢洙·李祥稙·金昌鎬·朴熙俊·金裕秀·金大洛·金秀夏·邊東植·李膺壽·林𡎋·沈駿澤·嚴奭鎭·李秉錫·閔丙弼·金福林·宋履鉉·李大錫·朴溶壽·姜春馨·韓鳳梧·申命鎭·曺秉穆·金亨弼·禹太亨·趙吉元·李龍稙·金用化·崔秉一·閔丙敦·洪炳乾·李種萬·朴甲獜·朴台元·羅錫玕, 同年同月館學儒生應製入格幼學洪啓鉉·安泳穆·申東殷·朴鎭鎬·盧東夏·張鑽·孫晉弼·朱暢欽·李裕英·趙鍾雲·薛鎭杰·朴濟安·金錫用·鄭仁朝·鄭東榮·元培常·李容夏·文鶴來·李相五·朱錫鼎·鄭泰舟·盧載涉·金鍾鳳·張軫煥·李之憲·金時亨·金容殷·金鍾禧·李種雨·張世炫·金復圭·魚允瑢·韓國藎·李觀薰·崔來鵬·李柱鳳·尹鍾佑·尹瑚·李準世·姜命熙·李仝·韓永注·金景洙·沈相勳·廉正鏞·廉成鏞·徐相九·朴佐輔·張興鎭·尹敦榮·李浚在·曺秉五·朴獜緖·崔鳳吉·尹承翊·尹學榮·金容植·宋龜鉉·徐乘駿·尹福榮·丁奎明·金斗植·徐萬燮·李敏夏·趙漢鈺·沈能敬·金錫重·宋正洙·金演聲·卓龍KC11074·宋錫龍·任泰權·李圭復·金箕精·趙東喜·安熙瑒·柳鼎夏·崔快集·魚允迪·趙璣衡·許塾·李鉉九·金基悳·兪益濬·朴馹陽·金昇龍·明濟兢·李豊魯·高運河·崔燉一·宋淳敬·吳寬泳·朴應燁·安慶欽·李瑞和·鄭燦·金相璧·羅卿學·李用濟·朴鳳九·朴文郁·李承儀·柳一龍·李賢洙·金昌圭, 同年十月館學儒生應製入格, 幼學具應圭·裴元淳·曺弼承·吳敬敦·李南求·韓錫亨·金正鍵·朴鳳陽·李象興·崔濬鉉·崔渂鉉·黃宗周·曺濟煥·龍漢彩·蘇斗烈·吳根洙·任憲宰·朴思默·張燦·李瑢熙·朴敎秉·崔永卨·張鋽, 同年同月館學儒生應製入格儒學李瓚永·李夢得·成樂春·姜俊遠·金昌演·李容殷·李鶴遠·金相驥·宋鳳鉉·閔泳默·朴魯哲·金濟相·沈起燮·李鍾善·金鶴准·金顯萬·卓桂胄·張在龍·李春承·金脩鉉·金命奎·玄正獜·尹星根·金信鏞·李炳苾, 同年十二月館學儒生應製入格幼學明處雄·尹繼錫·鄭淳中·李鴻九·黃義鍾·郭昌鉉·朴仁壽·李石應·申泰兢·李慶宰·金楨燁·趙萬元·李斗範·兪致鳳·趙東璿·姜在鳳·安楨·申玄鎭·徐龍錫·徐丙翼·崔東煥·金若泰, 同年同月日次儒生殿講, 以製代講入格幼學吳楨煥·金龍洙·金琦洙·沈雷宅·金昌燮·申光休·兪致興·洪顯奭·趙鶴元·金商祐·朴基昌·趙東植·金在榮·尹相天·金道濟·尹淳學·韓仁坤·崔基肇·金錫厚·李承甸·申鉉九·李世龍·閔丙羲·尹孝定·鄭秀憲, 同年同月月課入格幼學鄭道永·趙瑾河·盧鳳洙·金鳳文·李鳳來·孫章鉉·閔泰雲, 甲午二月館學儒生應製入格幼學徐泰煥·金周應·金容周·申思均·崔遇鴻·嚴長燮·鄭元謨·韓永洙·鄭朝時·金官鴻·李奎鼎·金麟鎬·愼宗翰·金臨熙·權衡奎·姜建重·尹奎煥·權仁洽·黃鍾國·金溶驥·權炳河·呂永韶·申學均·曺得承·田熙植·金權璿·尹義淳, 同年同月日次儒生殿講, 以〈製〉代講入格幼學李種德·李相軫·成佑永·李寅英·張容麟·林炳畯·朴麟默·金夢彩·李升月·李施馥·李敦和·金容準·宋鍾元·曺奭炫·金鍾天·李龍雨·金容耇·李起鍾·李庭珪·金履勳·崔在鶴·鄭祉源·李邦寧·尹滋民·趙泰鳳·郭增鉉, 同年同月館學儒生應製入格幼學鄭禧源·崔炳弼·申聖雨·徐厚容·宋載秀·李鍾默·兪鎭晩·金正煥·朴昌鷹·金永漢·李尙珪·李建龍·鮮于億·孫昌建·吳信根·金KC11099圭·韓秉會·李範九·李德純·李聖䄵·金恩翼·姜秉模·李承七·劉思九·李昌植, 同年同月柑製入格幼學崔鶴壽·李能祜·李熙喆·朴濟炫·韓應敎·申錫悌·孫永夏·具漢瑞·金商寔·劉浩永·朴炳龜·李浚玉·朴泰楨·康秉强·金顯星·朴性夏·孫承喆·鄭昇烈·韓東秀·梁基衡·申泰健·金顯祥·金玉榮·吳然中·李龍燮·申泰麟·張壽天·鄭大燮·尹大鶊·吳然秀·朴東炫·洪基燮竝付之監試初試榜末事, 命下矣。 竝於今番許赴事, 報來矣。 金瑞鏞等三百五十七人, 竝使之許赴於今番監試覆試, 何如? 傳曰, 允。
고종 31년 갑오(1894) 2월 20일(정묘) 맑음
유학 김서용 등 357인에게 감시 복시에 응시를 허락할 것을 청하는 예조의 계
○ 또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사관소(四館所)의 첩정(牒呈)을 보니, ‘계사년 8월 구일제(九日製)에 입격한 유학 김서용(金瑞鏞)ㆍ오질근(吳瓆根)ㆍ명해두(明海斗)ㆍ윤상억(尹相億)ㆍ박낙희(朴洛熙)ㆍ김몽수(金夢洙)ㆍ이상직(李祥稙)ㆍ김창호(金昌鎬)ㆍ박희준(朴熙俊)ㆍ김유수(金裕秀)ㆍ김대락(金大洛)ㆍ김수하(金秀夏)ㆍ변동식(邊東植)ㆍ이응수(李膺壽)ㆍ임후(林𡎋)ㆍ심준택(沈駿澤)ㆍ엄석진(嚴奭鎭)ㆍ이병석(李秉錫)ㆍ민병필(閔丙弼)ㆍ김복림(金福林)ㆍ송이현(宋履鉉)ㆍ이대석(李大錫)ㆍ박용수(朴溶壽)ㆍ강춘형(姜春馨)ㆍ한봉오(韓鳳梧)ㆍ신명진(申命鎭)ㆍ조병목(曺秉穆)ㆍ김형필(金亨弼)ㆍ우대형(禹大亨)ㆍ조길원(趙吉元)ㆍ이용직(李龍稙)ㆍ김용화(金用化)ㆍ최병일(崔秉一)ㆍ민병돈(閔丙敦)ㆍ홍병건(洪炳乾)ㆍ이종만(李鍾萬)ㆍ박갑린(朴甲麟)ㆍ박태원(朴台元)ㆍ나석간(羅錫玕)과 동년 동월 관학 유생의 응제에 입격한 유학 홍계현(洪啓鉉)ㆍ안영목(安泳穆)ㆍ신동은(申東殷)ㆍ박진호(朴鎭鎬)ㆍ노동하(盧東夏)ㆍ장찬(張鑽)ㆍ손진필(孫晉弼)ㆍ주창흠(朱暢欽)ㆍ이유영(李裕英)ㆍ조종운(趙鍾雲)ㆍ설진걸(薛鎭杰)ㆍ박제안(朴濟安)ㆍ김석용(金錫用)ㆍ정인조(鄭仁朝)ㆍ정동영(鄭東榮)ㆍ원배상(元培常)ㆍ이용하(李容夏)ㆍ문학래(文鶴來)ㆍ이상오(李相五)ㆍ주석정(朱錫鼎)ㆍ정태주(鄭泰舟)ㆍ노재섭(盧載涉)ㆍ김종봉(金鍾鳳)ㆍ장진환(張軫煥)ㆍ이지헌(李之憲)ㆍ김시형(金時亨)ㆍ김용은(金容殷)ㆍ김종희(金鍾禧)ㆍ이종우(李種雨)ㆍ장세현(張世炫)ㆍ김복규(金復圭)ㆍ어윤용(魚允瑢)ㆍ한국신(韓國藎)ㆍ이관훈(李觀薰)ㆍ최내붕(崔來鵬)ㆍ이주봉(李柱鳳)ㆍ윤종우(尹鍾佑)ㆍ윤호(尹瑚)ㆍ이준세(李準世)ㆍ강명희(姜命熙)ㆍ이동(李仝)ㆍ한영주(韓永注)ㆍ김경수(金景洙)ㆍ심상훈(沈相勳)ㆍ염정용(廉正鏞)ㆍ염성용(廉成鏞)ㆍ서상구(徐相九)ㆍ박좌보(朴佐輔)ㆍ장흥진(張興鎭)ㆍ윤돈영(尹敦榮)ㆍ이준재(李浚在)ㆍ조병오(曺秉五)ㆍ박인서(朴麟緖)ㆍ최봉길(崔鳳吉)ㆍ윤승익(尹承翊)ㆍ윤학영(尹學榮)ㆍ김용식(金容植)ㆍ송귀현(宋龜鉉)ㆍ서승준(徐乘駿)ㆍ윤복영(尹福榮)ㆍ정규명(丁奎明)ㆍ김두식(金斗植)ㆍ서만섭(徐萬燮)ㆍ이민하(李敏夏)ㆍ조한옥(趙漢鈺)ㆍ심능경(沈能敬)ㆍ김석중(金錫重)ㆍ송정수(宋正洙)ㆍ김연성(金演聲)ㆍ탁용우(卓龍●)ㆍ송석룡(宋錫龍)ㆍ임태권(任泰權)ㆍ이규복(李圭復)ㆍ김기정(金箕精)ㆍ조동희(趙東喜)ㆍ안희창(安熙瑒)ㆍ유정하(柳鼎夏)ㆍ최쾌집(崔快集)ㆍ어윤적(魚允迪)ㆍ조기형(趙璣衡)ㆍ허숙(許塾)ㆍ이현구(李鉉九)ㆍ김기덕(金基悳)ㆍ유익준(兪益濬)ㆍ박일양(朴馹陽)ㆍ김승룡(金昇龍)ㆍ명제긍(明濟兢)ㆍ이풍로(李豐魯)ㆍ고운하(高運河)ㆍ최돈일(崔燉一)ㆍ송순경(宋淳敬)ㆍ오관영(吳寬泳)ㆍ박응엽(朴應燁)ㆍ안경흠(安慶欽)ㆍ이서화(李瑞和)ㆍ정찬(鄭燦)ㆍ김상벽(金相璧)ㆍ나경학(羅卿學)ㆍ이용제(李用濟)ㆍ박봉구(朴鳳九)ㆍ박문욱(朴文郁)ㆍ이승의(李承儀)ㆍ유일룡(柳一龍)ㆍ이현수(李賢洙)ㆍ김창규(金昌圭)와 동년 10월 관학 유생의 응제에 입격한 유학 구응규(具應圭)ㆍ배원순(裵元淳)ㆍ조필승(曺弼承)ㆍ오경돈(吳敬敦)ㆍ이남구(李南求)ㆍ한석형(韓錫亨)ㆍ김정건(金正鍵)ㆍ박봉양(朴鳳陽)ㆍ이상흥(李象興)ㆍ최준현(崔濬鉉)ㆍ최문현(崔渂鉉)ㆍ황종주(黃宗周)ㆍ조제환(曺濟煥)ㆍ용한채(龍漢彩)ㆍ소두열(蘇斗烈)ㆍ오근수(吳根洙)ㆍ임헌재(任憲宰)ㆍ박사묵(朴思默)ㆍ장찬(張燦)ㆍ이용희(李瑢熙)ㆍ박교병(朴敎秉)ㆍ최영설(崔永卨)ㆍ장조(張鋽)와 동년 동월 관학 유생의 응제에 입격한 유학 이찬영(李瓚永)ㆍ이몽득(李夢得)ㆍ성낙춘(成樂春)ㆍ강준원(姜俊遠)ㆍ김창연(金昌演)ㆍ이용은(李容殷)ㆍ이학원(李鶴遠)ㆍ김상기(金相驥)ㆍ송봉현(宋鳳鉉)ㆍ민영묵(閔泳默)ㆍ박노철(朴魯哲)ㆍ김제상(金濟相)ㆍ심기섭(沈起燮)ㆍ이종선(李鍾善)ㆍ김학준(金鶴准)ㆍ김현만(金顯萬)ㆍ탁계주(卓桂冑)ㆍ장재룡(張在龍)ㆍ이춘승(李春承)ㆍ김수현(金脩鉉)ㆍ김명규(金命奎)ㆍ현정린(玄正麟)ㆍ윤성근(尹星根)ㆍ김신용(金信鏞)ㆍ이병필(李炳苾)과 동년 12월 관학 유생의 응제에 입격한 유학 명처웅(明處雄)ㆍ윤계석(尹繼錫)ㆍ정순중(鄭淳中)ㆍ이홍구(李鴻九)ㆍ황의종(黃義鍾)ㆍ곽창현(郭昌鉉)ㆍ박인수(朴仁壽)ㆍ이석응(李石應)ㆍ신태긍(申泰兢)ㆍ이경재(李慶宰)ㆍ김정엽(金楨燁)ㆍ조만원(趙萬元)ㆍ이두범(李斗範)ㆍ유치봉(兪致鳳)ㆍ조동선(趙東璿)ㆍ강재봉(姜在鳳)ㆍ안정(安楨)ㆍ신현진(申玄鎭)ㆍ서용석(徐龍錫)ㆍ서병익(徐丙翼)ㆍ최동환(崔東煥)ㆍ김약태(金若泰)와 동년 동월 제술로 강을 대신한 일차 유생의 전강에 입격한 유학 오정환(吳楨煥)ㆍ김용수(金龍洙)ㆍ김기수(金琦洙)ㆍ심뇌택(沈雷宅)ㆍ김창섭(金昌燮)ㆍ신광휴(申光休)ㆍ유치흥(兪致興)ㆍ홍현석(洪顯奭)ㆍ조학원(趙鶴元)ㆍ김상우(金商祐)ㆍ박기창(朴基昌)ㆍ조동식(趙東植)ㆍ김재영(金在榮)ㆍ윤상천(尹相天)ㆍ김도제(金道濟)ㆍ윤순학(尹淳學)ㆍ한인곤(韓仁坤)ㆍ최기조(崔基肇)ㆍ김석후(金錫厚)ㆍ이승전(李承甸)ㆍ신현구(申鉉九)ㆍ이세룡(李世龍)ㆍ민병희(閔丙羲)ㆍ윤효정(尹孝定)ㆍ정수헌(鄭秀憲)과 동년 동월 월과(月課)에 입격한 유생 정도영(鄭道永)ㆍ조근하(趙瑾河)ㆍ노봉수(盧鳳洙)ㆍ김봉문(金鳳文)ㆍ이봉래(李鳳來)ㆍ손장현(孫章鉉)ㆍ민태운(閔泰雲)과 갑오년 2월 관학 유생의 응제에 입격한 유학 서태환(徐泰煥)ㆍ김주응(金周應)ㆍ김용주(金容周)ㆍ신사균(申思均)ㆍ최우홍(崔遇鴻)ㆍ엄장섭(嚴長燮)ㆍ정원모(鄭元謨)ㆍ한영수(韓永洙)ㆍ정조시(鄭朝時)ㆍ김관홍(金官鴻)ㆍ이규정(李奎鼎)ㆍ김인호(金麟鎬)ㆍ신종한(愼宗翰)ㆍ김임희(金臨熙)ㆍ권형규(權衡奎)ㆍ강건중(姜建重)ㆍ윤규환(尹奎煥)ㆍ권인흡(權仁洽)ㆍ황종국(黃鍾國)ㆍ김용기(金溶驥)ㆍ권병하(權炳河)ㆍ여영소(呂永韶)ㆍ신학균(申學均)ㆍ조득승(曺得承)ㆍ전희식(田熙植)ㆍ김권선(金權璿)ㆍ윤의순(尹義淳)과 동년 동월 제술로 강을 대신한 일차 유생의 전강에 입격한 유학 이종덕(李種德)ㆍ이상진(李相軫)ㆍ성우영(成佑永)ㆍ이인영(李寅英)ㆍ장용린(張容麟)ㆍ임병준(林炳畯)ㆍ박인묵(朴麟默)ㆍ김몽채(金夢彩)ㆍ이승월(李升月)ㆍ이시복(李施馥)ㆍ이돈화(李敦和)ㆍ김용준(金容準)ㆍ송종원(宋鍾元)ㆍ조석현(曺奭炫)ㆍ김종천(金鍾天)ㆍ이용우(李龍雨)ㆍ김용구(金容耈)ㆍ이기종(李起鍾)ㆍ이정규(李庭珪)ㆍ김이훈(金履勳)ㆍ최재학(崔在鶴)ㆍ정지원(鄭祉源)ㆍ이방녕(李邦寧)ㆍ윤자민(尹滋民)ㆍ조태봉(趙泰鳳)ㆍ곽증현(郭增鉉)과 동년 동월 관학 유생의 응제에 입격한 유학 정희원(鄭禧源)ㆍ최병필(崔炳弼)ㆍ신성우(申聖雨)ㆍ서후용(徐厚容)ㆍ송재수(宋載秀)ㆍ이종묵(李鍾默)ㆍ유진만(兪鎭晚)ㆍ김정환(金正煥)ㆍ박창응(朴昌鷹)ㆍ김영한(金永漢)ㆍ이상규(李尙珪)ㆍ이건룡(李建龍)ㆍ선우억(鮮于億)ㆍ손창건(孫昌建)ㆍ오신근(吳信根)ㆍ김성규(金●圭)ㆍ한병회(韓秉會)ㆍ이범구(李範九)ㆍ이덕순(李德純)ㆍ이성년(李聖䄵)ㆍ김은익(金恩翼)ㆍ강병모(姜秉模)ㆍ이승칠(李承七)ㆍ유사구(劉思九)ㆍ이창식(李昌植)과 동년 동월 감제(柑製)에 입격한 유학 최학수(崔鶴壽)ㆍ이능호(李能祜)ㆍ이희철(李熙喆)ㆍ박제현(朴濟炫)ㆍ한응교(韓應敎)ㆍ신석제(申錫悌)ㆍ손영하(孫永夏)ㆍ구한서(具漢瑞)ㆍ김상식(金商寔)ㆍ유호영(劉浩永)ㆍ박병귀(朴炳龜)ㆍ이준옥(李浚玉)ㆍ박태정(朴泰楨)ㆍ강병강(康秉强)ㆍ김현성(金顯星)ㆍ박성하(朴性夏)ㆍ손승철(孫承喆)ㆍ정승렬(鄭昇烈)ㆍ한동수(韓東秀)ㆍ양기형(梁基衡)ㆍ신태건(申泰健)ㆍ김현상(金顯祥)ㆍ김옥영(金玉榮)ㆍ오연중(吳然中)ㆍ이용섭(李龍燮)ㆍ신태린(申泰麟)ㆍ장수천(張壽天)ㆍ정대섭(鄭大燮)ㆍ윤대경(尹大鶊)ㆍ오연수(吳然秀)ㆍ박동현(朴東炫)ㆍ홍기섭(洪基燮)을 모두 감시 초시의 방목 끝에 붙이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모두 이번에 응시를 허락해 주소서.’라고 보고해 왔습니다. 김서용(金瑞鏞) 등 357인에게 모두 이번 감시 복시에 응시를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③ 승정원일기 3121책 (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5월 22일 [양력6월18일] 임술 6/13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 命宮內府特進官徐相祖, 命掌禮院卿徐正淳, 德陵令安世濬, 溫陵參奉申誠模, 依願免本官。 朴世珍·金鴻燮·沈相鎭·金性國·林源喆·廉泰駿任通信司電話課主事, 韓弼蕃任德陵令, 金裕秀任純陵參奉, 金錫東任溫陵參奉, 任議政府總務局長張世基, 任議政府議政秘書官兼任參書官尹悳榮。
고종 37년 경자(1900) 5월 22일(임술, 양력 6월 18일) 맑음
통신사 전화과 주사에 박세진 등을 임용하였다
○ 박세진(朴世珍), 김홍섭(金鴻燮), 심상진(沈相鎭), 김성국(金性國), 임원철(林源喆), 염태준(廉泰駿)을 통신사 전화과 주사에 임용하고, 한필번(韓弼蕃)을 덕릉 영에 임용하고, 김유수(金裕秀)를 순릉 참봉(純陵參奉)에 임용하고, 김석동(金錫東)을 온릉 참봉에 임용하고, 의정부 총무국장에 장세기(張世基)를 임용하고, 의정부의정비서관 겸임 참서관(議政府議政祕書官兼任參書官)에 윤덕영(尹悳榮)을 임용하였다.
④ 승정원일기 3124책 (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8월 18일 [양력9월11일] 정해 12/12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 贈吏曹判書李彜章贈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議政, 贈吏曹參判鄭純儉贈正二品資憲大夫內部大臣兼弘文館學士, 贈弘文直提學權正忱贈正二品資憲大夫內部大臣兼弘文館學士, 故承政院分注書李光鉉贈正二品資憲大夫內部大臣, 故承政院右副承旨朴大有, 故懿陵參奉李㙖, 故弘文館校理崔益勇, 故侍講院贊善崔載興, 故僉知中樞府事成彦檝, 故承政院同副承旨李惠祚, 故翊衛司副率李毅敬, 故成均進士朴夏源, 故翊衛司副率趙維鎭贈從二品嘉善大夫內部協辨[協辦], 故仁同府使金復元贈從二品嘉善大夫軍部協辨[協辦], 故侍講院弼善李恒祚, 故童蒙敎官姜昌溥, 故司僕寺正南玉, 故訓鍊院正安舜命, 故進士趙雲亨, 故學生李寬基, 故學生李鼎基, 故學生趙春慶贈正三品通政大夫秘書院丞, 以上特贈事奉勅。 度支部協辨[協辦]高永喜解署理大臣事務, 平理院裁判長金永準命臨時署理度支部大臣事務, 從二品李垠鎔·趙民熙·權鍾奭·張華植·吳景根免懲戒, 從二品李垠鎔命宮內府特進官, 中樞院議官金光錫·高倫相·閔鳳鎬·張道璘, 太僕司長閔泳迪, 弘文館侍讀朴鼎壽, 德陵令金裕秀, 黃海道觀察府主事崔行敏, 忠淸北道觀察府主事劉泰悅, 平安南道觀察府主事金均錫, 依願免本官, 尙衣司長閔泳晩任太僕司長, 侍講院副詹事李貞烈任尙衣司長, 正三品閔泳迪任侍講院副詹事, 秘書院郞柳寅哲任弘文館侍讀, 六品丁奎䄵任秘書院郞, 九品李載敏任德陵令, 趙載瓚任學部主事, 吳明根任黃海道觀察府主事, 尹興植任忠淸北道觀察府主事, 黃珀任平安南道觀察府主事, 正三品李周鉉, 六品李在俊·趙基命, 八品趙炳燦, 任中樞院議官, 從二品張華植, 任陸軍二等監督, 從二品權鍾奭任陸軍參領, 六品吳景根任陸軍副尉, 中樞院議官姜湕任漢城府判尹, 鎭衛第二聯隊第一大隊大隊長陸軍參領姜漢駿, 鎭衛第二聯隊第三大隊大隊長陸軍參領成夏永, 鎭衛第三聯隊第一大隊大隊長陸軍參領申佐均, 鎭衛第三聯隊第一大隊中隊長陸軍正尉洪淳明, 鎭衛第三聯隊第二大隊中隊長陸軍正尉柳錫用, 親衛第一聯隊第三大隊附, 陸軍副尉李敏稷鎭衛第二聯隊第三大隊附, 陸軍副尉鄭忠翊鎭衛第三聯隊第二大隊附, 陸軍副尉金顯澤鎭衛第五聯隊第一大隊附, 陸軍副尉李東植, 免本職, 陸軍副尉李敏稷·金顯澤, 任(任)陸軍正尉, 陸軍參領成夏永補鎭衛第一聯隊第三大隊大隊長, 陸軍參領申佐均補鎭衛第二聯隊第一大隊大隊長, 陸軍參領金漢鼎補鎭衛第二聯隊第三大隊大隊長, 陸軍參領姜漢駿補鎭衛第三聯隊第一大隊大隊長, 陸軍正尉洪淳明補鎭衛第一聯隊第一大隊中隊長, 陸軍正尉李敏稷補鎭衛第二聯隊第一大隊中隊長, 陸軍正尉柳錫用補鎭衛第三聯隊第一大隊中隊長, 陸軍正尉金顯澤補鎭衛第三聯隊第二大隊中隊長, 陸軍副尉李東植補親衛第一聯隊第三大隊附, 陸軍副尉鄭忠翊補鎭衛第一聯隊第一大隊附, 陸軍副尉吳景根補鎭衛第二聯隊第三大隊附, 陸軍參尉白南肅補鎭衛第三聯隊第二大隊附, 陸軍參尉金相應補鎭衛第五聯隊第一大隊附, 內藏院卿李容翊任警部協辨[協辦], 務安監理兼務安府尹李準榮任城津監理兼城津府尹, 密陽郡守朴炳翌任東萊監理兼東萊府尹, 正三品蔡賢植任中樞院議官。
⑤ 승정원일기 3137책 (탈초본 140책) 고종 38년 8월 27일 [양력10월9일] 경신 5/7 기사
1901년 光武 5년 光緖(淸/德宗) 27년
〈○〉 奉常司提調鄭承謨任秘書院丞, 正三品洪鍾宇任奉常司副提調, 九品洪龜杓任侍從院左侍御, 五品李秉昊任弘文館侍讀, 李泰河任濟州牧主事, 正三品朴勝驪, 九品洪鍾周任中樞院議官, 正三品李鎬奭任廣州府尹, 正三品朴炳翌任星州郡守, 前郡守金相一任咸平郡守, 前郡守李昌翼任茂長郡守, 前郡守李丙儀任昆陽郡守, 前郡守金鴻圭任鎭川郡守, 前郡守李敎承任雲峯郡守, 正三品金宗源任密陽郡守, 正三品孫永禧任機張郡守, 正三品鄭寅國任忠州郡守, 前郡守崔文煥任沔川郡守, 前郡守趙漢鏞任潭陽郡守, 前郡守洪祐奭任沃川郡守, 石城郡守沈在淑任安義郡守, 前郡守金容範任石城郡守, 金川郡守洪鳳觀任陽川郡守, 六品閔佑鎬任金川郡守, 前郡守李範錫任醴泉郡守, 六品張漢基任長鬐郡守, 前郡守林秉斗任利原郡守, 六品李梓奎任泗川郡守, 前郡守金進洙任龍宮郡守, 六品趙重淵任喬桐郡守, 六品李炳珪任報恩郡守, 前郡守趙秉吉任靑山郡守, 前郡守金益慶任鎭岑郡守, 前議官白南圭任昌平郡守, 前郡守申觀熙任庇仁郡守, 六品金裕秀任定平郡守, 六品金永珪任咸安郡守, 六品金志鵬任江東郡守, 前郡守白虎燮任价川郡守, 六品徐丙璘任固城郡守, 前郡守曺有承任朔寧郡守, 前郡守李圭穆任鎭海郡守, 六品朴龍勳任平昌郡守, 前郡守李啓弼任梁山郡守, 前郡守朴琫煥任彦陽郡守, 前郡守李承在任延豊郡守, 前郡守金建漢任高城郡守, 前議官徐丙緯任軍威郡守, 前議官金奎鉉任高敞郡守, 前郡守李錫珪任殷山郡守, 正三品柳濟寬任錦山郡守, 前郡守朴源明任同福郡守, 六品吳悳根任新寧郡守, 前郡守張烈任洪原郡守, 前郡守李孝稙任鎭安郡守, 前議官姜泳禹任鬱島郡守。 趙性薰·鄭會圭·李鍾冕任內部主事。
⑥ 승정원일기 3148책 (탈초본 140책) 고종 39년 7월 24일 [양력8월27일] 임오 8/12 기사
1902년 光武 6년 光緖(淸/德宗) 28년
〈○〉 秘書院丞鄭承鉉, 掌禮院相禮權沇, 惠民院主事鄭台斗[蘇台斗]·韓翼敎·辛庸熙·金錫宗·宋秉斗·朴春福·閔昌勳·鄭鎬運·李範寔·李圭鼎, 漢城府裁判所主事金鴻圭, 法部主事李秉烈, 外部主事權喆泳[權喆洙], 仁川監理署主事崔鳳柱, 吉州監理署主事張秉淳, 忠淸北道觀察府主事林炳權, 全羅北道觀察府主事鄭龜澤, 濟州牧主事金汶熙, 中樞院議官南啓逑·閔致殷·李範錫·權鍾振·崔錫彰·鄭喆朝·宋鍾徽·金昌洙·申模, 漢城裁判所主事李台燮依願免本官, 奎章閣直學士閔鳳植任秘書院丞, 議政府參贊李容泰兼任奎章閣直學士, 金容悳任掌禮院相禮, 申性均任侍講院侍讀官, 掌禮院相禮金容悳兼任奎章閣直閣, 鎭衛第二聯隊第三大隊餉官白南信兼任全羅北道均田監理事務, 鄭益源·金容章·朴龍根·白洛基·朴演珪·李支鉉·金時鏞·許薰·金鶴基·閔泳述任惠民院主事, 李台燮任漢城府主事, 兪升濬任法部主事, 李容憲·李建漢解法部法律起草委員, 朴五陽·咸東燮命法部法律起草委員, 朴五陽·咸東燮解法部法律起草委員, 劉漢杓·曺鳳煥命法部法律起草委員, 李熙敏任外部主事, 兪珽煥任仁川監理署主事, 金秉奭任吉州監理署主事, 金商圭任忠淸北道觀察府主事, 權孝善任全羅北道觀察府主事, 李成喬任濟州牧主事, 高源植解全羅南道種痘事務委員, 慶尙南道種痘事務委員金益泳命全羅南道種痘事務委員, 趙弼夏命慶尙南道種痘事務委員, 高源植命黃海道種痘事務委員, 法部主事兪升濬依願免本官, 金炳濬任法部主事, 朱錫冕·李秉奎·兪兢煥·李義悳·尹英烈·李夏燮·李錫禹·金裕秀·趙秉哲·朴遠炯·魯弘敎·趙琬九·鄭寬永·林炳角任中樞院議官, 李泰榮任漢城府裁判所主事, 前內部參書官李圭錫·嚴錫祚, 前濟州郡守洪培免懲戒, 內部參書官鄭應源依願免本官, 元景義任內部參書官。
◉ 승정원일기 3148책 (탈초본 140책) 고종 39년 7월 26일 [양력8월29일] 갑신 5/7 기사
1902년 光武 6년 光緖(淸/德宗) 28년
〈○〉 惠民院主事李容德·趙圭桓·洪淳貞·蘇秉洙·鄭元永·閔泳昌·李炳璉·鄭在一·高應演·金銀植, 內部主事具夏祖, 忠淸北道觀察府主事金永KC11242, 掌禮院相禮朴齊璜, 秘書院郞李元世, 侍講院侍從官李丙瓚, 智陵令朴章默, 漢城府裁判所主事尹洪普, 法部主事金驥東, 惠民院主事李晩洙, 內部主事趙玄植, 忠淸南道觀察府主事金澤魯, 全羅北道觀察府主事權孝善, 咸鏡北道觀察府主事趙景謨, 濟州牧主事秋松赫, 忠淸北道觀察府主事金永勳, 外部主事李熙敏, 仁川監理署主事兪珽煥, 吉州監理署主事金秉奭, 內部參書官元景義, 中樞院議官李夏燮·李秉奎·李義悳·李錫禹·金裕秀, 漢城裁判所主事韓文會依願免本官, 尹膺模·辛命集·金炳斗·咸駿澤·金泰衡·梁尙千·金廣洙·金永碩·金始模·南宮權任惠民院主事, 趙玄植任內部主事, 許協任忠淸北道觀察府主事, 閔泳晩任奎章閣直學士, 秘書院丞申政均兼任掌禮院掌禮, 李寅奎任掌禮院相禮, 金容完任侍講院侍從官, 李丙瓚任宗正院主事, 朴齊璜任秘書院郞, 韓哲敎任智陵令, 李定烈任純陵參奉, 韓文會任漢城府裁判所主事, 鄭元鎭任法部主事, 吳膺九任惠民院主事, 閔周植任內部主事, 朴驥鎔任忠淸南道觀察府主事, 林殷相任全羅北道觀察府主事, 朴鎭恒任咸鏡北道觀察府主事, 姜泰浩任濟州牧主事, 李秉泰任忠淸北道觀察府主事, 柳泰根任平安北道觀察府主事, 李性求任外部主事, 朴濟九任仁川監理署主事, 吳瀅彦任吉州監理署主事, 金大玉·李圭哲解法部法律起草委員, 蔡奎喆·申學達命法部法律起草委員, 蔡奎喆·申學達解法部〈法律〉起草委員, 朴遇吉·邊命夏命法部法律起草委員, 法部主事鄭元鎭依願免本官, 林在陽任法部主事, 尹一求任內部參書官, 金璟鉉·安永基·吳尙奎·朴世容·朴元秉任中樞院議官, 閔相鎬任漢城府裁判所主事。
⑦ 승정원일기 3150책 (탈초본 140책) 고종 39년 9월 8일 [양력10월9일] 을축 9/10 기사
1902년 光武 6년 光緖(淸/德宗) 28년
〈○〉安陵陵上石物及丁字閣修改時別單, 詔曰, 逢授官定平郡守金裕秀加資, 本陵參奉假官李國煥兒馬一匹賜給, 監董六品閔丙顯·金沅模·金德淵·盧基弘, 竝加資。 九品蔡善默·徐正翰·金好明·李會璹, 竝陞六。 六品李鳳德·金圖河·姜鳳岐·韓禹錫·具源模·姜永吉, 五品吳性默, 六品黃祐永, 從三品李駿鎬, 六品李弼均·金斗鉉, 竝加資。 九品崔在璘·李周夏·申彬·李昇宇·蔡奎彪·崔勉植·趙秉禧·趙載鳳·蔡瀅默·宋光洙, 竝陞六。 其餘鄕長·書記·畫員·工匠等, 竝令本道施賞。
◉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10월 9일 양력 2번째기사
1902년 대한 광무(光武) 6년
덕릉, 안릉, 지릉을 수리할 때 감동한 도신 이하에게 시상하다
덕릉(德陵), 안릉(安陵), 지릉(智陵)을 수리할 때 감동한 도신(道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감동한 정평 군수(定平郡守) 김유수(金裕秀), 안변 군수(安邊郡守) 김선규(金善圭), 4품 정운석(鄭雲晳)·서병수(徐丙壽), 6품 민재설(閔載卨)·정유섭(丁裕燮)·황우영(黃祐永)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원본】 46책 42권 5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66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德陵、安陵、智陵陵上修改時監董道臣以下, 施賞有差。 監董定平郡守金裕秀、安邊郡守金善圭、四品鄭雲晳·徐丙壽、六品閔載卨·丁裕燮·黃祐永, 竝加資。
【원본】 46책 42권 5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66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⑧ 각사등록 근대편, 宮內府來文 > 宮內府來文 79 >
장예원에서 첨부한 奏本 2건의 반포를 의정부에 요청하는 통첩
장예원에서 첨부한 奏本 2건의 반포를 의정부에 요청하는 통첩
원문서명 通牒
발신자 掌禮院主事 權錫禎
발신일 光武六年十月九日 ( 1902년 10월 09일 )
수신자 議政府主事 李哲圭 座下
通牒
奏本二度를 別紙錄交오니 卽爲印頒케심을 爲要.
德陵陵上石物及丁字閣修改時監董別單中 九品 金起範의 陞六과 安陵陵上石物及丁字閣修改時監蕫別單中 九品 李昇乾의 陞六과 智陵陵上莎草修改時監蕫別單中 郡守 鄭義東의 加資와 九品 咸仁鶴의 陞六를 幷添入改付票미라.
陞正三品
郡守 鄭義東
十月九日
陞正憲
內藏院卿 李容翊
陞從二品
侍從院侍從 閔康鎬
九月十五日
陞正三品
五品 朴準卨
陞正三品
六品 李楗重
陞正三品
六品 李載經
十月九日
陞敍判任官四等
營繕司主事 朴鳳陽
九月十五日
慶雲宮營建時監董宮內大臣以下別單中 度支部大臣署理 李容翊의 熟馬一匹賜給과 祕書院丞 閔康鎬의 兒馬一匹賜給은 幷加資요 營繕司主事 朴鳳陽의 兒馬一匹賜給은 陞一等으로 改付票이라.
德陵陵上石物及丁字閣修改時監蕫別單中 五品 朴準卨 加資와 九品 李瑄宰 閔丙喆 朴準模 柳東協 陞六과 安陵陵上石物及丁字閣修改時監蕫別單中 六品 李楗重 李載經 加資와 九品 韓秉九 陞六을 幷添入改付票이라.
遷陵時輓章書寫官奎章閣直閣 申敬善代에 六品 金裕弘으로 改付票이라.
官報第二千三百四十四號敍任及辭令欄內 宮內府主事 白萬甲의 五等은 四等으로 改付票이라.
詔曰 德陵安陵智陵上修改時監董道臣 徐正淳 熟馬一匹賜給.
德陵陵上石物及丁字閣修改時別單
詔曰 地方官咸興郡守 李喬永 兒馬一匹賜給 本陵令 朴用然 陞六 監董六品 韓龍源 張榮翼 四品 李永徽 六品 韓尙敏 金健行 南永熙 李鍾弼 幷加資 正三品 趙基牧 兒馬一匹賜給 九品 鄭泰均 許源 朴周衡 許璜 幷陞六 六品 安用相 權宅洙 柳技秀 劉興烈 閔泳五 曺旼承 劉漢容 幷加資 九品 申榮珏 鄭寬永 金善鎭 李容台 曺世煥 申命雨 李寅淳 金命濟 朱秉濬 吉民益 竝陞六 其餘鄕長書記畵員工匠等 幷令本道施賞.
安陵陵上石物及丁字閣修改時別單
詔曰 逢授官定平郡守 金裕秀 加資 本陵參奉假官 李國煥 兒馬一匹賜給 監董六品 閔秉顯 金沅模 金德淵 盧基弘 幷加資 九品 蔡善默 徐廷翰 金好明 李會璹 竝陞六 六品 李鳳德 金圖河 姜鳳岐 韓禹錫 具源謨 姜永吉 五品 吳性默 六品 黃祐永 從三品 李駿鎬 六品 李弼均 金斗鉉 幷加資 九品 崔在璘 李周夏 申彬 李昇宇 蔡圭彪 崔勉植 趙秉禧 趙載鳳 蔡瀅默 宋光洙 幷陞六 其餘鄕長書記畵員工匠等 幷令本道施賞.
智陵陵上莎草修改時別單
詔曰 地方官安邊郡守 金善圭 加資 本陵令 崔敏恒 參奉 金鍾鳳 幷陞六 監董四品 鄭雲晳 徐丙壽 金亨俊 六品 李鍾殷 權敏植 幷加資 正三品 金裕鎔 兒馬一匹賜給 九品 孫炳均 陞六品 崔達斌 李鶴容 金昇淵 丁裕燮 鄭周昇 崔文燦 閔載卨 南廷九 金永燦 李一相 李梓奎 吳昌泳 幷加資 九品 李柄孝 宋宅仁 白寅基 金德濟 金宇鉉 尹相佑 鄭煥悳 金容植 金思膺 竝陞六 其餘鄕長書記工匠等 竝令本道施賞.
以上 十月九日
陞正三品
六品 韓龍源
陞正三品
六品 張榮翼
陞正三品
四品 李永徽
陞正三品
六品 韓尙敏
陞正三品
六品 金健行
陞正三品
六品 南永熙
陞正三品
六品 李鍾弼
陞正三品
六品 安用相
陞正三品
六品 權宅洙
陞正三品
六品 柳枝秀
陞正三品
六品 劉興烈
陞正三品
六品 閔泳五
陞正三品
六品 曺旼承
陞正三品
六品 劉漢容
陞正三品
定平郡守 金裕秀
陞正三品
六品 閔秉顯
陞正三品
六品 金沅模
陞正三品
六品 金德淵
陞正三品
六品 盧基弘
陞正三品
六品 李鳳德
陞正三品
六品 金圖河
陞正三品
六品 姜鳳岐
陞正三品
六品 韓禹錫
陞正三品
六品 具源謨
陞正三品
六品 姜永吉
陞正三品
六品 黃祐永
陞正三品
六品 吳性默
陞正三品
從三品 李駿鎬
陞正三品
六品 李弼均
陞正三品
六品 金斗鉉
陞正三品
安邊郡守 金善圭
陞正三品
四品 鄭雲晳
陞正三品
四品 徐丙壽
陞正三品
四品 金亨俊
陞正三品
六品 李鍾殷
陞正三品
六品 權敏植
陞正三品
六品 崔達斌
陞正三品
六品 李鶴容
陞正三品
六品 金昇淵
陞正三品
六品 鄭周昇
陞正三品
六品 崔文燦
陞正三品
六品 閔載卨
陞正三品
六品 南廷九
陞正三品
六品 金永燦
陞正三品
六品 丁裕燮
陞正三品
六品 李一相
陞正三品
六品 李梓奎
陞正三品
六品 吳昌泳
以上 十月九日
詔曰 中和殿營建之役 行將竣完矣 告布之節 不容少緩 令掌禮院擇日擧行.
詔曰 命元帥府檢査局總長 李根澤 兼任鐵道院副總裁.
以上 十月六日
宣陵參奉 金宓圭
崇德殿參奉 朴在敏
依願免本官
元師府檢査局總長 李根澤
兼任鐵道院副總裁
惠陵參奉 宋敦憲
任宣陵參奉 敍判任官八等
閔泳得
任惠陵參奉 敍判任官八等
朴澤永
任崇陵殿參奉 敍判任官八等
以上 十月六日
法部主事 金南齊
典膳司主事 尹夔燮
宗正院主事 金宅鎭
敎坊司主事 洪淳寬
英親王府典讀 李世永
度支部主事 趙重益
英親王府典衛 金奭基
學部主事 徐相準
命進宴廳郞廳
以上 八月九日
官報第二千二百七十六號敍任及辭令欄內 進宴廳郞廳을 幷刪去이라.
太僕司長 李重五 九月二十八日 受勅
智陵參奉 梁在涉
崇仏殿參奉 柳秉斗
仝 鮮于勳
崇靈殿參奉 柳敬淵
仝 李錫章
箕子陵參奉 兪悌濬
仝 徐觀淳
東明王陵參奉 文時舜
仝 朱秉熙
依願免本官
義陵參奉 河龍洛
任智陵參奉 敍判任官八等
吉道允
任義陵參奉 敍判任官八等
鮮于逵
金謙植
任崇仁殿參奉 敍判任官八等
黃性濂
崔蒙煥
任崇靈殿參奉 敍判任官八等
李炳運
金致珊
任箕子陵參奉 敍判任官八等
金永璞
尹基奭
任東明王陵參奉 敍判任官八等
六品 崔益煥
九品 趙炳殷
九品 徐根晦
命侍從院分侍從
九品 李淳九
九品 朴珣澈
九品 朴台錫
九品 李東五
九品 韓昌禧
九品 金庠喜
九品 金鎭堯
九品 金景敏
命侍從院分侍御
洪在雯 鄭濟烈 申允克 韓東善 鄭在庸 吳性源
李宗基 康用年 金致連 金敎勉 李濟翼 李養根
金基玉 申榮萬 高命學 李養魯 金泰鎭 李喜信
金俊彦 玄利祚 宋廷鉉 弓處信 金鳳濟 朴正述
金成元 權 鎔 朴台永 崔希禎 金周善 盧永軾
沈明澤 李復圭 金命秀 朴普燮 蔡羲穆 尹基柱
文鼎奎 李岐鳳 李洙南 金士吉 朴永楚 康熙斗
李完熙 咸東圭 孫容鶴 李達承
任通信司電話課主事 敍判任官八等
十月九日
敎坊司主事 李紹鍾 九月二十四日 受牒
號外頒布
詔曰 明日當親行景孝殿別茶禮矣 勅任官祕書院奎章閣弘文館入參.
詔曰 明日東宮亦當親行景孝殿別茶禮矣 勅任官春桂坊入參.
十月九日
議政府贊政宮內府大臣臨時署理議政府贊政臣 尹定求 謹奏 明日出宮門路 以何門爲之乎 敢奏. 光武六年十月九日 奉旨 自內爲之.
營建都監提調臣 尹定求 謹奏 中和殿外三門 今將營建矣 門號令宮內府弘文館製進何如 謹上奏. 光武六年十月九日 奉旨依奏.
掌禮院主事 權錫禎
議政府主事 李哲圭 座下
光武六年十月九日
⑨ 정평군수 김유수 견책건 등의 관보 게재 요망
원문서명 通牒 第百九十八號
발신자 內部參書官 具本淳
발신일 光武六年六月五日 ( 1902년 06월 05일 )
수신자 議政府參書官 李道相 座下
通牒 第百九十八號
官報에 揭載 件을 左開오니 照亮시믈 爲要.
後
定平郡守 金裕秀
右 該道觀察使 徐正淳의 報告書 接准즉 該員이 永興郡守署理로 釋菜時에 擧措駭妄이라 얏기 是以로 譴責에 處 事.
六月五日 內部
安峽郡守 徐采淳 五月八日 到任
平康郡守 趙性載 五月十一日 到任
漆原郡守 曹有承 五月十四日 到任
三和府尹 高永喆 五月十五日 到任
三陟郡守 任喆宰 五月十七日 到任
結城郡守 洪鍾韶 五月十七日 到任
金堤郡守 安學柱 五月十八日 到任
恩津郡守 朴勝轍 五月二十四日 到任
內部廣濟院長 康洪大 五月八日受勅은 五月九日로 改正事.
內部種痘司技手 朴馨來 五月二十一日에 陞敍判任官四等은 以一月二十一日로 改正事.
內部主事 申永達의 永達은 以達永으로 改正事
濟州牧主事 金秀鎬
依願免本官.
申冕舜
任濟州牧主事 敍判任官六等
內部參書官 具本淳
議政府參書官 李道相 座下
光武六年六月五日
⑩ 잡지(雜誌)에 실린 기사
⑴ 개벽 제60호 > 南信北通
잡지명 개벽 제60호
발행일 1925년 06월 01일
기사제목 南信北通
기사형태 소식
南信北通
國境農村의 現狀
碧潼支社 一記者
엇던 方面으로 보던지 地方에 잇서서는 무엇보다도 山間農村의 慘狀이다. 우리 同胞의 生活狀態는 참으로 慘酷 불상하야 實로 엇더타 形容하기 어렵다. 昨年 凶作으로 因하야 至今 飢饉에 헤매이는 事實은 全 朝鮮的으로 다-가티 悲運에 陷한 바이지만은 昨冬브터 먹을 것이 업서 悲哀의 눈물을 뿌리며 僅僅히 지내오다가 이 봄쳘을 當하야는 草根木皮로써 生命을 保存코자 하는 同胞도 잇는 모양이다. 참말 누구의 힘으로써 救濟하려는가? 그런 中에도 이 國境農村에 限하야 더욱 만흔 苦痛은 新聞紙 上에 連日報道되난 바와가티 OOO그네들의 軍資金募集이다. 그러고 또는 不逞鮮人取締 그것이다. 이가티 二重三重으로 蹂躪을 當하는 悲哀와 鬱憤은 실로 붓을 들어 일일히 記錄할 수가 업다. 이 不意의 變을 當한 同胞들은 山間農村에서는 살 수가 업서 該地方都會로 不時에 몰녀드는 移徙군은 數를 들어 헤아릴 수가 업다.
또한 其中에도 無知의 苦痛이 第一 甚하야 배울내야 배울 곳도 업고 들을내야 들녀 줄 사람이 업서서 大槪는 迷信의 窟에 빠저서 그저 恐怖와 戰慄의 逆境을 超越할 勇氣가 업시 多神時代의 氣分만 넘치는 모양이다. 우리의 生活은 엇지하야 이러한 慘境에 빠졋쓸가?
이 엇지 農村의 痛歎할 바 아니랴. 나는 개벽 5月號에 揭載된 春坡先生의 말슴과가티 「農村欄」을 特別히 두어서 얼마라도 農民에게 便宜를 주기를 바란다.
江華片信
江華 一 報告生
△江華 蠶頭耶蘇敎會의 長老란 몃몃 사람은 絶對로 同會堂을 一般社會에 빌려주지 안키를 決議하고 「神聖한 禮拜堂에서」란 口實로 當地靑年會의 講演會나 或은 討論會에 對하야도 無可奈何로 빌리지 안는다. 萬一 다른 場所가 合當한 곳이 잇스면 구태여 빌리라고도 아니할 것이지만은 集會所는 但只 그곳 하나인 故로 江華地方은 靑年事業이나 여러 가지 方面으로 큰 妨害가 만타. 그들의 決議한 理由는 今年 陽曆 1月頃 어느날 江華 中央靑年會 主催 素人劇(饑饉救濟) 當時에 神聖한 禮拜堂 內에서 喜劇 「盲人의 經文 읽는 것」이 滋味업다는 것이 그 理由의 하나이오 또는 今春에 江華無名同盟에서 主催한 講演 時에 朴一秉, <32>鄭鍾鳴氏가 말하는 中에 야소敎 信者 中에 (입으로는 사랑과 무엇을 부르면서 實際로는 모든 虛僞를 한다)한 그것이 宗敎를 虛僞라고 하엿다는 理由인 바 대개 그 所謂 長老란 者들은 70, 80된 老人들이다. 宗敎에 對한 아모 理解도 업고 한갓 天堂 地獄說만 主唱하는 그들도 可笑이지만은 그 者들로 因하야 集會所도 업고 또는 여러 가지 妨害가 만흐니 그 宗敎에 對한 迷信的 行動과 廢物인 長老의 固執이 얼마나 이 社會에 害毒인가를 吾人은 痛罵한다.
△江華郡 良道面에서는 面長運動이 매우 猛烈한 모양이다. 지난달에 그곳 面長 閔泰憲이가 죽은 後 方今 百方으로 面長되기를 周旋하는 者가 20餘名이나 된다고 한다. 面長運動을 하거나 말거나 아모 關係가 업겟지만은 그 所謂 面長運動者들은 돈푼도 잇는 者가 만흔 터이오 그 中에 專門學識이 잇는 者로서 卑陋한 行動으로 面長이 되고저 하는 者가 잇슬 뿐 아니라 그 中에 權OO이란 者는 年前에 當地面長으로 잇다가 남의 집 處女를 强奸未遂한 일로 面民의 反對로 떠러진 그 者인데 今番에 다시 第一 有力하다 하며 그 中에 可笑한 일은 面小使 桂某까지 面長運動者 中 1人이라한다. 閔面長이 죽기도 前에 알는다는 말을 듯고 運動한 者도 잇고 죽은 지 그 이튼날에 府內에 와서 運動한 者도 잇섯다 한다.
이것을 한갓 우슴에 붓치고 말 것이지만은 아모리 走狗의 橫行하는 世上이지만은 그 者들의 行動이 얼마나 더러운 것을 알 것이 안인가. 可笑千萬-.
平壤漫話
요좀 各新聞의 社會欄에는 아들이 아비를 따렷느니 아우가 兄을 辱하엿느니 하는 等 滅倫悖常의 記事가 얼마라도 난다. 이것이 財産萬能 所謂 第一主義의 究竟의 破壞임은 勿論이거니와 그와가튼 怪惡한 例는 錦繡江山 平壤에도 잇는 모양이다.
우리 平壤에서는 누구도 드럿슬 말이겟지만 例의 金牛盈(假名)君은 돈이라는 그놈한테 얼마나 幻膓이 되엇는지 돈하고 親誼을 맷는 同時에 父子의 親兄弟의 義도 모조리 斷絶하야 한번은 自己의 아버지가 물 한 그릇을 請하는 것까지 不應하야 食刀戰까지를 니르켜스며 그 다음에는 自己親弟의 家屋을 집어먹으려고 他人의 名義로 그 家屋을 抵當잡고 金錢을 貸興하엿다가 期限에 支拂치 못하여 競賣하야서 半價로 取得하엿는데 그것이 發覺되야 第2次로 兄弟間에 싸움을 니르켜스며. 有是兄 有是弟로 牛盈君의 親弟 牛鬪(假名)君은 自己親父에게 盖瓦를 몃 張 貸與하엿다가 <33> 期中에 反還치 안는다고 소자식의 行動으로 父親 집예 가서 盖瓦를 모조리 벳겨와서 第3次의 鬪鬨을 니르켯다는 것이다.
오늘 制度의 밋혜서는 어느 程度까지 돈이 貴한 것도 事實이오 그 놈 때문에 사람의 心性이 根本으로 野卑化 凶惡化하는 것도 事實이겟지만 부대부대 錦繡江山이라는 平壤天地에 禽獸보다 醜怪한 動物이 샌긴다함은 이 무슨 不幸이냐. 實로 箕城社會를 爲하야 赤面할 일이인 同時에 돈밧게 또다른 것 몰으려고 하는 有産者 一般의 警醒할 일이다.
(平壤 一記者)
晋州雜信
晋州生
去月 下旬 晋州農校와 慶南公立師範學校에서는 入學試驗을 行하엿는데 한 件 滋味스러운 問題는 兩 學校當局에서는 特히 普校 昨年 卒業生(晋州人에 限에게는 入學을 絶對不許하엿다고 其 理由로는 晋州 兩普校 昨年 卒業生들은 今春에 至하기까지 一年間 修養은 아니하고 밤으로 낫을 이어 酒店 花柳界만 職業的으로 出入하야 浮浪者의 根性이 잇다하야 無資格者로 認定된 까닭이라 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냐. 父兄들은 東聚西貸 分分히 긁어모아 月謝金 其他學用品을 當해 내이며 잇는 것 업는 것 求하여서 自身은 險衣粗食하면서도 子女만은 남의 축에 빠지잔케 하노라고 눈코 뜰 사이업시 6個年의 長歲月을 一朝와 如히 誠心盡傾하야 그만한 企待와 所望을 達할지라도 滿足키 難켯거늘 보람 한 分 업시 父兄의 企待와 所望에 副함이 無하고 加之卒業後 事業이 侮辱을 사서 父兄에게 끼칠 뿐이니 어느 父兄이 子弟를 사랑치 안음이 아니나 工夫를 시켜 惡化됨을 보고 질겨 工夫시킬 바이랴.
父兄도 父兄이려니와 爲先 前程이 萬里인 君 等의 압길이 말 안이다. 小事인 듯하나 今番에 此事가 父兄에게 얼마나 落望을 주엇스며 君 等의 前途는 보다 以上의 震災가 업슬지며 後進에 對한 妨害도 또한 큰 것이다. 아지 못거라 高普入試에는 如何猛風이 起할넌지 諸君이여! 猛然 自省함이 잇슬가!?
不信任만흔 高原郡
一記者
시내 江邊에 돍도 만코 虛空 中天에 별도 만타드니 高原郡에는 不信任도 만타. 面長도 不信任 區長도 不信任 郡守도 不信任 大軆 웬 셈이냐. 當局者의 行政이 無誠意한 탓이냐. 民衆의 覺醒이 進就된 까닭이냐. 엇잿든 <34> 本郡 行政界는 四面楚歌 中에 孤軍의 感이 不無하다. 이제 그 內容을 調査하건대 本郡 下鉢面長 不信任事件은 舊免新任되엿스니 更論할 必要가 無하거니와 同面 南興里 區長 金基銑는 그 洞內人民이 面에다 貯하엿든 索綯(색기)代金을 橫領한 事實로 不信任을 當하엿다 하니 적어도 現代 總督政治 下에 末梢權力을 가진 區長으로서 못할 바 업지마는 한갓 섭섭한 것은 尙今도 郡面當局者가 그런 區長을 擁護留任한 것이엇다. 그는 그만두고 郡守 金衡泰君의 不信任된 事實은 엇더하냐. 지난 4月 30日 高原郡民大會에서 決議된 바에 依하면 첫재 高原 儒林慕聖會에서 高等科 講習設置計劃은 相當한 資源과 相當한 敎員이 잇슴에도 不拘하고 認可치 아니함은 그 理由가 道 當局에서 時期尙早라 한다고 하니 道內各郡에서 高等科 認可된 곳이 한둘이 아니어든 何必 高原에 限하야 時期尙早라 할 理由가 有하리오. 此는 다만 郡守의 無誠意 無責任한 까닭이라 하는 것. 둘재 郡農會로 말하면 郡內 一般農家와 及 郡內 土地所有者는 總히 會員으로서 會費 歲入總計가 近萬圓에 達하것마는 設立한지 4,5個年에 何等 人民의 實益되는 事業을 經營치 안튼바 昨年度에 唯一無二한 事業으로 養蠶及 機業傳習所를 設置하엿드니 그나마 今年에는 經費不足을 理由로 廢止하엿스며 또는 그 會의 任員은 郡守以下 庶務主任 及 各面長으로 하야 會員의 干涉을 不許하며 歲入歲出의 豫算決算도 公示치 아니하니 모든 것이 農會라는 그 自體의 낫분 것이 아니라 그를 運用하는 任員 卽 郡農會長인 郡守의 失策이라는 것. 그 外에 前郡守 劉鴻洵 때에 道에서 5個年인가 强制勸業을 斷行할 터이니 우리는 自作自給策으로 本郡에 桑苗圃를 設하야 外郡으로브터 購入치 말자고 苗圃를 設하엿든 것을 不拘하고 現郡守 赴任 後 道廳으로서 16萬本의 桑苗를 購入配付하야 已爲設置하엿든 苗圃의 損害를 준 것 等이라는데 來頭結果가 如何히 될는지 下回을 보려니와 또 한 가지 훌륭한 笑話꺼리는 高等科 講習 不認可 때문에 某某有志가 郡守에게 質問하는 中 何人의 失言을 奇貨로서 怒氣騰騰하야 하는 말이 내가 이제 善政을 하면 이 고을에서 善政碑를 세워주며 轉勤되야간다고 한들 어느 人民이 停車場에나 나와보겟나 하면서 己爲認可되엿든 初等科까지 廢止하라 命令하엿다나. 참 可觀이야. 花柳界 女子의 말과 가티 烈女碑 서기는 일 글럿는데 정든 님 下情이나 풀어보자는 格으로 善政碑 서기는 일 글럿스니 郡民의 幸福이나 阻害하잔 말인가. 善政碑 세우면 善政하고 <35> 안세우면 안하여 善政을 할 수 잇기는 하든가. 그러면 웨 赴任劈頭에 善政碑만 세우면 善政을 하겟다고 미리 宣言을 못하엿든가. 참 可爲 一笑之資로군.
健忘症만흔 庶務主任 本郡庶主任 藤林君은 精神이 엇지 조흔지 어제 한 말을 오날 몰은다든가 언제도 한 말이지만 本郡守가 鄕校에 잇는 初等學院認可까지 返納하라함으로 設立者되는 徐德九金龍秀趙中熙 3氏가 同行返納하는 當時에 藤林君 及 學務係 郡屬 尹台炳까지 보고 返納하는 理由를 말함애 잘알엇노라고 하는 藤林君이 不意에 初等科 廢止命令을 當한 初等科學父兄이 郡廳에 殺到하야 理由를 質問함애 彼 藤林君의 所答이 自己는 初等學院認可를 返納한 줄도 몰낫는데 徐德九趙中熙 兩人뿐이 高等科講習을 認可치 안는다는 野心 下에서 初等科認可까지 返納한 貌樣이라고. 內面事實을 몰으는 學父兄의 感情을 일으키매 이에 學父兄은 憤慨하야 徐趙 兩氏를 無數詬辱을 하엿든 바 決局 徐趙 兩氏의 郡當局에 質問하는 바람에 郡守와 尹 郡屬은 金容秀徐德九趙中熙 3氏가 返納하고 藤林君에게 事實을 말한 일이 잇다고 立證함에도 不拘하고 自己는 全然 不知하노라 無責任 無精神한 말을 하엿다나. 그리케 精神이 업스면 도라가 農事나 하지 庶務主任이 무엇이란 말인가. 郡守의 不信任 當케 된 것도 어느 點까지는 彼 藤林君의 助桀爲虐이 아니면 挾天子令諸侯한 罪가 아닌가. 끗흐로 한 말을 더 할 말은 旣設認可된 初等科는 廢止命令이 나리매 學父兄 60餘名은 이를 憤慨하야 各其 基本金으로 20圓式 出損하고 有志 金洛龍 金容秀 金裕秀 金斗秀 4氏가 各自 願寄附하니 合計 1,600圓인데 地方에서 400圓寄附를 더 募集하야 2,000圓 資本으로 한 거름 더 나가 幼稚學院을 設立코저 計劃하니 强制解散을 當한 어린이들은 깃븜으로 뛰고날치며 當局者는 암만 强制解散하야도 우리 父兄과 地方有志는 우리의 놀고 배울 機關을 設置하야 준단다. 이 內幕을 보면 郡當局者는 國家的으로 施設하는 敎育을 도로혀 妨害하는 者만 되고 말 뿐이엇다.
間島小論
間島支社
間島라-하면 우리가-모다 아는 바와가티 北을 朝鮮國境을 넘어 東三省 寒帶地를 이름이다. 東으로 시베리아 北으로 黑龍江省 西으로 北京을 峙한 四千里 曠野의 土肥穀豊한 滿洲 뜰이다. 그러고 우리와는 高句麗 쩍부터 因緣이 깁흔 곳이다. 그것은 歷史 上에 <36> 自在하니 구태여 辯論코저 아니한다.
邇來 數百年間 陳荒으로 무거잇고 中國사람이 間或 居住하던 바인데 4,5年來로 우리 同胞가 다시 開拓을 始하야 只今은 到處가 無非玉土金庄이요 或은 都 或은 鄕村에 百萬 名 同胞가 散居하야 至今은 第二朝鮮이라는 名號를 갓게 되얏다.
아! 內地에 게신 父母兄弟여 우리 間島同胞生活을 安樂으로 보넌가 悲慘으로 보넌가. 勿論 이곳은 土厚穀賤하니 衣食이 豊足하며 安樂한 生活을 하는 줄 一般이 짐작할 줄로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다 智識에 쫏기고 物質에 驅逐을 當하야 땃뜻한 錦繡江山을 던지며 사랑하는 親戚故友를 離別하고 피눈물을 먹음고 怨恨을 품고 건너온 새빨간 無産大群이다.
땅파고 勞働하야 僅僅得生으로 殘命을 保存하지만 頹敗한 社會를 새로 建設하기에 專心하고 落伍된 智識을 修養하기에 專力함으로 心身에 苦楚를 버서볼 날이 茫然하다.
우리는 이제 內地의 父母兄弟에게 間島同胞의 近況을 알려들이기 爲하야 支社社員 3,4名을 滿洲全幅踏査에 派送한 바 東으로 西領까지 北으로 黑龍江까지 遍踏을 目的한 故로 적어도 1個月 時日은 걸릴 모양이다. 그러면 그간에 밧브고 궁금하겟기에 不完全하나마 아직 近方부터 紹介하려 한다.
爲先 地理 上으로부터 記錄하여보자. 咸鏡北道 上三峰에서 下車하야 豆滿江을 건너서면 沃土가 廣濶하고 吾人部落이 左右로 櫛比한- 鐵道로 30里를 오면 南陽坪이란 市街가 有하다. 族居가 100餘戶요 人口가 5,6百이고 學校가 多數하다. 村村이 學校업는 곳이 업고 市街로 爲名한 데는 한 집 건너 學校인가 보다. 그길로 또 30里오면 平原廣野에 排設한 龍井村이란 大都會가 有하다. 吾族이 3千戶 以上이고 人口가 16,400名이다. 各國人士가 團聚하고 物産이 豊富하며 社會機關이 集注한 間島一帶 中心處이다. 千里長流 海蘭江이 包圍하고 帽兒山이 靑龍이요 一松亭이 白虎이다. 龍井을 中心点으로 定하고 北으로 40里를 가면 局子街라는 大市街에 吾族이 700戶요 人口가 3,500名이며 無邊大野는 廣袤를 難測이라. 西으로 40里를 가면 銅佛寺라는 大市街가 有하고 그곳서 20里를 가면 老頭溝란 新設市街가 有한데 炭鑛이 有名하고 또 그곳서 30里를 가면 天寶山이란 市街가 有한데 金鑛이 有名하고 또 그곳서 北으로 30里를 가면 *聲磖子란 大市街가 有하다. <37>
右記한 諸市街에 모다 吾族이 無非 7,8百戶이며 延吉縣-長五百里 廣이 三百里에 연접한 부락이 無非吾族이요 中族이 十常八九이며 田畓이 相半하고 學校가 村村有라. 龍井서 西으로 40里를 가면 頭道溝란 大市街가 有하고 그곳서 또 南으로 30里를 가면 忠信市街가 有한데 모다 吾族이 6,7百戶가 居하며 中小學校가 具備하고 田畓이 相半하고 山川이 秀麗하다.
龍井을 비롯하야 社會에 情況을 略論하면 아레와 갓다.
一. 宗敎 天道敎 信徒數 3千名 現宗理師 林明洙金宗憲趙昌德. 侍天敎 信徒數 3百名 現宗務長 李京鎬 宗務員 金圭復 長老敎. 信徒數 1千 5百名 現幹事 張碩咸韓德一. 天主敎 信徒數 250名.
二. 學校 東興中學校. 本校는 天道敎에서 피와 땀을 모두와 設立하고 만흔 社會에 同情을 힘닙어 由來 5,6年間 千餘名 學生을 繼續 修養하는데 現職員은 校長 尹益善 學監 鄭重燮 敎師 金夏榮, 李墉, 金奎澤, 金東熙, 尹台鎭, 李麟永, 趙鎭洽太田幾太郞, 朴載厦吳洸, 今年 第 2回卒業生 50名 在學生 650名 恩津中學校. 本校는 可奈陀 長老敎宣敎師 富斗一博士가 宣敎一部로 設立하고 由來 6年間-百 餘 名 學生을 修養하는데 現職員은 校長 徐高道 校監 鄭載冕 學監 李泰俊 敎師 劉季鴻, 金弼洙, 金河俊, 李成國, 金英浩 諸氏이며 海星男女學校. 本校는 天主敎의 主管으로 由來 5,6年間 數 3百 男女學生을 修養하는데 現職員은 如左하다. 校長 任竭忠 財務 金成學 敎師 金演君林元基, 李東善 諸氏더라. 現在學生 210名이요 卒業生이 16名이며 大成中學校. 儒林의 經營으로 由來 5,6年間-피와 땀으로 維持繼續하는데 現職員은 如左하다. 校長 桂昌烈 學監 鄭馬太 財務 南弘允 敎師 尹正魯, 金東曄, 林承弼 現在學生이 210名 卒業生이 14名이며 光明學校. 本校는 中鮮日露 4國有志의 協貫組織으로 由來 3年間-敎育을 勉勵하는데 現幹事 鄭士斌 主務外에 男女敎師 20餘名 敎授 下에 今年 卒業生이 132名이요 在學生이 327名이며 永新中學校. 本校는 多年間 長老敎會에서 熱血로 經營이던 바 經濟恐惶으로 由하야 同校의 重要幹事 鄭和洙 幾個人이 經營難을 口實삼아 가지고 暗暗裏에서 經營權을 日本人 日高丙子郞에게 賣渡하엿슴으로 同校會 及 一般社會에서 怨恨痛忿함을 참지 못하야 非難이 藉藉할 뿐아니라 尹和洙 撲滅을 닐으킨다더라.(下回를 보와)
三. 文化團體 朝鮮人民會天道敎靑年會 仝婦人會 龍井靑年會間島靑年總同盟會拓藝會3月會中央音樂俱樂部文友會少年會갈톱會 等이 有한데 其行績을 枚擧키 未遑하나 其中 朝鮮人民會는 대강이나마 긔록하지 아니치 못하겟다,
同會現會長 姜槿氏는 共公事業에 貢獻이 不少한 바 昨今 兩年旱災를 當하야 間島全民이 飢寒에 號泣함 <38> 참아보지 못하여 多方面으로 活動하여 生命을 만히 救濟하엿다. 木碑해서 무엇하랴. 路上行人口勝碑라 永久히 純實盡力함을 바란다.
京城雜話
尖口生
鍾峴天主敎會는 歐洲大戰以後로 本國의 送金이 끈어저서 經費가 困難함으로 敎堂을 50萬圓에 賣却하랴고 某 日本人會社와 交涉한다는 說이 잇더니 그것도 如意히 되지 못하고 近頃에는 더욱 困難에 빠저서 엇지 할 수 업는 中 佛國 가로아 領事夫人의 努力으로 5月 23, 4 兩日同敎會 內에 大慈善市를 開하고 三越吳服店 기타 유력 상점과 交涉하야 특별 廉賣를 행하고 또 각 模擬店을 開하야 信者 以外 一般人까지 敎堂 內部의 自由觀覽을 許하고 그 賣品代幾分을 敎會에 寄附하게 하얏다. 그 敎의 篤信者가 아니면 自來觀覽을 不許하던 所謂 信聖의 淨域도 金錢이 困難한 데야 엇지하랴. 거록하신 天主시여-돈을 좀 주십소사-아멘.
無識하고도 文字 잘 쓰는 咸南道知事 金寬鉉君은 近來 그 사랑하던 夫人이 죽엇는데 엇던 친구를 對하야 하는 말이 中年에 內艱喪 當하는 것이 참 困難하다고 하야 一時 笑話거리가 되엿다고 한다. 納稅를 아니하면 斯文亂賊이라고 하는 金氏로서 妻喪을 內艱喪이라고 하는 것도 容或無怪.
培材高等普通學校長 阿篇薛羅氏와 敎務主任 姜邁氏는 西大門警察署를 訪問하고 同校盟休事件에 努力 만히한 것을 致謝하얏다. 不幸이 學生들이 監獄은 안니갓기에 그만이지 萬一 監獄에까지 갓더면 兩君은 裁判所 刑務所에까지 致謝하러 디이네라고 발바당이 달을 번 하엿다.
問題多端하던 宋秉畯遺産은 그의 忘僕인 芮宗錫, 白完* 兩君이 마타 整理하던 中 全財産을 31萬圓에 賣却하야 負價를 淸帳하고 其餘 몃 萬圓은 개장메(狗肉) 논우드시 諸子群妾과 其他關係者의게 分配하엿는데 其中에는 踈薄妾으로 世評이 만턴 白樂子와 50萬圓事件으로 爭訟하던 李容九의 子 李顯奎까지 叅與하엿다. 그런데 宋氏의 諸子間에는 遺産分配로 暗鬪가 닐어나 잘못하면 兄弟相訟이 생길는지도 모르겟다 한다. 訟事問題로 火病이 나서 죽은 宋氏는 地下에서도 火病이나 또 나지 안을는지.
總督府 某 當局者는 말하되 朝鮮의 社會主義者들은 英語로 社會主義가 무엇인지 共産主義의 區別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고 한단다. 그러면 露西亞사람은 英語를 잘해서 勞農主義를 實現한 줄로 아는가. <39>
<32-39>
색인어이름 : 朴一秉,鄭鍾鳴,閔泰憲,金牛盈,金基銑,金衡泰,徐德九,金龍秀,趙中熙,尹台炳,徐德九,趙中熙,金容秀,徐德九,趙中熙,林明洙,金宗憲,趙昌德,李京鎬,金圭復,張碩咸,韓德一,尹益善,鄭重燮,金夏榮,李墉,金奎澤,金東熙,尹台鎭,李麟永,趙鎭洽,太田幾太郞,朴載厦,吳洸,徐高道,鄭載冕,李泰俊,劉季鴻,金弼洙,金河俊,李成國,金英浩,金成學,金演君,林元基,李東善,桂昌烈,鄭馬太,南弘允,尹正魯,金東曄,林承弼,鄭士斌,鄭和洙,姜槿,金寬鉉,阿篇薛羅,姜邁,李容九,李顯奎
단체 : 朝鮮人民會,天道敎靑年會,龍井靑年會,間島靑年總同盟會,拓藝會,3月會,中央音樂俱樂部文友會,少年會,갈톱會,朝鮮人民會
⑪ 선행(善行)
⑴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金裕秀氏의 美擧, 私財를 投資하여 泰誠醫院設立(永興)
발행년월일 1922년 05월 16일
발행구분무
면수04
단수03
표제어병원·의원 등
⑵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高原郡 市街設定에 同郡 金裕秀氏, 土地 三千坪寄附(永興)
발행년월일 1922년 10월 21일
발행구분무
면수 04
단수05
표제어도로·도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