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버러 스미스의 번역이 위험한 이유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영역본 <Human Acts)의 비교-
김성태
번역문학가, K펜문학회 회장
영국인 번역가 1987년생 데버러 스미스의 번역으로 한강 작가가 2016년 영국의 맨부커 인터네셔녈 상과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강은 물론 한국민 모두가 데버러 스미스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한강의 작품 이외에도 배수아의 여러 소설들과, 안도현 시인의 우화소설 <연어>를 번역하였다. 탁월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의 번역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점은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였다. <채식주의자>만 해도 60 군데가 넘는 수정을 보고했어야 할 정도이다. 그래도 책 제목과 내용에서 나오는 큰 제목들의 번역에는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는 모두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 “채식주의자”는 “The Vegetarian” 으로, 2부 “몽고반점”은 “Mongolian Msrk“ 로, 3부 ”불타는 나무“는 ”Flaming Tree“ 로 번역에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데버러 스미스 말고도 한국문학을 외국어로 잘 번역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1942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1985년부터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역임한 안선재(Brother Anthony of Taizé)같은 사람들이다. 파주에 있는 출판사 ㈜아시아는 한국 시인들의 시집을 다수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는데 2017년 안도현의 “시선” (Poems of Ahn Do-Hyun)도 안선재가 번역하였다. 안교수는 고은 시인의 시집을 비롯하여 수십권의 한국 문학 작품을 번역한 전문가인데그는 아예 1994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두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잘 이해하며 흠잡을 데 없는 빼어난 번역실력을 보여주었다.
데버러 스미스의 번역 <채식주의자>의 경우는 주로 그녀가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경륜을 쌓지 못한 데에 기인한 탓으로 보인다. 그래도 원작가가 만족하고 큰 성과도 내었으니 그만하면 다행이다. 그런데 한강 작가의 2024 노벨문학상 수상의 결정적인 작품 <소년이 온다>의 번역에 대하여는 짚어봐야 할 점이 많다. 원작가의 만족과는 상관없이 원래의 작품 내용에 번역자의 주관적인 의지가 과도하게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5.18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군이 행한 ”무자비한 살륙“을 고발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피해자“ 의 입장에서만 다룬 것이라서 한강 작가의 친삼촌인 한충원 목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심각한 정치적인 편향에 논란이 되고 있는 이 작품에 데버라 스미스의 번역은 불에다가 기름 부은 듯한 격이 되고 있다.
즉, ”소년이 온다“의 책 제목부터 ”Human Acts“ 라고 번역하여 민감한 출발을 시작하였다. ”인간의 행위들“ 또는 ”인간이 행위한다“ 라는 뜻이 되어 버렸는데, 거의 창작적인 수준이다. 도대체 인간이, 아마도 5.18 광주에서의 한국 정부군이, 얼마나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을 말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더욱이 번역자는 한강 작가의 원작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5쪽에 걸친 ”머릿말“(Introduction”을 첨가하여 1980년 대한민국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일방적으로 한국정부와 군인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확실한 안내문까지 추가하였다. 이 번역본을 읽는 외국인들에게 과도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대단히 위험한 시도라고 할 것이다.
<소년이 온다>라는 책의 본문 6개장과 에필로그 역시 그 중간 제목부터 <채식주의자>에서 보여준 객관적인 번역과는 거리가 멀다. 즉, 제1장 “어린 새”는 “The Boy. 1980” 으로, 제2장 “검은 숲”은 “The Boy’s Friend. 1980”으로, 제3장 “일곱개의 빵”은 “The Editor. 1985”로, 제4장 “쇠와 피”는 “The Prisoner. 1990”으로, ”5장 밤의 눈동자“는 ”The Factory Girl. 20“으로, 제6장 “꽃 핀 쪽으로” 는 “The Boy’s Mother. 2010”으로, “에필로그 눈 덮힌 램프” 는 “Epilogue The Winter. 2013”으로 번역하여 한글 원문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모습이다. 시간적인 순서를 나타내어 일견 이해하기에 용이하다는 점도 있으나 그 제목 하의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정부와 사회에 대하여 보다 체계적인 비판을 가할 목적으로 번역하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본문 각 문장과 선택된 각 단어 하나하나에서의 번역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제5장 “밤의 눈동자”(The Factory Girl, 20)에서는 “너의 기억”(You Remember), “지금”(Now), “봉기”(Up Rising) 라는 단어를 24 차례나 소제목으로 삽입하면서 사건 현장의 혼란한 모습을 극대화하고 있는데, 이는 원작가의 원문에도 없는 단어들이다. 데버러 스미스의 번역이 혹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잘 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첫댓글 다른 분들도 이런 의견을 좀 내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