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순천왜성 천수각…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로 이용한 순천왜성
순천 ‘정유재란 유적지’ 문화재 복원사업임진왜란&정유재란, 정묘호란&병자호란 상황도
1597년 12월에 축성된 왜교성은 일본군 고니시 (小西行長)가 군사
1만4000여 명을 이끌고 주둔한 성이다.
1597년 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4년간에 걸친 강화협상이
깨지자 재침을 명령한다.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은 대마도를 거쳐 부산포로 진입 충청도 직산까지 밀고
올라가다. 조, 명 연합군에 막혀 순천, 울산, 사천으로 후퇴한다.
순천 ‘정유재란 유적지’ 문화재 복원사업역사저널 그날 / 임진왜란 4부작 – 4편 정유재란, 일본군 조선을 다시 침략하다 6월29일 방송
일본군은 남해안 요충지에 왜성을 지은 후 장기전에 들어가고
전투는 왜성에서 이뤄진다.
특히 순천 왜교성이 갖는 의미는 크다. 조명연합 4만2000여 명이
한중일 용장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왜교성 장도에는 이순신 통제사와 진린 도독의 수군이 버티고
왜교성 뒤에는 권율 도원수와 유정 제독의 육군이 막고 있었다.
왜성 위의 고니시: “구리스토님! 살려주소서”
순천왜성의 천수각. 왜장 고니시가 머물렀던 곳.
1598년 9월 15일, 순천 왜교성 천수각. 밤이 되면서 바람도 없었고
성벽 아래 파도 소리는 달빛과 어울려 운치를 자아냈으나 폭풍전야의
평화로움이었다.
고니시는 울산성을 짓고 주둔 중인 가토 기요마사를 ‘무식한 칼잡이’라고
불렀고, 가토는 고니시를 ‘미천한 장사꾼 아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둘의 갈등은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을 정도로 심했다.
고니시가 조선인 노역자들을 동원 완성한 왜교성은 천혜를 이용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정유재란 격전지조선시대 - 정유재란.,'지리산 난중일기'.
3면이 바다에 접하고 서북쪽만 뭍으로 이어진 섬처럼 만들었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성 전체를 해자로 이용한 것이다.
동쪽 바닷가에는 500여 척의 전선을 보호할 선창까지 두었다.
왜군이 호남에 지은 왜교성은 히데요시가 직접 명령한 결과로
곡창지대인 호남을 장악하지 못한 점을 패인 중 하나로 꼽았다.
그래서 정유재란을 지시 ‘전라도를 반드시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전초기지가 왜교성인 것이다.
역사저널 그날 / 임진왜란 4부작 – 4편 정유재란, 일본군 조선을 다시 침략하다 6월29일 방송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 1598년) 정유재란
고니시는 자신의 건축 뿌듯함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이순신이 움직였다고?”
천수각에서 바다 냄새를 음미하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복귀한 이순신이 고금도에서 왜교성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에 의해 바닷길마저 막혀 버리면 왜교성의 일본군은 고립
무원 신세였다.
임진왜란1592에서 빼먹은 정유재란의 원인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수륙병진이구나. 승산 없는 싸움이다.”
고니시는 무역상 아들로 성장. 상인의 아들답게 계산이 빨랐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부하들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다윗의 자손 구리스토(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님께 기도를 드려야겠다.”
고니시는 어릴 적 포르투갈 선교사로부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고 크리스천이 되었다.
침실로 돌아온 고니시는 십자 성호를 그었다.
“주의 종 아우구스티노와 저의 부하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시기를!”
文禄?慶長の役(일본인이 칭하는 임진왜란,정유재란)(上)[토요 FOCUS] 정유재란·대한제국..역사 속 정유년, 그 절망과 희망
기도를 마친 그는 지난날을 곱씹어 보았다. 6년 전인 임진년 4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을 침공할 때는 명분이나마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교도의 나라를 개종시키기 위해 성전을 치른다는
사명감도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들이 이교도인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결한 전쟁’을
치렀듯이….
“우리는 성전을 치르는 군인이다!”
왜교성∼나로도∼고금도, 이순신의 ‘백리길 복수극’ 해상루트
고니시의 군선에는 X자 모양의 군기가 펄럭였다. 원래는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 모양의 깃발을 사용했으나 히데요시가 크리스천 금교령을 내리자
십자가를 X자 모양으로 변형시켜 눈가림한 것이다.
군선에는 십자가 모양 깃발이 펄럭였고 부대원들도 규슈 출신의
기리시단이 대부분이었다.
그리나 이번에는 명분이 없었고 호남인들의 씨를 말리라는 관백의
지침이 유일한 명분이랄까.
정유재란 때 포루투칼 용병이 참전했다?[토요 FOCUS] 정유재란·대한제국..역사 속 정유년, 그 절망과 희망
의미도, 승산도 없는 전쟁! 하루속히 왜교성을 탈출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었다.
1598년 9월의 보름달은 고니시에게 깊은 시름을 안겨주고 있었다.
바다의 이순신: “반드시 책임을 물으리라”
고니시가 고민에 빠진 그날 아침,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진영을
옮기고 있었다. ‘난중일기’에 행보를 추적해보자.
9월 15일 오전. 고금도의 날씨는 맑았고 출항에 좋은 날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진린의 수군과 함께 왜교성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른 아침, 이순신은 대장선으로 향했다. 전선 40여 척을 건조,
군사 8000여 명과 군량미 1만여 석도 확보했다.
그러나 심신은 지쳐 있었다. 오랜 진중 생활로 53세의 나이에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세버렸다.
징비록 심유경의 말로와 정유재란조선에 대한 분할음모와 정유재란/농암 김중위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못 알아볼 정도로 이순신의 얼굴은
늙었다.
임금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통제사로
복귀한 후에도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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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군과의 일전을 앞두고서 이순신 역시 고뇌는 마찬가지.
이번이 마지막 전쟁이 될 것임을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배를 타기 전 占을 쳐본 결과에 마음이 쓰였다. 一에서 四까지
새겨진 윤목을 던져 괘를 뽑아 길흉을 점쳤다.
‘첫 번째 괘는 吉하다. 그러나 두 번째 괘는 凶하다. 적군을 무찌르는
것이 길이라면 흉은 무엇인가?
그게 혹 나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순신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날씨, 가족의 안위 등이 궁금할
때는 척자점을 쳐보곤 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판에서 장수들은 종종 주역점이나
척자점으로 길흉을 예측하곤 했다.
“적군을 이길 수만 있다면 흉이 나에게 온들 무슨 대수랴.”
이순신은 단단히 마음먹었고. 중간 기착지인 나로도로 가는 대장선
위에 올랐다.
정유재란과 코베기전쟁임진왜란(33)-직산 전투(정유재란)
판옥선들이 노꾼들의 우렁한 소리에 맞추어 이순신을 따랐다.
선상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백의종군하던 작년(1597년) 4월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여수에 있던 팔순의 어머니가 아들이 옥에서 나와 백의종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아산으로 오던 중 배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조선에 대한 분할음모와 정유재란/농암 김중위[특별기획시리즈] >그날< 정유재란 508주년, 일본의 이중성은 여전
10월에는 막내아들 면을 왜병의 칼에 잃었다. 면이 나타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꿈을 꾸고 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조선인들을 도륙한 왜적들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반드시
책임을 물으리라.”
1598년 9월 순천 앞바다는 온갖 분탕질을 쳐놓고 내빼려는 자와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육지의 유정: “꼭 싸워서 이겨야만 하나”
일본과 강화 협상이 깨지자, ‘천자의 나라’ 도 자존심이 상했고.
왜군이 조선을 재침공하자,
명의 황제는 1597년 2월 재파병을 결정했고. 끝장을 보기 위해
1598년 7월 대공세를 펼치게 된다.
제독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2만3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으나
그는 남의 나라 전쟁에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듯 뭉기적거렸다.
1598년 9월 초, 유정은 왜교성으로 진군 밀사를 통해 고니시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유정은 3개월 내에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스스로 목을 베어 황제께
바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서둘지 마라. 내게 계책이 있다.”
유정은 고니시와 만나는 척 유인해 사로잡을 생각이었고, 장수들이
무모한 계획이라고 말려도 끝까지 우겼다.
그의 속셈은 고니시를 못 잡더라도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살려달라고 하면 적당히 봐줄 요량이었다.
‘일본군만 철수하면 피 흘리지 않고 성공하면 그게 智將이지.’
잇속 계산을 마친 뒤, 군막 안에서 기생과 술판을 벌렸고.
부하들은 유정의 행태에 분개했다.
그는 전투를 시늉으로 치르거나, 일본군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는 행태로 일관했다.
그는 번번이 이순신 수군의 발목을 잡게 되고, 책임자로 참여한
진린마저 항의할 정도였다.
명군은 자국 군사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패색이 짙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세 나라 장수들의 동상이몽 속에서 왜교성 전투가 다가왔다.
1598년 9월에서 11월까지 한중일 삼국 병사들뿐만 아니라
鬼이라는 묘족, 태국, 티베트, 스리랑카, 미얀마 등 범 아시아
출신의 병사들이 중국의 사병으로 참전했다.
16세기 세계 최대의 국제 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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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크랩 원문 : 안사10회 친목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