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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젊은 시인들
이대흠(시인)
1. 들어가며
남도의 시인으로는 1924년에 등단한 조운 시인이 있었지만, 남도에 현대시가 본격적으로 자리한 것은 《시문학》지가 발행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운과 김영랑과 김현구, 박용철 등으로부터 시작된 남도의 근대문학은 서울을 제외한 지역 중에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정착되었다.
또한 남도에서는 영랑이나 미당과는 다른 시 세계를 지향한 시인이 1930년대에 또 한 명 등장한다. 다형 김현승이다. 그의 작품은 영랑이나 미당과 달리 기독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 고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구, 절대 고독으로 이야기 되는 내면세계를 노래한 작품이 많다.
조운의 시조 세계와 영랑의 가락, 다형의 존재론적 탐구의 세계가 상이하다고 할 만큼 다르듯이, 남도의 현대시문학사는 그 땅의 풍요로움만큼이나 출발부터 풍성하였고, 이후 수많은 시인들이 보여준 다채로운 시 세계는 남도의 들이 지닌 비옥함만큼이나 그 작품 생산에서 빛나고 넉넉한 것이었다.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출발한 남도의 시는 이후 한국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고, 한국 문학의 주요 문인으로 수많은 시인이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50년대에는 박봉우와 이동주, 박정온 등을 들 수 있을 것이고, 1960년대에는 최하림, 조태일, 이성부, 문병란, 오세영 등의 이름을 거론해야 할 것이다. 또한 1970년대에는 김지하, 이시영, 문정희, 김준태, 송수권, 노향림, 고정희, 김남주, 송기원 등이 있었고, 1980년대에는 시의 시대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그 중심에 남도의 시인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이름을 수십 명은 호명해야 할 것이다. 황지우, 최두석, 곽재구, 나해철, 고운기, 박노해, 박몽구, 박남준, 이승철, 고재종, 조성국 등이 그들이다.
따라서 남도의 시인과 그 시인들의 작품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한국시문학사 전체를 논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거기다 한 개인의 작품만 보더라도 어느 부류라고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군다나 남도 시인들의 시가 지니는 스펙트럼은 매우 넓어서 1930년대의 영랑과 다형의 사이·1950년대 박봉우와 이동주 사이·1980년대의 황지우와 박노해 사이·2010년대의 송경동과 김경주의 사이에 포진된 무수한 시인들의 시 세계를 검토한다는 것은 제한된 지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광주전남지역에서 태어나, 현재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 원고에서는 이 지역 시인들 중 비교적 젊은 시인에 국한하여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그것은 이 지역의 시적 특질이랄 수 있는 것을 과거에서 찾지 않고, 현재에서 찾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다.
2. 남도 서정 혹은 전라도 정서
남도의 젊은 시인들 중에서 가장 남도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는 시인을 꼽는다면, 김선태 시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시에는 남도 특유의 가락이 있고, 남도 사람만이 알고 공유할 수 있는 정서가 있다. 혹은 남도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와 남도의 말에서만 볼 수 있는 토정(吐情)이 있다. 그의 시는 영랑 김윤식과 미당 서정주와 평전 송수권으로 이어지는 남도 서정의 맥을 잇고 있다. 특히 그의 최근작인 「섬의 리비도」 연작은 문화인류학의 보고랄 수 있는 남도의 수많은 섬에 남아 있는 독특한 풍속이나 관습을 발굴하고, 그 성스러움과 속됨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삶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그런 작품들과 한 선상에 있다고 보이는 작품 중 하나가 「조금새끼」라는 시인데, 이 작품을 읽다보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난다. 그것은 시에서도 나오다시피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남도 사람들의 삶과 애환, 비애가 스미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이 작품은 목포 온금동의 처마가 낮은 어느 선술집 안방에 걸려 있기도 하다.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 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 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있기 때문 아니겠는지요.
(김선태. 「조금새끼」 전문)
목포의 김선태의 시와는 조금 다르지만, 남도의 사투리를 잘 굴려 남도 정서를 맛깔나게 버무려내는 시인 한 명이 여수에 있다. 김진수 시인이다.
지북산 몰랑에 뻐꾸기 울면
산비둘기 구구대는 장사슴목골
달랑 한마지기 옹사리밭에
아부지는 들컹들컹 쟁기질하고
어무니는 쪼락쪼락 풋콩을 딴다
가다 한 모금
또 가다가 한 모금
촐랑촐랑 줄어가는 막걸리심부름
한 쪽박 샘물로 덧채우던 아이가
아지랑 묏등 앞에 바알갛게 엎드렸네
한 사발 거뜬 비우신 아부지
"오늘 막걸리는 왜 이리 싱겁다냐?"
그 소웃음소리 지금도 들리네
(김진수. 「풀섬 아이」 전문)
시인이 사용한 음성상징어를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어느새 발목에 찐득찐득 황토흙이 감긴다. 밭이라고는 ‘달랑 한 마지기 옹사리밭’이다. 그 밭에서 내외가 일을 한다. ‘아부지는 들컹들컹 쟁기질하고 / 어무니는 쪼락쪼락 풋콩을 딴다’ 저마다의 이마에는 웃는 땀방울이 맺혀 있을 것만 같다. 문제는 막걸리를 사러 간 어린 아이이다. 아이는 아버지가 마실 막걸리를 제가 먼저 마신다. 그러다가 ‘촐랑촐랑 줄어가는 막걸리심부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샘물을 퍼서 막걸리에 섞는다. 당연히 싱거운 막걸 리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져 있었을 아이를 보고도 아버지는 딴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막걸리는 왜 이리 싱겁다냐?’고 말하며 소처럼 웃을 뿐이다.
좋은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비애가 되었든 해학이 되었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감동을 준다. 특히 인간의 정서를 노래한 서정시에서는 그 정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을 읽으면서, 웃거나 울고, 연민의 감정을 가지거나 부끄러워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삶을 보다 긍정하게 된다.
이러한 남도 정서를 보다 우직하게 그려내는 시인으로는 이창수가 있다. 보성 출신인 그는 광주로 갔다가 서울로 갔다가 늦깎이로 공부를 하였는데, 최근 그의 고향인 보성으로 돌아와 다양한 문화 행사를 주도 하고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시편은 그의 시 중 보기 드물게 한자가 많이 사용된 작품이지만, 그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눙치는 맛이 잘 나타나 있다.
친구 조현수가 호남 최대의 禮式場에서 결혼했다. 호남 최대의 예식장에서 결혼한 조현수는 딸과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십여 년 뒤 우리는 조현수의 부고를 듣고 호남 최대의 禮式場으로 모여들었다. 호남 최대의 禮式場의 간판이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으로 바뀌어 있었다. 달라진 건 한 글자밖에 없었으나 禮式場과 葬禮式場의 간격은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멀었다. 아니 빚보증을 서주고 갈라선 조현수와 나와의 거리만큼 멀었다. 친구 조현수가 고등학교동창들의 환호와 축가를 들으며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일가의 곡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었다. 젊은 그의 아내는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에서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눈물을 쏟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그녀가 눈물 흘릴 때 하객들이 박수를 쳤으나 이번에는 조문객들이 가슴을 쳤다. 내 친구 조현수가 단 한 글자로 뒤바뀐 이 비운의 건물에서 수의를 입고 조문객들을 맞고 있을 때 나는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홍어에 소주를 마셨다. 조의금을 세고 눈물 흘리는 그의 일가를 보면서 禮式場인지 葬禮式場인지 아직도 헷갈리던 나는 박수나 가슴 대신 화투를 쳤다. 아직 조현수의 죽음이 실감 나지는 않았지만 호남 최대의 禮式場이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으로 바뀌듯 이해되지 않는 슬픔에 무작정 동참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건물 간판에 덧붙여진 한 글자에 대해 동의와 이해를 얻지 못하는 조현수와 고등학교동창들 어느 누구도 간판에 덧붙여진 한 글자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우리들은 禮式場과 葬禮式場 어디에서나 빠짐없이 밥상 위에 올라와 있는 홍어에 대해 홍어의 불가해한 맛에 대하여 골몰할 뿐이었다.
시의 내용은 단순하다 호남 최대의 예식장에서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결혼식을 하였던 화자의 친구 조현수가 죽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의 장례식장이 과거의 예식장이었던 그 장소이고, 간판만 장례식장으로 바뀌어 있다. 조현수는 그 동안 아들과 딸을 낳았고, 결혼식과 장례식이라는 상반된 상황 속에서 신부는 똑같이 울었고, 나는 예식장에서도 먹었고, 장례식장에서 먹은 홍어의 불가해한 맛에 골몰할 뿐이다. 조현수의 아내가 결혼식장에서 흘렸던 눈물을 단순히 기쁨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눈물이 장례식장에서 흘리는 비통한 눈물과는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결혼식장에서 먹었던 홍어의 맛이 같은 이의 장례식장의 상 위에 올라있는 홍어의 맛과 같을 수는 없다. 설령 같은 홍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음식의 맛을 감별하는 혀가 음식의 성분만을 분석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음식 맛은, 어떤 상황에서 먹었느냐, 누구와 먹었느냐, 어떤 감정 상태에 놓여 있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음식의 맛은 정서의 맛이다.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던 화자의 친구 조현수는 젊은 나이에 비운의 일을 당했다. 화자인 내가 빚보증을 서주고 친구 관계를 정리했다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조현수의 삶은 그다지 원활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딱히 빚보증을 서준 것이 이유가 된 것은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삶 속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은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화자는 그의 죽음이 실감나지도 않고, 예식장이 장례식장으로 바뀐 것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무작정 슬픔에 동참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화자가 그 슬픔에 동참한 것이 표기된 대로 ‘무작정’ 동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문장인 ‘홍어의 불가해한 맛’에 이르러서다.
이 시를 읽는 재미는 몇 가지 요소가 더 있다. ‘최대’ ‘최대’라는 말의 반복을 통해, ‘최고와 최대’만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천박한 의식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또한 슬프지 않고, 가식적으로 슬퍼하는 척 보이는 화자의 내면이 ‘홍어 맛’에 집약되어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또 하나의 반전이 남아있다. 이 시를 쓴 이창수 시인이 친구 조현수의 죽음을 직접 겪고 쓴 작품이 아니라, 자기와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의 이름을 조합하여, 이 세상에 없는 사람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읽는 것까지가 이창수 시를 읽는 또 하나의 독법이다.
3. 억압하는 현실과 그 반응
필자는 시를 쓰거나 읽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곤 한다. 모든 인간은 행복할 수 없을까? 모든 인간이 행복했다고 보이는 시기는 증명되지 않지만, 인류 역사상 모든 인간이 행복했던 때는 없었을까. 모든 인간이 행복한 시간에 있지 않았다고 하여도 모든 인간이 아름다웠던 시기는 없었을까? 타자로부터의 인정 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간이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을까. 그것이 단지 1분 동안이라도, 아니 1초 동안만이라도 모든 인간이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여기고 행복하다고 여겼던 단 한 순간도 없었을까?
인간의 삶에서 자기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이 행복감에 잠겨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보면, 내가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감을 느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행복하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서 비애가 발생한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기 삶의 질곡과 억압과 수난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그 정도가 심한 것이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일제 감점기가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오랫동안 독재 정권이 자유를 구속하였고,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었다. 브레히트의 말대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의 궁핌은 남도 시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인 조진태는 이렇게 말한다.
한 서정 시인이 나에게 말했다
"그것도 시냐"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때는
1980년대의 시절 나는 노래의 날개를 접었다
(후략)
(「풀벌레 청하여 부르는 노래」 부분. 조진태)
모든 인간이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는지는 증명이 되지 않지만,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그런 순간, 나아가 그런 순간의 지속인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인의 그런 꿈을 짓밟는다. 특히 1980년의 5월 혁명은 그 극점의 사건이다. 자국의 군대가 자국민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었으니, 어찌 그것을 인간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비인간적인 일을 자행한 세력이 정권을 잡고,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했던 그날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그때 죽어간 이들과 그 현장을 목격한 이들을 모욕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광주 전남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던 대다수의 시인들은 그날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적극적인 반영이건, 내면적 승화이건, 외면이건-수용한다. 조진태는 5월 혁명의 순간에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고, 이후로도 5월 정신을 살리기 위해 30년 넘게 싸워오고 생을 복무해 온 사람이다. 그는 폭압의 시대에 폭력에 가까운 언어로 시를 썼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풀벌레’를 노래하고, ‘그리움’을 말하고, ‘누군가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노래라면, ‘풀벌레 소리 청하여’ 부르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내 마음의 상처 쓰다듬어주어야 하고 / 벗들에게도 불러주어야 할 노래’(「풀벌레 청하여 부르는 노래」)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상의 거처를 찾고서도/ 안주할 수 없었’고, ‘이 지겨운 서정의 시대를/ 끝내야 할/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단단한/ 한 편의 시를 찾을 길 없네’(「지겨운 서정의 시대―김남주를 생각하다」)라고 절망 하였던 시인이 빨강 카네이션을 우리 앞에 내어 놓는다.
탱자꽃 하얗게 핀 날엔 뒷산에 올라
가만히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였다
느티나무, 박달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옛집의 흔적이 눈가에 맺혔다가는 지나갔다
세월은 유성처럼 흐르는구나 한없이 생각을 따라가다가
어둑어둑해진 밤 마지못해서 내려서는 길
매캐한 냄새 뒤집어 쓴 채로 집으로 돌아오던 날에
소스라치게 기억은 머물렀다
아침에 문득
아이가 가슴에 매달린다
창밖에 자두나무 바라다보며 눈물 나는 마음을 가만히 달랬다
(조진태. 「빨강 카네이션」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참기 어려운 일은 겪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두워질 때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가, 매캐한 냄새를 뒤집어쓰고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이런 화자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아이이다. 화자의 아이가 마치 카네이션처럼 가슴에 매달린다.
이러한 시세계의 변화는 조성국의 시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는 1980년대 말, 독재 정권의 현상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던 문학청년이었는데, 수배를 피해 다니는 중에 쓴 일기의 일부가 《창작과 비평》에 실리게 되어 시인이 되었다. 그것이 1990년에 발표된「수배일기」연작 7편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등단한 후 오랫동안 시집을 묶지 않고 있다가, 등단 17년째가 되던 해인 2007년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첫 시집을 상재한다.
하지만 그의 시집에서는 초기시에 보였던 격렬한 저항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잘 익은 사유를 바탕으로 한 시편들이 중심에 놓여 있다. ‘손바닥 살갗도/ 썰물 뒤 개펄과도 같아서/ 한 번쯤 멀리 밀쳐두고/ 손금 보듯이 낱낱이 살피면/ 밀어냈다, 끌어당기고/ 끌어당겼다, 밀어내는 몸부림의/ 상처가 엿보이기도 했다/ 슬그머니 일렁이는 윤슬의 누굴/ 내 몸에 앉히는 일이/이렇게 물 비린 상처다’ (조성국.「윤슬」부분) 손바닥 살갗에서 상처를 읽어내는데, 그것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 상처 한 번 보는 게 달이 차고 이울 듯 천천히 벌어지는 일이다. 손바닥에서 ‘밀어냈다, 끌어당기고 / 끌어당겼다, 밀어내는 몸부림의 / 상처가’ 누군가를 ‘내 몸에 앉히는 일이’고 그것이 ‘윤슬’과도 같은 ‘물비린 상처’라니! 상처의 여린 잔물결에 달빛이 내려앉겠다. 다음 작품은 「윤슬」과 같이 읽으면 좋을 시이다.
물의 결이 둥그렇게
열린다 가만한 명지바람에도
날리는 질량이
겹겹이 커지며 번진다
번져서 가라앉은 것인지
금세 가뭇없어진
나뭇잎의 물방울 하나에도
제 무게에 겨운 몇 굽이 생애가
잔잔히 주름져서
매달려 있던 것이다 이윽고
실날의 줄금은커녕 티 한 점 없이
가득한 바닥이
한 생애의 진동을 받아 뉘고는
파문을 닫는다
(조성국. 「둥근 진동」)
4. 다시 시작
시를 쓴다는 것은 최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시가 없었기에 시인들은 새로운 시를 쓴다. 만약 완벽한 시가 있다면, 시인들은 더 이상 붓을 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남도는 여전히 많은 시인이 배출되는 지역이고, 이후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중 두 명의 신예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소개할 시인은 이재연과 오성인이다. 이재연 시인은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제1회 오장환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고, 오성인은 2013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이재연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본시 너에게 두려움은 없었지
철근에 붙잡혀 사방으로 키워지는 네 몸은
생각보다 얇고 텅 빈 곳이 많아 빨리 자라났지
나는 생각했지 왜 저렇게 직선이 많을까
직선은 너무 빨리 자라나는 의지만 키우는 것 같았지
자꾸만, 나는 너를 또렷이 쳐다봤다가 몰래 훔쳐도 봤지
아질산나트륨이 들어 있는, 비엔나소시지를 들들 볶아 먹을 때면
날마다 너의 키를 키우고 있는 철근들이 가끔씩 입에 씹히기도 했지
멍석딸기 잎을 천천히 말리는 바람이 조금씩 단단해지는 너의 벽을 말리고
네 속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말렸지 너의 계단이 깊어지거나 높아지면서
너를 만들며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지
너는 수많은 방을 만들고 네 안의 어둠으로부터 창문을 내고
아무도 봐주지 않던 공터의 사생활도 삼켜버렸지
네가 있던 자리에 단단풍 나무가 있었다는 기억을 더듬을 틈도 없이
너는 찬란한 불빛까지 뿜어대기 시작했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마치 비타민처럼 네 입구로 삼켜지면서
너는 더 번들거리며 윤기가 났지
나는 아질산나트륨이 들어 있는
비엔나소시지를 다시 씹으며 보고 있는 거지
무수히 박힌 철근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너를 한참 동안이나
우러러 보고 있는 거지
(이재연. 「누구일까, 직선」 전문)
이 시에서 너는 ‘직선’이다. 그 직선은 철근이며, 비엔나소시지이다. 그리고 그 직선은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말아버린다. 마치 소시지를 직선으로 말듯이. 그것은 계단도 말아버리고 건물도 말아버린다. 그러기에 그 안에는 계단이 있고, 창문이 있고, 어둠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직선’을 만들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며 노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주 거대해져가는 직선이다. 마침내 공터까지 집어 삼킨 직선이다. 이쯤이면 독자는 눈치를 채야 한다. 이건 단순한 비엔나소시지 모양의 직선이 아니다.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직선화된 이 세상이다. 마치 우리는 돌돌 말린 비엔나소시지 속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철근인 줄도 모르고, 소시지를 먹듯 씹어대는 것이다. ‘이건 철근이 아니야. 이건 소시지야.’ 하지만 소시지가 철근과도 같다는 것을 여전히 모른다.
오성인은 젊은 시인이다. 나이도 젊고 시인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렇게도 시도해 보고, 저렇게도 덤빈다. 좌충우돌하고 절망한다. 그러면서 또 쉬지 않고 끄적거린다. 그것이 젊음이다. 실패의 횟수만큼이나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예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는,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나의 내부에는 도시들이 자란다
사치, 라고 발음하면 치가 떨려, 라고 말하면서 사료처럼 던져지는 사치를 묘기 하듯 받아먹었지 꿀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저항 밤마다 둔한 울음 몇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나가 도축되었다 도축된 울음들이 빨주노초파남보로 치장한 관에 포장되듯 넣어졌다 겨우 살아남은 몇은 차가운 선율이 되어 얼음처럼 울부짖었다
도시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죽기를 되풀이하면서
(중략)
비명(悲鳴)도 지르지 못하고 비명(碑銘)도 새기지 못한 채 회색의 시간에 묻히고 말 테지 가엽고 가벼운 내 안의 도시
내부에서는 여전히 도시들이 자란다
(오성인. 「품페이」)
그가 폐허 위에서 자기만의 성채를 쌓아올릴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를 해 본다. 젊은 시인은 우리 문학의 미래다. 따라서 이재연과 오성인 등이 남도 문학의 내일이다.
*《시작》 2016년 여름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내세울 것 없는 졸작을 저리도 좋게 읽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송수권선생님의 어린제자로 자라나서 남도의 정서와 언어로 글을 쓰고자 했던 꿈이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