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에 대해서 당연하고 막연하게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58문) 해설을 보면 영생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여러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해설 내용을 읽으며 성경을 찾아 읽다보면 저절로 성경공부도 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읽기 쉽도록 중요내용은 네모박스 안에 넣었습니다.
58문) 영생의 조목에서 그대는 어떤 위로를 받습니까?
답) 영원한 기쁨의 시작을 지금 내 마음으로 느끼고 있으니, 이 생명이 끝난 이후에는 내가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한 적도 없는 완전한 복락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그 가운데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것입니다. |
영생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언뜻 보면 답변하기 곤란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해서 말씀한 바를 볼 때에 더 그러하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 2:9). 그러나 생명의 유비에서 볼 때에 영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뭔가 희미한 생각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생명에 대해 철학자들은 별로 논란이 없고, 성경도 이에 대해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생명이라는 용어를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정의한다. 하나님과 천사들, 그리고 생물들과 식물들에 대해 사용될 때에는 일반적으로 살아있는 것의 존재 그 자체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영들도 살아 있다. 그러나 살려주는 영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고 그들 자체의 본질 혹은 본성에 의거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을 소유하고 있는 피조물들에 있어서는 생명이란 살아 있는 것의 존재인데, 이는 영혼을 부여받거나 혹은 그 자체 속에 살아 있는 영혼을 지닌 그런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그런 존재를 살아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영혼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영혼은 생명의 필수적인 형태라고도 할 것이다. 생명을 제1차적 행동과 제2차적 행동을 지칭하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즉, 존재나 행동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도 사용되며, 살아 있는 존재의 행동을 뜻하는 것으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이제 생명을 다음과 같이 좀 더 충실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생명은 살아 있는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의 존재 혹은 내주(內住) 또한 살아 있는 존재의 활동이다. 혹은 그것은 생명을 지닌 것에 합당한 일들을 수행하는 영혼의 완전성(헬라어로 엔텔레스케이아)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아니면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그 자체에게 합당한 일들을 산출하게 해 주는 바 적응성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또한 영혼과 육체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으로 말미암는 것들 자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원하다고 부르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처럼 시작이나 끝이 없는 것. 2. 하나님의 작정들처럼 끝은 있으나 시작이 없는 것. 3. 천사들처럼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 |
우리의 하늘의 생명을 가리켜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의미다. 곧, 그 생명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란, 중생을 얻고 영광을 얻은 사람의 영원한 존재인데, 이는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에게서 완전히 회복되어 완전한 지혜와 의와 복락을 소유하고 있거나 영원한 기쁨과 하나님의 참된 지식과 사랑을 부여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행위들 가운데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능력들 자체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를 알고 사랑하는 일입은 물론 신령한 삶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인으로서는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고전 2:14). 아니면, 이것을 다시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이란.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 하늘의 영광, 그리고 완전한 복락의 상태에 필요한모든 선한 것들의 완전한 결실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이다. |
한 마디로 말해서, 영생은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히 화합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완전한지식과 사랑에 있고, 또한 사람의 영혼과 육체 모두의 영광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당한 사고를 갖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1.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합. 2. 하나님을 완전히 따름. |
마치 결과가 원인에게서 나오듯이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하나님을 완전히 따르는 것은 하나님은 물론 그의 뜻과 행하심에 대한 선명하고도 올바른 지식에 있으며, 의(義)와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한 즐거움과 기쁨, 우리 육체가 얻게 될 마치 해처럼 빛나는 말할 수 없는 영광, 그리고 참되고 완전한 복락에 필요한 모든 선한 것들의 충족함에 있다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영생의 본질과 형태를 적게 표현한 것인데, 여기에 유효적 원인들과 최종적 목적들을 덧붙인다면 좀 더 완전하고 충실한 정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영생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 속에 영원히 거주하시는 것에 있으며, 하나님과 그의 역사하심과 뜻을 아는 참되고 완전한 지식에 있는데 이 역시 동일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마음에서 일깨워지며, 참되고 완전한 지혜와 의(義), 그리고 마음과 뜻의 모든 힘과 능력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완전히 일치하는 데에 있는데 이러한 기쁨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주어지며 금생에서 이미 시작되며 내생에서 완전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원토록 찬양받으시고 영광받으시게 되는 것이다.
이 정의의 각기 다른 모든 부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한다. 영생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 가운데 영원토록 거하시는 것을 뜻하는 부분은 다음의 본문들이 입증해 준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완전한 지혜가 거기에 포합된다는 것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는 말씀에서 드러난다. 영생은 완전한 의를 포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의를 소유할 자들은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눅 20:36).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또한 모든 선한 것들이 풍성할 것이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성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2, 23). 우리가 현재 부분적으로만 누리는 그 선한 것들이 그때에는 완전해 질 것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 마지막으로 그 어떠한 방해거리도 끝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계21:3. 4),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3).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단 7:27).
반론) 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영원토록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도 영원토록 산다. 그들도 불멸한 상태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영생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답변) 이 결론은 영생에 대한 불완전한 정의에서 이끌어낸 것이므로 힐이 없다.
영생이란 그저 불멸성이나 영혼이 육체 속에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그의 특별한 역사하심을 통하여 신자들의 속에 역사하시는 신령한 생명이요 하늘의 영광과 복락이기 때문이다. |
악인도 부활 이후에 불멸한 상태가 될 것이나 그들의 자연적인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사망일 것이다. 이 생명은 다음과 같은 것들과 결부될 것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내어쫓김. 2. 하나님의 지식과 은혜가 없음. 3. 영원히 계속되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막 9:48),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51). 이런 것들을 볼 때에 영원한 사망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악인이한 번 죽음으로써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영원토록 죽으며 끝이 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p.261∼262.
첫댓글 소개 글 처럼 성경공부가 될 정도로 성경구절 인용이 알차고 내용도 풍성하네요. 영생이 무엇인지? 아는 참 신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22
반론에 대한 답변을 보고서 천국 영생만이 영생이고 지옥 영생은 열벌이며 영원한 사망임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네, 맞는 말씀입니다. 좋아요!
우르시누스와 독일 개혁주의자들이 천주교의 공격은 물론이고 루터교의 압박 가운데에서조차 신학적 고민을 하고 치열한 답변을 내놓은 것을 느낍니다. 대단한 논리적 설명과 성경 예시입니다.
카시미리아눔
자신의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가 1576년에 사망하고 우르시누스는 루터교회의 화협신조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노이슈타트의 카시미리아눔에서 그는 새로운 교수직을 찾았다. 그는 1578년 4월 26일에 이사야 선지자에 대한 강의를 통해서 일을 시작했다. 노이슈타트에서 그의 마지막 거대한 작업이었던 《기독교 권고(Admonitio Christiana)》를 출판했다. 이것으로 그는 화협신조에 대한 강한 반박을 하였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루터교에 의해 대학교수 직에서 물러나는 불이익을 받았네요. 저 위의 댓글 내용이 이해가 됩니다.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풀어낼 수가 있군요.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을 뛰어넘어서, 살려주시는 분에 의하여 의롭게 되고, 진리를 알고,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서 영화롭게 된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들이 준비와 학습과 훈련을 거쳐서 들어가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굉장히 공부할 것이 많은 부분을 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코람데오님의 댓글에 공감하고 저도 우르시누스의 해설에서 잘 배우고 있습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