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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말씀/ 사도행전 5:17-6:7 요절/ 사도행전 5:20 | 2016.05.08 |
사도행전 제 6 강 |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말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맡은 자들의 책임은 막중합니다. 말씀을 맡은 자들은 말씀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사도들이 말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최고권력자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도들과 같이 캠퍼스 학우들과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선과 성령을 속인 죄를 엄하게 다룬 후에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었고, 사도들을 통하여 치유와 능력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백성들이 자기들을 따르던 데서 이제는 사도들을 따르게 되자 자기들의 입지가 좁아질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입을 틀어막고자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시기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생깁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습니다. 시기심을 방치하면 미움이 되고 살인까지 가게 됩니다. 시기심이 생길 때 즉시 십자가 앞에 들어나가 회개해야 합니다. 나를 철저하게 낮추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고자 할 때 시기심에 잡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그 밤에 주의 사자 다시 말해 천사가 와서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사도들을 세상권력자들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쉼을 주기 위해서 옥에서 꺼내주신 것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으로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는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사도들은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다 말해야 합니다. 성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른 아침부터 성전에 모여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요 복음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다 말하라’고 한 것은 복음의 핵심을 빠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회개와 죄사함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쳤습니다. 사도들은 차가운 감방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며 먼저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한 후에 성전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명을 쉬는 것보다 더 앞세웠습니다. 그들은 어떤 일보다 생명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감동되어 자기 몸을 돌볼지 않고 성전으로 가서 생명의 말씀을 말하고 가르쳤습니다.
말씀전파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는 뜻하지 않게 사고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내 가족이 있을 수도 있고, 내 친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살아 있을 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해줄 수 없습니다. 저는 처남이 심장마비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 절박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장인과 장모는 아들을 보낸 후에 마음이 허전하여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사람의 위로는 부모님의 펑크난 마음을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매주 예배당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조금씩 슬픔과 절망이 물러가고 활력을 찾고 있습니다. 목동과 목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가서 캠퍼스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신다니엘 목자님은 주일에 캠퍼스에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최야곱 목자님은 짜투리 시간을 드려 학생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여러 학사목자들은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이 땅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맡겨준 영혼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다 말했느냐?” 우리는 이 질문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나의 열정을 쏟아 생명의 말씀을 다 말했습니다.” 우리 목자들이 말씀전파에 더욱 힘씀으로써 하나님의 칭찬과 상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튿날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공회 앞에서 사도들을 심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23)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머리에 쥐가 나서 말했습니다. “이 일이 어찌 될까”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람이 와서 속보를 전했습니다.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이는 옥에 갇혀 있어야 할 사도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별하고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분별력을 상실했습니다. 자기들의 권위가 실추되어 매우 기분이 나빴고 사도들의 입을 막고자 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부하들과 같이 가서 사도들을 잡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강제로 옥에 가둘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을 따르는 백성들이 시위하며 그들을 돌로 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했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 그들은 사도들이 왜 예수 이름으로 가르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자기들의 죄가 드러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사도들을 단단히 혼을 내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9-3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와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공회 앞에 다시 섰을 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주눅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당당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며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다시 결단했습니다. 사도들은 핍박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정체성이 분명했고, 세상권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회원들과 이스라엘 원로들과 백성들 앞에서 생명의 말씀을 다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다 말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세상권력자들에게도 생명의 말씀을 다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고 하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는 짧지만 생명의 말씀이고 복음입니다. 첫째, 종교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사도들은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함으로써 종교지도자들이 시기심과 미움으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둘째,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메시야이십니다.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우리의 허물과 죄와 질고와 슬픔과 저주를 짊어지신 메시야이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고 높이심으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죽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죄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인간의 죄와 죽음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실 뿐 아니라 예수님을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과 구주로 믿는 자에게 회개와 죄사함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가장 존귀한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과 구주이실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왕과 구주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의 다스림이 임하도록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질병 가운데 있더라도 가난할지라도 실패를 반복할지라도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나의 왕과 구주로 믿고 그 다스림을 받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잘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잘 안 될 수도 있고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흔들림 없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고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를 높이는 참 제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베드로와 사도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는 자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보고 들은 대로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님도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합니다. 우리도 이 시대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증인의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캠퍼스 학우들에게 말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했습니다. 사도들을 죽여 없애 버려야 자기들이 편히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때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그들에게 제동을 걸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기에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가말리엘은 전에 드다가 일어나고 그 후 호적할 때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났지만 그들의 운동은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과 소행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가말리엘은 사상과 소행이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며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 있으니, 그들을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종교지도자들은 가말리엘의 제안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처형하지 않고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말리엘을 쓰셔서 사도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은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채찍에 맞으면서 기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채찍에 맞아 몸이 상하고 걷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 이름을 위하여 핍박받고 욕을 먹음으로 참 제자의 자격을 얻게 된 것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고 성령이 주시는 하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핍박으로 인해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며 부활의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증인으로서 정체성을 굳게 붙들므로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데 더 열심을 냈습니다.
6:1-7은 교회가 부흥하면서 생긴 문제를 사도들이 어떻게 해결했는지 보여 줍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교회가 커짐에 따라 구제역사도 활발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파 과부들 대상으로 구제가 이루어지고 헬라파 과부들은 구제대상에서 빠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할레파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했습니다. 교회는 부의 분배문제로 인해 마음이 나뉘고 파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2-4) 열두 사도들은 모든 동역자들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하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것은 구제역사를 섬길 자들을 따로 세우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입니다. 온 무리가 사도들의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구제역사를 섬길 종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이는 일곱 일꾼들이 사도들의 리더십 아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스데반과 빌립은 구제역사 뿐만 아니라 말씀사역도 섬겼고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교회가 커지면 제도를 만들고 새로운 일꾼을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역사를 힘있게 이루는 것입니다. 말씀역사에 집중하지 않으면 교회는 여러 문제에 말려들기 쉽고 마음이 갈라지고 분열될 수 있습니다. 문제보다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말씀역사를 이루는 데 더욱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불공평한 구제로 인해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즉시 지혜를 모아 그 문제를 해결했고, 말씀역사를 이루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리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복음을 영접하고 제자가 된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많은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런 제사장들이 복음에 복종하고 제자가 된 것은 말씀이 그들의 심령을 강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힘든 사람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말씀역사 창세기 말씀역사를 힘있게 이룸으로 춘천 4개 대학생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제자들이 세워지고 또한 우리의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현지 대학생 제자들과 목자들이 세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이 말씀에 순종하여 봄학기가 지나가기 전에 한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고, 평생에 걸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