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장모님에게 잘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어머니보단 장모님께 살갑게 지내려고 했다. 내가 장모님을 잘 모시면 집사람도 어머니를 잘 모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집사람의 관계는 좋지않았다. 같은 집에 오래살아서인지 아니면 그저 시부모가 싫어서인지, 아니면 장모님은 혼자 외롭게 사는데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게 싫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모든것이 복합적으로 발생해 마침내 우리는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렇다고 장모님과 같이 산것도 아니었다. 장모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장인은 북한에서 피난 온 피난민이었다. 내가 결혼했을 때 장인어른은 벌써 돌아가신 상태였다. 처가도 딸만 둘이였고 언니는 결혼을 한지 꽤 되어 집사람과 장모님 둘이 오래산것으로 안다. 나와 집사람의 사정은 비슷했다. 단지 다른게 있다면 결혼 후 나는 어머니와 같이 살았고 집사람은 장모님과 따로 살았다. 나는 거의 매주 처가집을 찾았다. 쓸쓸히 혼자 계실 장모님을 생각하고 그런 엄마를 생각하는 딸을 위해 가능하면 자주 방문했다. 장모님은 오랜시간 시장에서 가게도 없이 광주리 장사를 했다. 마늘 같은것을 까서 팔았다. 돈이 되지도 않아 보였지만 소일거리가 없으면 너무 심심하다고 했다. 말년에 장모님은 치매를 앓으셨다. 한 7~8년은 앓으셨던것 같다. 치매를 앓게되자 처형이 용인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요양병원 생활이 길어지자 처형 집에서 장모님을 모셨다. 장모님은 무릎이 좋지 않아 자리에 누워 대소변을 모두 받아야 했다. 2년 이상을 처형이 고생을 했다. 치매 초기에 장모님을 모시고 이마트에 간적이 있다. 우리집에 잠깐 계실때였다. 집에만 너무 있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을 듯하여 콧구멍에 바람도 집어늘겸 이마트를 찾았다. 그때도 심하지 않았지만 무릎이 좋이 않아 휠체어를 타고 계셨다. 우리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잠시 장모님을 혼자 두고 진열대로 갔다. "엄마, 여기 잠시만 있어, 바로 올게" 무릎이 아프신 장모님은 우리와 있을 땐 거의 움직임이 없이 휠체어에 앉아 계셨다. 한 5분 정도 되었을까, 장모님이 계셨던 자리로 돌아왔다. 장모님은 보이지 않고 휠체어만 덩그러이 있었다. 우리는 감짝놀라 매장을 뒤졋다. 아무리 뒤져봐도 장모님은 보이지 안았다. 황망했다. 안내석에 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CCTV를 보게 해주었다. CCTV에는 장모님이 밖으로 나가는게 보였다. 다리도 안좋은 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암담했다. 이마트 밖에는 CCTV가 없었다. 바로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고 주변을 한참 찾았다. 집사람은 사색이 되서 엉엉 울며 엄마를 찾았다.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증미역에 있는 이마트는 사방팔방 교통이 뚤려있어 어디로 가셨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점점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일단 집으로 가서 전단지를 만들기로 했다. 해볼수 있는 모든것을 해봐야 했다. 집사람은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전단지를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버스 기사분들에게도 나눠줬다. 인근 버스 종점에 찾아가서 혹 이런 할머니를 보시면 꼭 연락해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 다음날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춥지 않은 날씨였지만 밤에는 서늘했다. 장모님은 돈 한푼 없었다. 노인네가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3일째 되는날 버스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는 부리나케 버스회사를 찾았다. 장모님과 비슷한 할머니를 목동사거리 인근에서 보았다는 제보였다. 집사람과 나는 차를 몰아 목동사거리를 향했다. 제발제발 집사람은 바들바들 떨며 기도했다. 목동사거리 옆에 남부시장이 있었다. 그 시장에서 장모님은 가판 장사를 하셨었다. 정신이 없었지만 오랜시간 본인이 일하던 시장은 기억이 났던것 같다. 남부시장 버스정거장 벤치에 장모님 모습이 보였다. 3일간 잠도 제대로 못 잦는지 얼굴이 헬쓱했다. 옷도 지저분했다. 얼굴에 검뎅이 묻어 있었다. 집사람은 미친듯이 달려가 장모님을 붙잡았다. "엄마, 도대체 어딜 갔다 오셨어요" 장모님은 기운빠진 미소를 비치셨다. 만약에 그때 장모님을 찾지 못했다면 아마도 집사람은 한 평생 괴로움을 동반하며 살아야 했을것이다. 장모님을 잃어버리고 3일동안 집사람은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지새웠다. 나는 장모님을 찾겠다는 일념하에 거리를 헤메며 찾아다녔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멀리 가버렸다면 장모님을 찾을 길은 요원했다. 그나마 다행히 집 주변을 헤매고 돌아다녔던것 같다. "장모님,어딜 다니셨어요" 물어도 치매 초기셨던 장모님은 대답이 없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장모님은 막내사위인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장모님과 앉아 실없는 소리도 잘 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장모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햇다. 시간이 지나며 딸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장모님 자리를 보전하시다가 어머니 보다 3~4년 더 사시고 돌아가셨다. 좋은 세상을 누리지 못하고 오래 앓다 돌아가셨다. 주변에 어르신들은 이제 모두 돌아가셨다.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 외삼촌, 외숙모, 이모 이제는 내 차례다. 이풍진 세상을 이만큼 살아왔다면 그럭저럭 살아온것이다. 남기고 싶은것도 없고 할 이야기도 없다. 그저 남은 생을 나만이 아닌 타인울 위한 삶이 되도록 노력할 뿐이다. 용서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날들이 이어지길 기원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