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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사랑교회
 
 
 
 
 
카페 게시글
송정 사랑교회 성경공부 스크랩 출애굽-광야시대
목자 추천 0 조회 56 07.12.03 21: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애굽-광야시대

 


$045-2 - 족장시대 이전> 족장시대 이후의 애굽 바로들의 원정>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핫셉슈트의 뒤를 이은 투트 모세 3세(BC1490-1436년)는 6번째의 팔레스틴 원정길에서는 오론테스강 상류의 가데스를 정복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미타니와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 당시 헷족속은 무르 실리스의 바벨론 침공 이후 무기력해져 소아시아에 머물러 있었다.  카르낙에 있는 투트모세 3세의 비문에는 가나안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행정적 구분에 따른 가사, 추물(Sumvr), 쿠미디(Kvmidi)의 세 중심지가 나와 있다.
$046-1 - 족장시대 이전> 족장시대 이후의 애굽 바로들의 원정>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투트모세 3세의 승리 후 팔레스틴은 이집트의 한 도(道)로 다스려졌고 가사, 욥바, 울라사(Ulaza), 추물과 같은 도시들도 점차 이집트의 기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집트는 가나안 도시 왕국들이 조공을 바치는 한 그들의 내정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투트모세 3세의 아들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BC1439-1406년) 때부터는 제국의 분열이 싹트고 있었다. 그는 미타니에 대한 1차 원정길에 올랐으나 실패를 하였다. 그러나 귀국하면서 우가릿를 정복하고 계속 남하하면서 가데스를 굴복시켰고 이어 카사부(Khashabv)를 정복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미타니에 대한 1차 원정이 실패한 후 사론평야와 이스르엘 골짜기 지역의 성읍들의 반란 진압을 위해 다시 2차 출정을 하여 소고에서 반란군을 공격하고 긴네렛 북편에서 미타니 군을 격파한 후 귀국하였다(이집트 멤피스 소재, 아멘호텝 2세의 기념비에서).
$046-3 - 족장시대 이전> 족장시대 이후의 애굽 바로들의 원정> 애굽 제19왕조의 탄생
애굽 제18왕조의 바로인 늙은 아이(Eye)가 죽자 그 장군 하렘하브(Haremhah)가 백성의 추대에 따라 즉위하여 애굽 제19왕조를 탄생시켰다(BC1305년경). 그는 즉위하자마자 제18왕조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으며, 그 뒤를 이은 라암세스 1세(RamessesⅠ, BC1303년)는 2년간의 통치 후 곧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세티 1세(Seti Ⅰ, BC1302-1290년)가 바로가 되었다. 세티 1세는 즉위하자마자 1년만에 팔레스틴의 원정길에 올라 레바논 북부 해안 도시인 울라사까지 진격하여 아무루(Amurru)족과 야르무타(성경에는 야르뭇 혹은 레멧)에서 승리했다. 세티 1세의 팔레스틴 원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벧산에서 발견된 그의 승전기념비에 서술되어 있다.
“이날에 바로는 이 말을 들었다. 즉 하맛 성읍에서 야비한 원수가 ‥ 페헬의 엘라와의 조약에 의하여 벧산(베스안)을 장악하고 있다. 그는 르홉의 통치자로 하여금 그의 성읍을 떠나는 것을 허용치 아니한다.”
- 족장시대 이전> 족장시대 이후의 애굽 바로들의 원정> 애굽 제18왕조
힉소스의 근거지인 아바리스를 점령하여 애굽 제18왕조의 창시자가 된 아모세는 힉소스를 쫓아 팔레스틴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제3대 바로인 투트모세(텃모세) 1세(ThutmoseⅠ,  BC1510년경) 때에는 시리아와 유프라테스강 북부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다음의 투트모세 2세는 영약하여 대신 그의 왕후인 핫셉슈트(Hatshepsvt, BC1490-1468년)가 내정에 힘써 평화외교와 신전의 조영수축에 주력했다.
- 족장시대 이전> 족장시대 이후의 애굽 바로들의 원정> 애굽 제18왕조의 몰락
아멘호텝 2세의 사후 투트모세 4세와 아멘호텝 4세(Amenhotep Ⅳ=Ikhnaton, BC1364-1346년)에 이르러는 부패된 신앙이 만연되었다. 다행히 아멘호텝 4세때 국제정세는 애굽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북쪽의 미타니 왕국은 복잡한 싸움으로 애굽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헷족속은 수리아 중부 지역만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멘호텝 4세의 사후 12살에 등극한 투탄크 아톤(Tut-ankh-aton)이 젊은 나이에 죽고 그 뒤를 이은 아이(Eye, BC1344년경 즉위)도 죽자 정권은 그 부하에게 돌아가 애굽 제18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047 - 출애굽-사사시대
$049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애굽의 힉소스 통치 당시 애굽에 입주한 야곱 가족 70명은 힉소스가 추방(Ahmose, BC1500년경)되는 정치적인 변화 속에  서 이스라엘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힉소스를 추방한 바로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히브리인에 대한 인구 억제 정책은 출애굽 직전 더욱 심해져 라암셋과 비돔성을 건축하는데 이스라엘은 강제노역 속에 신음하게 되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는 역사를 베풀었는데   모세를 나일강에서 건진 바로의 공주는 투트모세 2세의 왕후인 핫셉슈트(BC1490-1468년)로 알려져 있다.
출애굽 사건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우리에게 거의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성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더우기 광야의 방랑경위를 알려주는 성서의 지명들이 가데스바네아(Kadesh-bamea)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위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 방랑의 지명들을 정확히 재구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이 너무나 인상적인 감동을 주고 있으며 놀랄만한 구출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여기서는 쉽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도움을 주는 범위내에서 논쟁의 타당성과 성서에 나온 지명들을 기준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출애굽의 경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세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가장 빠른 길로 지중해변을 따라가는 소위 “블레셋 길”이고, 두번째는 고센지방에서 술(수르)광야 중심부를 통과하여 가나안 남부의 중앙으로 가는 길이며, 세번째는 온(On)을 떠나 수에즈만의 북단을 거쳐 시나이 반도의 중앙부를 통과하여 아카바만으로 직행하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위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출애굽 경로에 대한 갖가지 증거자료(성서 및 고고학자료)를 가지고 일목요연하게 통일된 사건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지나치도록 정확하게 하려는 시도는 피하고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업 중심과 성서를 스토리(story)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의미로서 출애굽 노정을 표현하였다.
이스라엘의 애굽이주는 대체로 애굽의 힉소스 통치때 이루어졌으며 출애굽의 시기는 두 가지로 주장되고 있다.
첫째, 출애굽기 1:11에 근거한 BC13세기설이다. 출1:11에 나타나는 라암셋은 힉소스때 건설되었다가 제19왕조 세티 1세(BC1300-1290년)와 라암셋 2세(BC1290-1224년)에 의해 재건 확장된 세모땅의 타니스(소안)라고 생각한다. 이 타니스는 BC16세기경 힉소스의 추방 후 중지되었다가 BC14세기 제19왕조에 의해 재건되었으므로  BC15세기에는 출1:11에 있는 것처럼 큰 건축사업이 없었다고 본다. 또한 시78:12의 소안을 70인역이 타니스라고 번역한 것을 보면 시인은 이스라엘이 살던 곳을 소안이라 했는데 이곳이 바로 타니스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역사적으로 애굽왕조에 맞추어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은 라암셋 2세로 간주되며 출애굽 연대는 BC1290-1250년경으로 본다.
둘째, 열왕기상 6:1에 근거한 BC15세기설이다.  왕상 6: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땅에서 나온지 사백 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애굽에서 나온지 480년(70인역에는 440년)이 솔로몬 통치 4년이므로 분단된 이스라엘 연대를 전통적으로 BC 930년 전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 통치년수(왕상11:42) 40년,  왕이 된지 4년이므로 BC966년(930+40-4)이 된다. 그런데 이 해가 출애굽후 480년이므로 출애굽은 대략 BC1446년(966+480)이 된다. 이래서 BC15세기설은 애굽 제18왕조의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BC1504-1450년)를 출애굽 당시의 바로로 간주된다.
$050-1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050-2 12. 가데스▶광야▶가데스(민14:44-20:21)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한 말을 어기고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을 치러 갔다가 패하였다.
한편, 모세의 지도에 불만을 품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다가 땅이 갈라져 매장을 당하고 분향하는 250인은 불이 나와서 소멸당했다. 이튿날 하나님은 고라 사건으로 원망하는 이스라엘에 염병을 보내 1400명을 죽게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을 그치게 하기 위해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돋고 살구 열매가 열리게 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였다.
$051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트랜스 요르단으로의 북진(민21:10-35)
에돔을 출발한 이스라엘의 정복활동은 팔레스틴의 남쪽에서부터가 아니라 가나안 땅 경계 동편인 트랜스요르단(요단동편 고지)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의 정착지역들에는 목축을 하기에 적합한 넓은 지역이 있었으며(민32:1-4) 일찌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과 관련이 있는 에돔, 모압, 암몬 족속들이 소왕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모압과 암몬 사이에 위치한 헤스본에 거점을 둔 아모리 왕국의 시혼(Sihon)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때 이미 모압의 초대왕을 격퇴하고 아르논강까지를 차지했다(민21:26). 이런 상황을 파악한 모세는 모압과 에돔 왕에게 시혼왕국의 영토로 올라갈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강한 반발로 거절당했다(민20:14-21, 삿11:17). 할 수 없이 모세는 에돔과 모압 지역을 피해 남쪽으로 우회하여 엘랏까지 내려간 후 동부 사막을 통해 시혼 왕국으로 북진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은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모압간에 전통적인 국경이 되었고 모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에돔을 우회한 이스라엘은 오봇, 이예아바림, 세렛 골짜기, 아르논 건너편 브엘에서 출발하여 맛다나, 나할리엘, 바봇, 모압 골짜기, 비스가산, 야하스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 전쟁에서 연승하며 가나안을 향해 계속 진군했다.
이어 헤스본의 시혼왕에게 그 땅의 통과 요청이 거절하자 에돔과는 달리 시혼왕과 싸워 완전한 승리로 아르논강에서 북쪽의 얍복강까지를 점령하였다. 뿐만 아니라 계속 북진하여 바산길로 올라가 에드레이에서 바산 왕 옥(Ok)을 치고 다시 남하하여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로 돌아왔다(민21:21-22:1).
$053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1.라암셋▶숙곳(출12:37-40,13:18-19)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당시 첫 출발지는 라암셋인 것을 성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라암셋(Raamses, 라므세스)은 나일강 삼각주 동북편에 위치한다. 옛 힉소스족의 수도는 아바리스 소안(Avaris Zean)이며 세티 1세와  라암셋 2세가 강제노동으로 재건하여 다시 수도(首都)로 삼았고 라암셋 2세는 “라암셋의 집”이라 칭하였는데 이 명칭은 11세기까지 불리다가 그후에 타니스(Tanis)라고 불리웠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2.숙곳▶에담(출13:20-22)
숙곳에서 에담까지 가서 장막을 쳤는데 이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셨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3.에담▶바알스본 맞은 편(출14:1-20) )
이스라엘이 비하히롯 곧 바알스본 맞은편에 장막을 치고 쉬고 있을 때 변심한 바로는 특별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로 비하히롯곁 해변가까지 추격했고 이스라엘은 홍해가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4.바알스본 맞은 편▶마라(출14:21-15:26 )
바로의 군대와 홍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으로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고 바로의 군대는 수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수르 광야(민33:8에는 에담 광야)에서 3일을 갔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얻은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자 그곳 이름을 마라(쓰다)라 하였다. 이에 모세는  물이 달게 하여 마시게 했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5.마라▶엘림(출15:27)
마라를 떠난 이스라엘은 물샘 12과 종려 70주가 있는 엘림에 도착하였다. 엘림에 대해서는 두곳이 주장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와디 가란델(Wadi. Gharandel)이 더 신빙성 있게 주장되고 있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6.엘림▶신광야 (출16:1-36)
라암셋에서 신광야까지는 한달 걸렸으며(출애굽은 제 1월 15일 아침) 그들이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심한말로 원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7.신광야▶르비딤(출17:1-18:27)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 도착하여 “목말라 죽게 한다”고 원망을 하자 모세는 감정에 격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지 못함으로 훗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이르러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는 손을 들어 기도하고,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을 붙들었으며, 여호수아는 나가 싸워 아말렉을 도말하였다. 그리고 팔을 들고 기도한 곳에 단을 쌓고 그곳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다. 그리고  광야에서 모세는 장인 이드로와 가족을 만나 이드로가 제안한 부장제도를 받아들여 재판하는 일을 분담하도록 했다. 후에는 10부장 외에  패장(officers)을 추가했다(신1:15).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8.르비딤▶시내산(출19:1-40:33)
라암셋에서 시내산까지는 3개월이 걸렸다(출19:1).시내산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받았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숭배에 빠졌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9. 시내산▶다베랴(출40:34-58, 민10:33-11 :30)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대로 성막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을 출발하여 3일 길을 가서 다베랴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자 하나님은 불로 진을 살랐고 탐욕을 품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출12:38에는 중다한 잡족)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또다시 원망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코에 넘쳐서 싫어 하기까지 고기를 1개월간 먹게 될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10. 다베랴▶하세롯(민11:51-12:15)
고기를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다베랴에서 하룻길 되는 지면 위에 많은 메추라기를 주시고 그 고기를 먹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로 탐욕한 자들이 죽었는데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 (탐욕의 무덤)라 불렀다.
이후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을 보고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므로 미리암은 문둥병을 들게 되었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11. 하세롯▶가데스(민12:16-14:43)
하세롯을 지나 가데스에 이르는 바란광야에서 각지파의 족장 12명을 선택하여 정탐꾼으로 보냈다. 그러나  10명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듣고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13. 가데스 호르산(민20:22-21:3)
미리암이 가데스에서 죽은 후 호르산에 이르렀을 때 아론은 123세에 죽었고 그의 옷은 그 아들 엘르아살이 입었다. 이때 가나안의 아랏왕이 이스라엘의 몇 사람을 사로 잡았는데 이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장받고 그들을 쳐서 그 성읍을 멸하고 그곳을 호르마 라 하였다.
- 출애굽-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 느보산에서의 모세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를 인도한 후 마지막을 느보산 정상에서 마쳤다. 느보산은 789m 고지로 이곳에서는 여리고의 풍성한 성읍이 내려다 보인다. 그가 본것은 자신의 사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받을 유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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